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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09292019 사사기 4장~5장 본문
제목: 싸우는 자와 피하는 자
오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의 일치성에 대한 오해를 충분히 주고도 남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전14:34-35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왜 그럴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딤전2:11-14의 말씀을 보시면,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렇게 분명히 신약 말씀에서는 여자는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명백백하게 기록해 놓으셨는데, 오늘 사사기 4장에서는 연약한 여자들조차도 얼마나 담대한지, 남자보다 강하다는 이에 대한 기록을 주십니다. 게다가 바락이라는 인물은 삿4:6-8을 보면,
“6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7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8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여자 사사인 드보라의 인도와 지도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편없는 인물이 믿음의 장인 히11:32의 말씀을 보면 대단한 인물들과 함께 등장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정말 무엇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은 이해할 수 없는 이점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의 장인 히11장은 물론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히11장의 말씀의 중심은 위대한 영웅들에게 그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즉,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쓰임을 받은 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 아닌 차별까지도 떠나서, 그들의 인간적인 실력과 능력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삿4:15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바락이 얼마나 연약했는지 이미 삿4:6-9에서 확인이 되었습니다. 바락의 실력과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900대의 철병거를 가진 강력한 시스라를 쳐서 패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바락이 행한 것처럼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락 앞에서 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쳐부술 수가 있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으로 인한 결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 싸움의 승리가 은혜요,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던가요?
삿5:8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이스라엘 4만 명은 군사가 아니라 일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가나안 왕 야빈의 종 노릇하던 때에라, 노예로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무기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기도 없고 전쟁훈련도 받은 적이 전혀 없었던 일반 백성 이스라엘이 철 병거 구백 승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심하게 학대하면서 20년간을 다스리던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바락 앞에서 깨끗하게 쳐 부셔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삿4:16을 보세요!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려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
막강한 구백 승을 가진 가나안 족속 시스라 군대장관이,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여자 사사 드보라를 따르던 그런 남자 바락에 의하여 전멸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하면 우리들은 자꾸 영웅을 만들어 내고 바라보게만 되면서 어떻게 되던가요? 영웅을 만들어 내는 자기 자신은 그렇게 바락처럼 또는 드보라나 야엘하고는 다르다면서, 절망을 하고 포기를 하게 됩니다. 나는 그들과 거리가 먼 자로 여기게 되면서 순종할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스스로 침몰케 합니다.
-2-
그래서 영웅으로 몰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바락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시스라를 쳐부순 것은 바락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그런 바락이 어떻게 믿음의 장에 등장할 수 있는 것일까요? 누구들처럼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연약하였지만 바락은 믿음을 가지고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락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을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시스라 철병거 900대를 가진 세력을 쳐부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락처럼 실력이 없어도 참여하면 되는데, 믿음이 없어서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입니다. 참여하지 않으면서, 참여하지 않는 그 사람으로부터 나타나는 느낌이 믿음이 있어 보일 때입니다. 여기에 속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믿음이 전혀 없는데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믿음이 있어 보이는 경우에 다 속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시스라하고는 싸우지 못하고 단지 조용하고 아주 점잖은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경우에, 다 속아서 믿음이 없는 자에게 상담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락처럼 자신이 변변치 못하더라도 가나안 족속인 시스라와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복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기회, 만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어서 싸우지 못하는데 단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강력해 보이는 시스라하고 두려워서 전혀 싸우지 못하는 자가 보이기에 겸손한 척을 하고 양보를 하고 열심을 가진 신앙인으로만 보이면 다수가 정말 저분은 겸손한 신앙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성도라고 착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거의가 그 연약함을 겸손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자로 착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래서 점잖은 척! 하는 또는 성격상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믿음이 없기에 말씀도 모르고 기도의 가치도 모르면서 단지 겸손하게 보이기에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바락같이 강력해 보이는 시스라와 싸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여자 사사 드보라와 적장 시스라의 머리를 깨뜨린 여자 장수 야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3-
남자들보다 난 여자들입니다. 겸손하게 보인다고 신앙이 좋은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남자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은 그런 보이는 그 어떤 인간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서 바락처럼 나가서 강력한 가나안 족속 시스라와 담대하게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장에 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서 자신의 믿음이 힘을 쓰지 못하므로 시스라하고 싸우지 못하고 도망치면서 겸손을 떨고 양보를 하는 척하는 것은 정말 안 됩니다. 성경에서의 자기 부인은 바락처럼, 야엘처럼 악의 세력인 가나안 족속과 싸울 줄을 아는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말씀의 뜻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그 차이점을 모르면, 성경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에 대하여 약간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세상의 헛되고 더러운 것들 때문에 진리와 생명과 의에 방해가 되는 모든 옛 자아, 습관, 전통, 고쳐야 되는 성격, 심지어 가족까지도 신앙의 방해가 된다면, 이에 대하여 부인하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을 따르라는 차원에서 성도 된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라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은 오직 성도에게만 허용된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왜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구원 확신 전의 근본적인 자기, 즉 자기가 갖고 태어난 본질상 더러운 자신과 구원의 확신으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모신 거룩한 자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거나, 주일 예배를 빠지거나, 드릴 헌금을 드리지 않거나, 예전에 하던 술 담배, 장난 섞인 고스톱, 좋아하는 computer게임, 보던 오늘의 운수, 즐기던 연속극까지도 점점 갈등하게 됩니다.
심지어 건강과 재산과 인간적인 가족 사랑과 사업 때문에 신앙의 방해가 된다면 역시나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게 되면, ‘이건 아닌데’ 하면서 마음속에서 늘 싸우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결국 거룩한 고민 속에서 늘 살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성도된 너희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주 안에서 늘 삼가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 끝까지 싸워라! 참고 참아라! 하시지 않던가요?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은 어떻습니까?
-4-
그들은 더러운 세상 마음만을 가진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 때문에 전혀 갈등하지 못합니다. 단지 자기의 양심의 소리만을 듣고도 쉽게 스스로 무시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나안 족속인 세상 사람들은 성공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타락한 썩은 마음만을 가지고 있기에 거룩함에 무지한 자신에 대하여 부인할 실력도 능력도 정말 없습니다. 거룩함에 대하여 전혀 느끼지 못하기에 영적인 문둥병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 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 마음이 늘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복 중의 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라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늘 싸워야 된다, 또는 자신의 신앙이 working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항시 점검하고 있을 때, 자신을 부인(否認)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은 바로 세상 기준이 전부 다인 줄을 알고 살아왔던 그 더러운 타락한 자신의 본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철저하게 제압하라는 뜻입니다. 좁은 길을 끝까지 유지하고 확보해 나아가라는 것이요, 그것이 시스라하고 날마다 싸우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특히 성경의 인물들을 보고, 자신이 성경을 똑바로 이해를 못함으로 인하여, 성경에도 없는 영웅을 만들어 놓고서는 자신과 비교하면서, ‘나는 아니구나! 나는 안 되는구나!’ 스스로 영적인 전쟁을 해 보지도 아니하고, 열등감에 빠져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를 하는 경우, 연약한 바락을 생각하시면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싸움은 바락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피하는 삶은 그 엄청난 능력과 지혜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이기에 큰 죄가 됩니다. 그 꼴을 삿5:15-17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세요!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찜이뇨 르우벤 시냇가에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 길르앗(갓지파)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아셀은 해빈(해변)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5-
르우벤 족속, 길르앗인 갓 족속, 단 족속 그리고 아셀 족속이 이런 저런 이유로 가나안 족속 시스라 하고의 영적인 전쟁을 피합니다. 이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삿5:23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악한 영에 눌린 것입니다.
르우벤 족속, 길르앗인 갓 족속, 단 족속 그리고 아셀 족속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므로 좁은 길로 가면 손해를 볼까 봐 그래서 시스라하고 전쟁을 하지 않았던 그들은 삿5:23에서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세상 세력인 시스라가 무서워서 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성도로서 큰 죄악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와 그리고 자존심과 믿음이 없어서 시스라하고 영적인 전쟁을 피하면서, 전쟁을 하여 승리한 바락과 야엘 때문에,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바락 때문에 상처를 받았어’ 라고 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행하는 그 인물들을 영웅으로 이해하는 그것부터가 사실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영웅이라고 여기는 모든 인물들도 우리와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5:17의 말씀을 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왕상17:14-16, 17-24의 말씀만을 보시더라도
“14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그는 엄청난 선지자였다는 것을 모르는 성도가 없지 않습니까? 왕상18장을 보시면,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인 총 850명과 싸울 때에, 결국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움으로써,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명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었습니다. 그러나 약5:17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러했었고, 바울과 바나바도 행10:23-26, 행14:8-18에서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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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0:23-26, 행14:8-18봅니다. “23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24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 사람들의 능력과 힘에 대하여 박수를 보내고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드보라나 바락 그리고 헤벨의 아내 야엘, 잇사갈, 스불론 족속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간섭하고 계신다. 하나님만을 믿어라! 이를 위한 등장일 뿐입니다. 오늘 여자사사 드보라와 헤벨의 아내 야엘도 같습니다. 여자이기에 남자들을 가르치지 말고 조용하라는 말씀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사기에 나오는 드보라와 야엘은 디모데전서의 차원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연약한 여자일지라도 이스라엘을 악한 세상의 고통과 간섭에서부터 자유(自由)할 수 있도록 쓰임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등장하는 여인들입니다. 드보라, 야엘도 남자 같이 대단히 강력한 여 장군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여자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악한 세상의 그 어떤 세력일지라도 깨끗하게 몰아낼 수가 있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이로구나!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여자 사사 드보라와 헤벨의 아내 야엘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기에 포기다’ 이것이 아닙니다. 나도 세상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런 인물로 쓰임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영웅처럼 보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동일한 자라고 베드로도 스스로 밝히고 있고, 바울 자신을 비롯해서 엘리야도 그렇다고, 야고보서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가 있는데, 먼저 엘리야의 부끄러운 모습을 찾아볼까요?
왕상19장입니다. 1-14절의 말씀을 보세요!
“1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엄청난 일을 감당해 놓고서는 단지 이사벨이라는 아합의 아내의 협박에 꼬리는 팍, 내리고 정신없이 도망을 가는데, 어디까지 도망을 갔는지 아십니까? 왕18:46과 왕19:3에 보시면,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왔다고 합니다. 직선상으로는 거리를 계산하면 약 100마일이지만, 꼬불 길로 계산을 하면 수백 마일이 족히 되고도 남는 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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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세바는 남왕국의 남단 맨 끝에 있는 지역으로써 그곳까지 정신없이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 분이 누구라고요? 그 위대한 엘리야입니다. 그는 이사벨에게 잡혀 죽을까 봐 심히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도 그 당시에는 감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감정이 앞서다가 보니까, 힘 있는 권력자들을 두려워했고 생명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겁을 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위인은 없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웅은 우리들이 세상 기준으로 성경을 볼 때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삿4:6-8의 못난 바락이 결국 전쟁에서 승리를 했었지만,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이는 공로를 얻어내지도 못하고 그것마저도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 빼앗깁니다. 그러나 바락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믿음의 장에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영웅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바락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힌 자들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여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을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물을 사용하시든지 궁극적인 목표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의 구원과 성화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높이기도 하시고, 또는 두들겨 패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고전3:3-9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4),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6),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7),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 상을 받으리라(8),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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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니”라고 하셨으니까 ‘동역자인 우리가 높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말씀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 보세요! 동역자가 아니라 밭과 집 즉, 교회가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집을 짓기 위하여 미장이를 불러야 하고 건축가를 불러옵니다. 일반 성도가 하나님의 목표요 목적입니다. 아름다운 교회, 괜찮은 목사가 있습니까? 아름다운 교회, 괜찮은 목사도 결국은 일반 성도 때문에 존재합니다.
설계사를 위하여 집을 짓지 않습니다. 설계사가 집을 지으면 주인은 자기 자녀들과 같이 삽니다. 일반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요 일반 성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어떤 혹독함과 모진 과정과 훈련을 시키고 있는지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재물, 권세, 심지어 가족까지도 다 포기하면서 결국은 교회 즉 성도들을 섬기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일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아낌없는 수고를 하게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아멘-여러분 한분, 한분은 하나님의 지체로서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존재들입니다. 때문에 성도 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시고 자부심을 갖고 맡은 일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지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3:21-23의 말씀을 보시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무슨 말씀이 더 필요합니까?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기막히게 존귀한 존재인지를 다시 확인하시고 유명한 교회와 목사가 자신의 교회요 담임목사이기에, 그래서 안심하시고 좋아하시는 못난 생각은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라도 성도들의 가정교사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이점을 아시고 바락처럼 싸워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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