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9152019 사사기 2:1-2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9152019 사사기 2:1-23

PastorYK 2019. 9. 16. 13:39

제목: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운지라

 

 

사사기 말씀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보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focus를 둔 말씀입니다. 영웅호걸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회개했다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외면한 데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는지, 그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시려는데 그 초점이 있습니다. 오늘은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운지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때로는 우는 성도를 향하여 은혜를 받았다.라고도 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또는 기도 중에 또는 찬송 중에 운 것을 가지고 간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조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가시를 놔두셨기 때문입니다. 가시를 놔두셨다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세요? 그래서 울었다는 이 말씀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울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울었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먼저 왜 이스라엘이 울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열심을 다 했습니다. 적과 싸우기도 하고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하시는 말씀이 삿2:1-3의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그랬더니 이스라엘이 운 것입니다. 운 사건이 얼마나 심했으면 삿2:4-5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4-5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것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왜 보김이라고 했습니까? 보김이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울었지만, 결국은 불순종하여 망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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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장 내용 전체를 보셨지만, 특히 삿2:11-20의 말씀 중에서 16-17절의 말씀을 잘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이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사사를 세워도 아니 되었고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살 길을 주시면서, 지켜내라,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늘 멋대로 합니다. 하라는 것은 포기하고 하지 말아야 되는, 죽는 길은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에 대하여 하도 배워서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인간의 그 어떤 능력과 힘으로는 구원과 성화의 삶을 조금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 은혜를 잊는 순간에 자기의 기준과 판단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면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봅니다. 왜  교회를 다니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던가요? 은혜를 또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가 다시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만하다, 간악하고 간교하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즉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과 성화의 삶이 가능할 뿐임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자신들의 타락으로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즉 울었다고, 운다고 하여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나의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서의 변화입니다. 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는 것으로 자꾸 자신의 신앙을 대변하려는 악한 경향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또는 열심만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안 됩니다.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변화는 눈물도 아니고 열심도 아닙니다.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무진장 열심히 하면서 삶의 변화가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인내와 절제로 자신의 삶이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좁은 길로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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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풍성하신 자비하심과 긍휼 하심 때문에 주님께서 가신 길을 바울처럼 12제자들처럼 믿음의 조상들처럼 살아내면 됩니다. 버려진 자로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로 어떤 악한 짓을 하게 하던가요? 교회의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서 교인들을, 어린아이들을 설교로 찬양으로 울리기까지 하는데 정말 갈수록 태산입니다. 변화는커녕 운 것이 자랑이 되고 간증이 되고 있기에, 3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도 오늘의 말씀은 주의하라는 주의경보(警報)를 내리고 계십니다

 

그 잘못된 증세가 이스라엘 구약 당시에만 있었다면 물론 오늘의 사사기의 본문 말씀은 의미가 없겠지만, 아시다시피 지금까지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울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기에, 가야 되는 길을 가지 않게 됩니다. 성경에서 주의 경보를 경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과 교회가 속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나, 죄 덩어리의 나를 포기한다는 것, 은혜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인데, 포기가 어렵다고 하여 울려서 오해를 남발하는 것은 더더욱 악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더럽게 하고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세상의 기준은 떠나가라! 아무리 외치고, 부르짖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100년이건, 200년이건, 1000년이라도, 기를 써 보세요! 안 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되지, 부르짖는다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제대로 사모하는 분들은 거의 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까지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보세요!

롬7:22-24입니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죄의 세력은 쉽게 제거되지 않기에 열심과 울고 마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도록 하려는 것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을 그 누구도 속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권면하고 간섭하시고 지도하고 계십니까?

시1:1-2의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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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나님께서 일도 하지 말고 율법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으려면 말씀에 푹 빠져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자신의 것으로 갖기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변화가 불가능할 정도이기에 그냥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는 교회가 맞습니까? 아니면 달달 볶아 대는 그런 교회가 맞습니까?

골1:28-29의 말씀을 봅니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 하노라” 

무슨 뜻입니까? 그 해석이 고전4:9-13에서 확인이 됩니다.

“9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이런 모습으로 우린 거룩한 수고를 다하고 있던가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신앙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교회 자체가 기름을 짜듯이 성도들을 짤 수가 없습니다. 편하자고 큰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이 태반이기에 볶아봐야 다 도망하고 맙니다. 

 

때문에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작으면 언제나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대형교회보다는 작은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는 더 낫다는 말씀이지, 무조건 작은 교회들이 무조건 다 맞다는 식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큰 교회, 작은 교회를 늘 따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모든 조건 중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되는 조건이 있다면,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계산을 할 줄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분별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시면 성경적인 분별이 얼마나 중요한지 동의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눅14:25-35의 말씀도 보세요! “25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분간다운 분간, 구별다운 구별을 못하면 버림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큰 교회는 하도 크기에 관심이나 이해 차원에서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대충 할지라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작은 교회는 대충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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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바로 띄기 때문에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쪽이 좋습니까? 각자의 신앙과 성격에 따라 그 선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 일처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던가요? 받지 못합니다. 보이는 세상에서도 대충 하면 문제가 되어 사고가 생깁니다. 단지 computer만을 보더라도 알지 않습니까? 바로 지시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오직 순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그 결과를 피하지 못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아픔과 고통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법이지요! 왜요? 가시를 곁에 놔두셨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하세요? 아멘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점과 흠이 없는 거룩한 자로서의 삶이  하나님의 목표요 뜻인데, 성도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어떠해야 될까요?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교회나 가정이나 학교에서 문제가 됩니까? 순종하지 못하여서 분간 못하게 되는 자들이, 방향을 찾지 못하여 결국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거의가 그 진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기에, 분간을 못하는 미련한 자들이 가면 안 되는 사망, 죽음, 저주의 길을 무턱대고 따라갑니다. 기막힙니다. 슬프지요! 답답하지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해도 그들이 돌이키지 못하는 그 이유는 결국 쉬운 길을 선택하자는 것인데, 좁은 길, 힘든 길을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인데, 어찌할 바가 없습니다. 보이는 넓은 세상의 길, 편하고 쉬운 세상의 길이 좋다는 것인데, 당장 편해서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죽을 때, 뭐라고 할까요? 당장은 표시가 나지 않기에 안심하고들 있지만, 아닙니다. 다수가, 남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여 방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학생 때에 공부를 뒤로 하고 열심히 놀던 아이들을 보세요! 처음에는 놀아서 좋았지요!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망신살이 뻗치더라로 아프게 끝을 맺기에, 그다음부터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아니라 간혹 있습니다. 여전히 다시 망신살이 뻗치는 길로 다수가 가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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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자보다 실패하는 자가 여전히 더 많은 법입니다. 보이는 세상에서도 그럴진대, 누가 좁은 길로 본성적으로 가려고 할까요? 절대로 불가능하기에 좁은 길은 오직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힘과 능력으로 안 됩니다. 기서 ‘은혜만’이 가능하다는 그 뜻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뜻인데, 하나님만 바라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무엇과 같다고요? 붓으로 바위 표면에 글을 새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웃으면서 쉬면서 놀면서 할 수 있는 영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대충으로 되는 싸움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하고 짚어야 되는 문제는 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기지 마세요! 내가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됩니다. 다른 길이 없다고 성경은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앙과 자존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버려야 될 자존심 때문에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믿음의 성장이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변화는 말씀을 근거한 혹독한 훈련과 말씀으로 인한 끝없는 간섭과 그리고 말씀을 따르기 위한 결단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단지 주여! 소리를 지르거나, 새벽기도를 한다거나, 눈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사1:12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러시면서 하시는 그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13-14절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근본적인 변화 없이 모양만을 가진 죽은 신앙에 대하여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더군다나 말씀하고 거리가 먼 수준의 사람이, 즉,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자들이 자기 기준과 감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따지는 행위는 더더욱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할 만큼 했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니다, 더 하라” 하시면 이유 없이 더 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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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겠다”라고 우기고 울어보셔야 자신만이 손해를 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을 보면, 조금 전에 이사야 말씀에서도 보셨지만, 자기들 생각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고, 정당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기에, 이 백성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우시려고 결국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었는데, 곁에 놔두신 가시를 사용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맞으면서도 전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비극입니까? 그것이 사시기의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기에 우리들은 기드온, 드보라, 삼손을 영웅시합니다. 그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등장하는 사사에 대하여서는 다음 시간부터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본문으로 다시 갑니다. 신앙의 가치를 눈물과 단지 열심만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잘못된 의지가 꺾여야지만 됩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 삿2:3입니다.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렇게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너희들의 올무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자, 결국 삿2:4에서 그들이 울어버립니다

 

그러나 버려야 되는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는 것이 울어버리고 마는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복입니다.

그것이 삿2:20-23입니다. “20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핑계 대고 대충하고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마다 남겨둔 가나안 족속 그들이 이스라엘의 책망의 도구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프게 했습니다. 즉 징벌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남겨둔 그들을 통하여 타락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시고 단련하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십니다. 욥이 그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요?

욥23:10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히12:5-13입니다.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남겨둔 가시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래서 서로 간에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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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기쁘시게 섬기지 아니하면 불의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남겨두었다고요? 나를 괴롭게 하는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여차하면 죄로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자녀들을 아프게 하여 다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두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게 하셨습니까?

호5:11-6:3까지입니다.  “*11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12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3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찌라 내가 탈취하여 갈찌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기에 가시와 올무가 허락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렸지만, 바른 신앙인이 되시려면 영적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롬12:1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자기감정에 빠지고 맙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좁은 길을 갈 때 갈 길이 보이는 것이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누구를 아니 자신까지도 인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없기에 끝까지 순종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들어보면, 누가 옳다 그르다 따지는 것이 은혜가 되지 않을 수 있기에 그래서 가능한 많이 듣기 좋게 설교를 하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다들 알아서 잘 배워가고 있던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듣기 싫을 수밖에 없는 설교, 거슬려야 하는 설교를 하지 않은 것은 은혜가 아니라 결국 자기 속셈을 차리자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보고 있듯이 이렇게 수많은 교회들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신앙은 태연스러운 그런 차원에서의 무관심도 아니요 감정의 고백도 아닙니다. 삶의 변화입니다. 좁은 길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렸으면, 아멘으로 화답을 하셨다면, 그 다음은 변화일 뿐입니다. 눈물로, 아멘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선택한 좁은 길 때문에 당하고 아프고 괴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만, 가나안 족속은 점점 뽑히면서 그 속에서 변화의 복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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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가 기쁠 때에 떡 하나쯤 떼어서 드릴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기분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볍게 대접할 수 있고 귀하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있는 것은 내가 주인(主人)이요 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악인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시10:1-10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란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희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3절입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시36:1입니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하니”

우리는 존엄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대접하는 심각한 패역을 범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향하여 저주를 선언하시고 화를 선언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 앞에서도 꼼짝을 못 하는 것은 세상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 부자와 권력자 앞에서도 함부로 말 한마디도 못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 하고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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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죽어 있거나, 갓난아이의 신앙에 불과하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합니다. 특히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들의 마음 상태까지도 일일이 점검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는 것이지만, 계20:11-15의 말씀을 보세요!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그리고 마12:36의 말씀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0:28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당장 모른다고 하여 큰소리를 치지 마시고 당장 확인 되지 않다고 하여 마음대로 살지 마시고, 비록 힘이 심하게 들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므로 곁에 놔둔 가나안 족속들의 세력이 무력하게 되는 그래서 약속하신 모든 복과 무한한 영광의 삶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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