산돌교회

02/16/2020 - 룻기 2:1-1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2/16/2020 - 룻기 2:1-13

PastorYK 2020. 2. 19. 14:07

 

말씀: 룻2:1-13

제목: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하십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가장 어렵고 가장 쉬운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삭줍기가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만, 어른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감하십니까? 공감하심을 믿고 질문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자기 눈앞에 떨어진 금 덩어리와 이삭이 있다면 그 중에 어떤 것을 줍게 됩니까? 100% 다 금덩어리를 줍게 됩니다. 왜요? 왜 이삭이 아니라 금덩어리를 줍습니까? 금덩어리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욕심과 삶의 기준이 세상에 완전 박혀있다는 뜻이기 합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주우면 성공합니까? 금덩어리를 주우면 성공합니까? 당연히 금덩어리로 말할 것입니다. 다들 금덩어리만을 주울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금덩어리를 주은 아간은 저주를 받았지만, 이삭을 주은 룻은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린 오늘 이삭줍기를 하는 룻을 통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금덩어리이기에 금을 오직 바라게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금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닌가요?  룻이 만약에 금덩어리를 더 원하는 여인이었더라면 

 

룻은 성경에서 의인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삭줍기에 대한 감사와 가치를 룻이 믿음으로 알았기에 영원한 빛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줍기를 부끄럽고 감사하지 못하는 재물에 눈먼 아간같은 세상 사람들은 결국 욕심으로 심판을 받고 버려지고 말겠지만, 그러나 이삭줍기를 기뻐하고 감사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은 그 가난한 마음 때문에 영원히 룻의 복을 받고 그 빛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망하는 이유는 한 알의 그 이삭의 가치를 무시한 결과가 아닙니까? 

 

한 알의 이삭의 가치를 모르면 머리통만한 금덩어리를 가질지라도 자신도 죽이고 이웃을 죽이는 재앙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공부하면서 비슷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이삭을 주으면 서로 100% 안전하지만 금덩어리를 주우면 서로 죽이고 죽게 됩니다. 인간은 본질이 죄 덩어리입니다. 기회만 나면 죽는 길로 향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우리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버려질 우리들을 영원히 살려주시려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십니다. 레23:22입니다. 

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인색하고 무자비한 인간들을 향하여 믿음을 주시면서 베품과 나눔으로 이웃 간의 연합하고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제사 때에도 화목제물을 드려서 제사장도 이웃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같이 배부르게 하십니다. 신12:10-19, 신14:23-29입니다. 

신명기 12:10-19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3.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15.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으려니와
16.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17.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18.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19.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명기 14:23-29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리고 안식년 때에도 보세요! 레25:1-7입니다.

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3.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4.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5.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6.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7.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웃 간의 따뜻함과 화목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난하여 참담했던 최악의 나오미와 룻도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굶지 아니하고 겨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추수할 때에도 떨어진 이삭, 열매들은 남겨두라고 명하시므로 제사장 나라의 면모를 보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했을까요? 룻2:15-16을 보세요!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이삭을 주워서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들을 무시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부끄럽지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룻은 이방여인으로써 줍는 것은 자기 나라에서도 거지들이나 그랬음을 모를 수 없습니다. 물론 룻이 나오미의 친 딸이라면 약간은 몰라도, 며느리로써 이삭을 주어 시어머니의 배고픔을 해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잘 보세요! 이삭을 주워서 배고픔을 면하게 되면서 작은 가치를 알게 되고 그리고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살아야 되는 이런 처절한 위기 상황에서 고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결국 한 알의 이삭줍기를 통하여 자존심을 다쳐서 불평, 원망하면서 방황만이 남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이 나오미와 룻의 숨겨진 큰 믿음을 보게 되면서, 어떤 복과 영광을 누리게 되는지 알게 합니다. 이런 엄청난 복과 영광은 넉넉함에서가 아니라 이삭을 주워야 되는 심각한 가난과 아픔 속에서만 얻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한 가난이나 아픔이 주는 그 고통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는 듣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이 아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실제의 인물인 자매님을 소개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자 송 명희 자매입니다. 그 자매는 1963년에 태어났지만 의사의 실수로 뇌성마비가 됩니다. 그리고 17세 때까지 최악의 가난과 슬픔과 서글픔의 현실 속에서 방황하다가 17세에 만난 하나님은 그녀를 어떤 인물로 쓰시던가요? 그녀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는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24p.) 송 명희 자매님의 다른 시, 하나 더 소개합니다. 

 

-누구도 모르는 너의 고통을 내가 알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너의 아픔을 나는 아노라, 모든 이가 너를 버려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의 쓰라린 상처를 싸매어 주리라, 너의 많은 눈물을 내가 보았으므로 모든 사람이 몰라주는 너의 마음을 내가 알아주리라(115p.)  최악의 조건에서 최고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송 명희 자매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꼬도 어떤 상태에서 고백합니다. 1922년에 태어난 그녀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폐결핵과 척추카리에스로 13년간 요양원에서 살아야 했고 1982년경에는 직장암과 파킨슨병과 싸우고 있는데 여전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작가 생활을 하다가 1999년도에 77세로 타계합니다. 그런데 그녀를 늘 곁에서 도운 남편은 아내 미우라 아야코에 대하여, 병마와 싸우며 글 쓰면서도 내 아내는 언제나 숲처럼 조용했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녀들의 그 고통이 보석보다 더 귀한 그녀들의 숨겨진 믿음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바로 한 알의 이삭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이삭의 소중함을 알았기에 그런 놀라운 작품들이 쓰여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 덩어리를 소중하게 여겼더라면 그들은 불평과 원망과 미움으로 살다가 처참하게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덩어리가 아니 한 알의 가치를 알았기에 이겨내고 승리한 것입니다. 이제 그 자매들은 제 2의 믿음의 룻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룻도 보세요! 룻이 우리들처럼 ‘창피해서 도무지 나갈 수가 없으니 시어머니께서 한 번 나가서 이삭을 주어 와 주시면 다음부터는 제가 해 보겠습니다.’ 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룻은 룻2:2을 보세요!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어머니,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라고 자신이 먼저 어머니에게 자진(自進)해서 청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로써 그렇지 않아도 미안한테, 이삭까지 나가서 주어오라고 며느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룻이 자진해서 이삭을 주어오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따뜻한 며느리 룻 입니까? 정말 룻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복된 여인입니다. 나 죽어 시어머니를 살리려고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믿음 때문에 한 알의 이삭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포기한 그녀의 자존심은 살기 위한, 너무나 가난하기에 어쩔 수 없어서 내린, 궁여지책에서의 결단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런 지경까지 오면, 궁여지책으로 자존심을 버리겠지만, 룻은 살기 위하여 자존심을 버리고 이삭줍기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룻2:2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은 믿음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바로 보아스를 만납니다. 룻이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보아스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게 된 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없다고 라고 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떤가요? 우리들은 룻처럼 한 알의 이삭을 소중하여 여기면서 모든 가난과 아픔을 이겨내고 계십니까?~ 룻 그녀는 가난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얼굴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떨어진 이삭을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어 담을 수가 있었습니다. 룻2:5-7의 말씀을 보세요!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우리가 룻의 처지라면 어떠했을까요? 애당초 나오미를 따라오지도 않았겠지만, 따라 왔을지라도 얼굴도 다 가리고, 이빨을 갈면서 이삭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달랐습니다. 이삭줍기까지도 믿음으로 시작할 수가 있었기에 부끄럽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삭을 주어서 담았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과 생각을 쉽게 남의 일처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떨어진 이삭을 주워 담을 수 있도록 명하셨는데 무슨 창피냐 그대로 하면 되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말씀을 자신을 부인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있으시니까? 순종을 잘하고 계십니까?~ 룻의 이삭줍기는 당시나 지금도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알의 이삭의 가치를 몰라 그래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동산으로 들여보내주셔도 감사하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지금 우리들도 자존심 때문에, 한 알의 이삭보다는 금덩어리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룻은 모든 세상 사람들과 삶의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특히 요즘 한국의 젊은 여자들을 보면, 다는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비교가 됩니다. 얼마 전만 해도, 시골에서 농사를 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국 여자하고는 결혼을 할 수가 없어서 동남아시아 또는 러시아 여인들과 국제결혼을 하고 있는 실정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좀 배웠다고 하여 거칠고 어렵고 힘든 그런 일들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농사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만 말이 되는 이유는 그들은 한 알의 가치는 안 중에도 없고 오직 금덩어리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정물에 손가락을 담글 생각조차 못합니다. 룻하고 당연히 비교가 됩니다. 룻은 어쩔 수가 없었기에 또는 자존심이 없었기에 이삭줍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래 죄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인간의 자존심을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의 입장이 되면 살아보려고 나가되, 자신의 얼굴을 다 가리고 나서 이삭을 줍지 않겠습니까? 금 덩어리에 눌린 그 자존심은 맨 얼굴에 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룻을 보세요! 당당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룻 때문에 힘이 됩니다. 가난하다고 하여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가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허무맹랑한 설교를 하는 것을 보면 심히 걱정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난과 부, 건강과 병, 높음과 낮음, 젊음과 늙음, 여자와 남자, 큼과 작음, 배움과 배우지 못함 등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요? 너는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송 명희 자매의 ‘너는 내 것이라’는 시(75p)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성경 사43:1의 말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을 송 자매는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너는 부유해도 가난해도 너를 사랑하여 구원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현명해도 미련해도 너의 지혜 되어 사용하리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잘났으나 못났으나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강하여도 약하여도 너의 힘이 되어 일으키리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의로워도 악하여도 너를 나의 피로 바꾸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 차이에 대하여 민감하다면, 그것은 아직도 신앙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세상의 모든 조건은 신앙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빌4:11-13의 말씀입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성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룻을 보세요!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를 따른 것도 세상의 말로 팔자를 펴보려고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복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은혜를 저버린 인과율(因果律)의 신앙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세상의 필요를 얻으려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받았던 그 책망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3:1-9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구원은 아무 조건 없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을 지키므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할 수가 있느냐,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 출세, 건강, 결혼 등 세상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런 신앙은 인과율의 잘못된 신앙입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은 세상 종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것을 얻게 하시려고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차이점이 별것이 아닐 것이라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갈1:7-9의 말씀을 보세요!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구원은 저주입니다. 인과율(因果律)이 아닌, 원인이 없이 구원을 얻은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늘 주장하고 계심을 믿고 있기에, 룻처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룻처럼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이 바른 신앙인지를 큰 폭풍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기에 신앙의 잣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룻의 삶을 깊이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룻2:2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조건에 아무 상관이 없기에 룻처럼 긍정적이기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아무리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을지라도 신앙하고는 상관이 없기에 즉 자기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늘 룻처럼 당당해야 할 것입니다. 바른 성도라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기 때문에 부자라고, 많이 배웠다고 하여도 스스로 부인하고 진실하기에 믿음 안에서 적(敵)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늘 당당합니다. 당당한 이유는 오직 가장 좋은 길로 언제나 인도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족한 삶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의 실력,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성도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결과는 태평과 안일함에서 오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신을 부인할 때에만 맺어지는 열매이기에 성도들의 고난과 역경은 결코 불행이요 저주요 믿음이 없기에 주신 아픔이라고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所致)일 뿐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긍정적,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드리는 성공이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의 성공이기에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의 성공은 성공처럼 보일 뿐입니다. 세상에서는 지금도 그 유명했던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들이 지옥을 갔다면, 뜨거워 죽을 지경인데 무슨 세상의 영광과 권세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누군가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으로 성공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은 룻과 같이 영원합니다. 영원히 빛을 내는 그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2. 룻2:7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성도는 룻처럼 부지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련한 자보다 누구를 더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잠26:12-16입니다.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게으름은 신앙의 절대적인 적(敵)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재물과 권세에 묶여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도 시간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못하겠다고 하는데, 물론 무지요 핑계지만, 그렇다면 허구한 날에 자신과 자신의 가정까지도 돌아보지 못하고,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게으른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은 더더욱 불가능할 수밖에 없을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잠10:26의 말씀을 보세요!

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성도는 충성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4:1-2입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스런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주는 존재인지를 아십니까? 잠25:13입니다.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성도는 이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여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미움을 받고 조고를 받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기에, 소금과 빛과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일꾼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나 죽고 이웃을 살려야 됩니다. 나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런데 아직도 내 것, 내 것하고 있다면, new one, new one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도로서의 자질을 아직도 갖추지 못한 영적 장애자요 자폐아에 불과할 것입니다.  

 

3. 룻2:10의 말씀입니다.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하나님의 구원으로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의심하지 않는 성도는 룻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숨기지 말고 인정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이방인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괄시와 무시를 노골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감추기는커녕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자녀삼아 주시기까지 하셨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밝혀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밝혀버리는 것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자기의 약점을 감추는 것은 오히려 믿음이 없다는 반증이기에 사단의 공격의 빌미를 가져올 뿐입니다. 룻이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기에 은혜를 베푸는 이유에 대하여 당당하게 물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어야지만, 동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그 이유를 묻자, 보아스는 룻이 도움을 받아야 되는 그 이유를 룻2:11로 설명합니다.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그래서 보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입장에서의 동정차원의 보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의 선택에 대하여 보응하는 것이라고 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은 당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룻이 받는 것은 결코 동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룻의 처지에서는 부끄러워서 숨게 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다르지요! 

  

4. 룻2:13입니다.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살아야 하기에 이삭을 줍지 않을 수가 없지만성도는 룻처럼 1)감사함으로 받을 줄을 알아야 세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이삭을 줍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면 열등감에 빠져서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자신을 감출 것입니다. 상대방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베푸는 것도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받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교만입니다. 룻의 처지에서도 감사함으로 받을 줄을 알아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감사함으로 받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이 돕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고 그래서 받는 성도들이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감사함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2)당당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넉넉할 때에 당당함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 중에서도 당당함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가난할 때에 겸손할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있거나 배웠거나 높은 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룻처럼 믿음을 가지면, 심히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부끄럽기는커녕 당당한 모습으로 베풀어 주는 그 상대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이것이 자족이요 겸손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하여 부족하다고 하여 감추고 덮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면, 교만만이 남습니다. 그 교만이 결국 가난도 역경도 참지 못하고, 결국 억눌린 자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당당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나오는 것이기에 당당하게 이삭을 줍게 되지만 교만은 감추거나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3)“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얼마나 분명한 자기표현을 잘 하고 있습니까? 간단한 답변으로 보아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들이 말을 원래 못해서 의사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 이유는 자존심과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이 세상에 눌려 있으면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룻처럼 다 이기게 합니다. 자존심과 두려움과 눌림으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손해 보지 마시고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실 때마다 훈련하셔서, 자기 의사를 상대방에게 룻처럼 또렷하게 밝힐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사표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관계도 깊어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해를 할 때도 많이 생겨서 서로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표현을 못한다고 숨지 마시고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훈련하셔서 관계도 깊어지고 무엇보다도 훈련을 잘 받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정확하게 전하는 역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론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둔 성도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은 당당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인내와 온유하심과 의로우심과 지혜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녹아나도록, 성령을 좇아 행하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성령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룻처럼 나를 버리고 세상의 욕심을 버리는 길입니다. 결코 쉽지 않기에 그래서 흉내만 내는데,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하셨고 도와주셨는지, 믿으시고 참으로 더디갈지라도 끝까지 훈련을 하시면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룻과 같이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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