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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6/2020 - 사사기 1:25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1/26/2020 - 사사기 1:25

PastorYK 2020. 1. 29. 15:41

 

말씀: 삿21:1-25                                               

제목: 자기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5)

 

이미 우리는 어찌하여 베냐민 지파가 궐석이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12지파로 시작하는 이스라엘이란 구약의 나라는 야곱과 4명의 아내를 통하여 12아들을 주셨고 12지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에 이르면서 형제간의 다툼으로 삿20:48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 베냐민 지파의 모든 남녀노소가 진멸을 당하면서 도망한 남자 600명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여자들까지 다 죽였기에 종족 보존은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형제간의 싸움으로 자연스럽게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기에, 남은 11지파의 반응을 보면, 삿21:1-4입니다.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모두들 깨닫고 다 하나님 앞에 나와 대성통곡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이스라엘 11지파의 대성통곡과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에게 다 나와서 드리는 것을 보면, 신앙이 얼마나 좋은 모습으로 보일까요? 나타나는 이런 모습만을 보면, 이것이 신앙이라고 인정할지는 몰라도,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종일 기도하고 대성통곡을 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열린 예배이고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종교적인 형태만 갖추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응답하여 주실까요? 그런데 그것이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악한 제사일 뿐이라고 수천 년 동안에 지적하고 계시는데, 아니 지금도 30년이 아니라 300년이 아니라 자그만치 3000년이나 지난 지금도 해서는 안 되는 당시의 그 식을 그대로 어떻게 따라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황당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종일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봉사와 전도와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께 기뻐하실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다수가 믿고 있는데, 결코 아닙니다. 결코 아닌데 지금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됩니까? 아니 이해가 되세요?~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들고 성경을 늘 듣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 아니란다! 그건 아니야! 그렇게 하면 결코 안 돼!’ 이점을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하지 말라는 짓을 그대로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내 따라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세요?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삿21장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또 함께 점검해 보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방법대로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엡3:21를 보세요!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래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당시 보면, 신앙의 형태는 다 갖추었으나 자기 소견대로 할 뿐,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아닙니다. 오늘 말씀 삿21:10-11, 21을 봅니다.

10. 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려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게 되자, 대성통곡을 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살인과 납치를 통하여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11개 지파는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을 위한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다 죽이고, 단 남자를 모르는 여자 400명만을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를 지켜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모자라는 200명을 채워 주려고 여호와 절기 때문에 가는 실로 여인 200명을 포도원에 숨었다가 납치를 하여 남은 부분을 수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말이 됩니까? 살인과 사람 납치로 해결하라는 율법이 있기는 있었습니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악하고 악한 방법입니까?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보면 누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따를까요? 이런 식으로 600명을 위하여 여자들을 구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방여인을 데려오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왜요? 온 성읍 모든 사람들을 다 죽이고 남자만을 모르는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그런 천인공노할 만행보다는 오히려 이방여인들을 데리고 오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생각해 보세요! 이방여인과 혼인을 금하라는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여 총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죽일 수 있을까요? 물론 자신들이 삿21:5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전쟁에 동참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기에 그래서 죽일 수 있다는 것이 합당할까요?말도 안 되는 또 한 가지는 삿21:18의 말씀입니다.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그런 선언과 선포가 율법 그 이상으로 합당한 조치였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였기에 반듯이 지켜야 했겠지만, 그러나 우린 여기서 꼭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베냐민 지파를 징계하려고 모여야 했던 당시 총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총회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 이유를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먼저 창35:24의 말씀을 봅니다.

24.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야곱의 아내 라헬이 난 두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난 두 아들이 있습니다. 창41:50-52입니다.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그런데 바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요단강 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이 지역에서 살던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바로 므낫세 지파 자손들이었던 것입니다그렇다면, 어떤 관계일까요? 요셉과 베냐민은 엄마 라헬이 난 형제인데, 특히 요셉이 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 애착이 10명의 형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차별을 두고 있었던 것을 창세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의 모함으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가면서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지만, 그때, 제사장의 딸, 아스닷하고 혼인하여 얻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결국 지독하게 사랑하던 동생 베냐민하고의 그 관계가 작은 아버지와 조카가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 요셉을 자신의 아버지 계열로 올리면서 실은 베냐민과 므낫세는 형제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혈육 관계로 보아도 그들은 작은 아버지와 조카가 되었기에 다른 지파하고는 남달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형제관계요 작은 아버지와 조카관계이었던 베냐민과 므낫세, 이 두 지파는 어느 지파보다 대단히 각별한 관계였음을 삼상11:1-15와 삼상31:11-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봅니다. 삼상11:1-15와 삼상31:11-13입니다.

사무엘상 11:1-15

1.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4.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5.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7.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9.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사무엘상 31:11-13

11.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12.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13.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이렇게 두 지파가 늘 각별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므낫세 지파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총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으면 베냐민과의 전쟁에 군사를 보낼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잖아요!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로써는 이스라엘 총회의 그 결정에 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총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다 죽이고 남자를 모르는 처녀들만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됩니까? 그런 율법의 조항이 어디에 있었던가요? 없습니다. 천인공노할 짓을 주저 없이 합니다. 그러면서 이 악한 행위에 대하여 어떤 변명을 합니까? 변명의 근거가 삿21:5입니다. 다시 봅니다.

5.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이때 참여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고 합니다. 맹세만 하면, 죽여도 됩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입니까? ~ 그리고 여자 200명을 납치한 그 변명도 보면 그 근거가 삿21:18입니다.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우리들이 너희의 딸을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에게 준 이 사건은 너희들이 자진에서 베냐민 지파에게 준 것이기에 죄가 없다, 저주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자진에서 자기의 딸을 베냐민지파에게 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던 삿21:18의 결정 때문에 삿21:20-21처럼,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여인들을 억지로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의 남은 남자 200명의 아내로 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어떻게 합당할 수 있을까요? 정말 멋대로 입니다. 사람들이 각각 소견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눈감도 야옹하는 식보다 더 말이 안 됩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명분을 앞세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런 식의 신앙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당시 삿21장의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그 이유를 보면, 역시나 나를 위한 이기적인 멋대로 신앙은 끊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일함을 위한 속셈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완벽한 신앙의 종교형태를 갖추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닙니다. 마7:15-23의 말씀을 봅니다.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처럼 열매로 판단을 받게 되기에,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재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기준은 언제나 말씀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자기 멋대로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원리를 정해 놓고 그래서 삿21장의 당시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결정하였다고 하여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나는 순종하고 있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못하는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다고 하여 멋대로 할 바에는, 오히려 말씀대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는 것이 지혜요 해결방안이 아닐까요?~ 

 

자기부터 회개하고 형제의 죄악을 자기의 죄로 여기면서 나부터 죽이라고 자신을 내려놓았다면, 그것이 진정한 방법이고 길이 될진대, 그러나 그들은 순종의 길보다는 단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쉽게 지나가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 하고,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천인공노할 짓을 한다면, 누가 좋아할까요? ~ 자기가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삿21장의 그런 상황 속에서는 일단은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능사요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도 만나는 기회가 되면서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말씀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들 멋대로 수천 년 내내 자기 옳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동안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아무리 큰 손해를 입을지라도 당할지라도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5리를 가지고 하면 10리를 가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시84:5-7입니다.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심령의 안위와 기쁨) 이 되게 하며 이른 비(단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7.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무슨 뜻입니까시온을 향한 성도의 삶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사막과 같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시온을 향한 삶은 복된 길이지만 눈물 골짜기, 즉 피할 수 없는 사막을 방불케 합니다.

 

그러나 그 눈물 골짜기인 사막과 같은 곳을 지나가는 그 성도들에게만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고 이른 비의 은택을 입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눈물 골짜기입니다눈물 골짜기가 싫다고 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삿 20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멋대로 정하고 행했다가는 해결이 아니라, 상상을 완전하게 초월하는, 대 심판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직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왜 아직도 기회가 남았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시기 전이기에, 우린 더욱 더, 분명하게 알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삿21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쉽게 멋대로 결정한 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지른 악행이 해결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잘못된 방법이라고 하여 시간이 지나면 절로 해결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된 방법으로 해결한 당시의 그 방법이 수습되지 않았기에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잘못된 그대로 남아 삿21장 당시의 죄악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금도 동일한 죄악을 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나지 않았고 하여, 즉 덮이고 말았다고 하여 해결이 된 것이라고 오판을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저지르고 덮은 그 모든 죄들은 다시 또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는 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잡초가 곳곳에서 살아나듯이, 다시 반복하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시온의 대로는 눈물 골짜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지나야지만 됩니다. 왜요? 버릴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아니 감추면서 자기는 아닌 척하기에, 버려야 될 것을 감추고 또는 꽉! 쥐고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삿21장의 말씀은 고리타분한 옛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드렸지만 3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다들 삿21장의 멋대로 신앙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삿21장을 반복하지 않는 길은 자기의 덮여진 그간의 모든 죄악을 찾아내야 하고 그리고 회개해야지만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도일 수 없고 교회의 사명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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