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9082019 사사기 1:1-36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9082019 사사기 1:1-36

PastorYK 2019. 9. 10. 02:07

  제목: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지 못한 이스라엘

 

 

여러 모양의 남녀 사사들이 사사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사란 재판관이란 뜻입니다. 특히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통치자, 지도자로서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를 보면, 여호수아가 죽고 왕정시대, 즉 왕이 세워질 때까지 등장하고 있는데, 사사의 특징을 보면 각 지파별로 보내진 비 세습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모릅니다. 각 지파간의 다툼은 물론, 약탈과 동성애자와 겁탈과 심지어 시체 토막 사건들이 삿19장에 등장하는 사사기의 말씀은 너무나 더럽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으로 말씀을 드리면 (1) 사사기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위인, 영웅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인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여진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을 잘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보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focus를 둔 말씀입니다. (3) 사사기의 모든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회개했다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4) 사사기는 하나님을 외면한 데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고, 그 간섭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데 그 초점이 있습니다.

특히 삿1장의 말씀을 보셨겠지만, 우상숭배하는 가나안 7 족속들을 이스라엘 각 지파가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삿1:19, 21, 27-33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을 풀지 못하면 그 이후에 나오는 사사기 모든 사건들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시는지, 그 중심을 놓치고 맙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삿1장의 다 내쫓지 못했다는 말씀에 대한 이해를 하시려면, 수24:14-28의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6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17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23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25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26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27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8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무슨 내용의 말씀입니까?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으라고 간절하게 당부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당당하게 그것도 시원스럽게 정녕 만군의 하나님만을 기꺼이 믿을 것이라고 대답을 하면서 큰 돌까지도 세웠던 것입니다. 그 돌을 통하여 스스로에게 그 증인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신앙이란 너희들이 대답하는 식으로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이라고 대답했다고요? 

 

‘아니요 결단코 합니다, 죽어도 너희는 못한다! 아니요 정녕 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너희는 못한다!’ 이것이 바로 수24장의 여호수아가 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결국 삿 1:1 이하의 말씀처럼 여호수아가 죽고 나자 그 결과는 여호수아가 걱정한 그대로 증명이 되고 맙니다. 무엇이 증명이 되었다고요?

삿1:19, 21, 27-33의 말씀입니다. “19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1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27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31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이미 가나안 땅을 다 분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거민들을 다 내쫓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바로 해석해야지만 사시기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7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다고요? 이스라엘의 말로는 그들의 저항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접근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놔두었다는 것이 그들의 변명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 변명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해를 위하여 신구약을 섞어서 설명을 드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우리가 들어가 있게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 그 시점은 구약의 출애굽 식으로 말씀을 드리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삶과 동일하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신약의 우리나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몸 안에 이미 악한 세력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듯이, 죄의 덩어리가 우리의 실체이듯이, 마찬가지로 그 상태를 오늘 말씀에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의 7족속들이 든든하게 진을 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2-

 

 

그 악한 세력들이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가나안 땅에 즉, 내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신(神)과 싸움은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필연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이 우리들에게 늘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도 그 악한 세상 세력과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일지라도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타협할 수 없는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세력을 상징하는 ‘가나안 7족속을 완전하게 다 몰아내라’가 하나님의 뜻이요, 절대 요구입니다. 물론 그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싸움에서도 손 한 번 대지 않고서도 승리를 주셨던 것이 그 증명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입국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거민을 쫓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땅 7족속을 보니, 원체 크고 강대해서 그들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기에 못 들어가겠다는 했던 이것이 가나안 땅을 눈에 두고서 그들이 보여준 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40년 광야 생활로 신앙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놓고서도 또다시 하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합니다. 강력해 보이는 가나안 7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삿2:1-2에서 알게 합니다.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이스라엘의 그 이유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지적한 이 부분을 잘 보시면, ‘너희가 왜 이 민족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않은 것은, 능력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힘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쫓아내기 싫어서’ 라고 하나님께서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삿2:1-2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100% 도와주심으로 살아왔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힘과 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맞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에도 이스라엘이 칼과 창으로 싸워서 나왔습니까? 

-3-

 

 

아닙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왔습니다. 홍해는 어떻게 건널 수가 있었습니까? 배와 수영으로 건너지 않습니다. 홍해를 갈라 주신 후에, 곧 마른 땅이 되어 다들 바다 바닥을 밟고 한 영혼도 빠짐없이 수백만 명이 완전하게 건너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 40년간에도 씨 뿌린 적도 없었는데 양식을 먹었고, 걸었지만 발이 부르튼 적도 없었고, 물이 모자란 적도 없었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시원하게,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40년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도 역시 가르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힘이 없다고요? 초월적인 힘과 능력이 차고 넘쳤습니다. 모든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7족속이 너무나 강해서 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구약에서도 실은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약의 성도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변명을 하고 있다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구약과 신약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 성도라는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세상이 강하고 무섭고 그래서 순종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박살 그 자체지요! 그런데 성도라는 자들이 보이는 세상의 세력이 강하여서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전혀 아파하는 그런 마음이 없이, 늘 대충 슬쩍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기고 있습니다. “뭐! 그럴 수 있지” 하는 식입니다. 전혀 신앙의 성장과 진전이 없습니다. 아파하기는커녕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사기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늘 거기서 거기였듯이 말입니다.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이었기에 삿17:6, 21:25에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삿2:2의 말씀을 잘 보세요!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고 내가 하지 않았느냐”

입니다. 즉 이 땅 거민을 진멸하라는 문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영적인 문제이지 세상의 보이는 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문제이지 철병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4-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에 건강과 재정의 문제가 생기면, 건강과 돈이 문제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믿음이 문제인가요? 다 자신의 신앙이 문제이지, 건강과 돈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몰라요! 전혀 모르니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반복, 반복, 또 반복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지적해 주십니까? “너희가 이 땅 거민을 쫓아내지 아니한 것은 그들과 언약을 세우기 좋아했고 그들의 단을 헐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냐” 

 

 더러운 자기의 죄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긴 대로, 자기 뜻대로가 우선이지, 하나님의 뜻은 자기하고 상관이 없으니까,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전혀 상관하지 말라,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삿2:2의 말씀에서 무섭게 지적하고 있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교만한 이스라엘은 이렇게 큰 돌을 세웠기에 더 이상 믿음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인데, 지금 여러분들의 그 수준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잘못해 놓고서는 늘 그때로 끝냅니다. 왜 늘 그때뿐이어야 하는지, 알기는 압니까? 전혀 모르기에 계속 반복적으로, 결코 하지 말아야 되는 악한 짓을 하게 됩니다. 반복하다가 보니까, 이젠 그 뻔뻔함이 극에 달하면서 극한 바리새인, 위선자 중의 위선자가 되어 버립니다. 두려움이 없는 위선자, 일본 수상, 아베를 보는 것과 같고, 타락한 목사들을 보는 것 같고, 위선의 위선인 한국의 자유 한국 당원들의 추태를 보는 것과 같아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돈과 능력과 출세, 명품, 외모 즉 혈과 육이 아닙니다. 악의 세력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세상 세력들이 너무나 강해서 싸울 수가 없었다는 혈과 육의 문제를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께 순종이 아니라 세상의 돈과 명품과 자랑과 힘이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저지른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웃을 위하여 희생과 양보를 당연히 할 수 없는 이유는 헛된 돈과 세상 즐거움과 명품인 세상 자랑이 손해 보아야 되는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좁은 길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5-

 

 

결국 모세를 죽이려고 했고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바른 설교자들을 죽이고 있고 죽어준 예수님을 죽이지 못하여 안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내내 세상 애굽에서 멋대로 살다가 구원을 받았으니, 그런 추잡하고 추악한 곳에서 살다가 구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더러운 헛된 모든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그 삶이 더럽기에 그래서 버리라고 해도, 포기를 못하고, 세상 방법으로 살던 것들이 참! 좋아, 여전히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금, 교인들이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푹 빠져서 살다가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여전히 그 썩을 세상이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탐스럽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즉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1:4-11의 말씀과 어쩌면 그렇게도 같습니까?

요1:4-11을 보세요!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세상은 역시나 구약과 동일하게 진리, 빛을 배척합니다. 삿 1장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삿2:1-2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사사기가 불순종으로 인한 고난 그리고 회개하므로써 오는 구원, 이런 정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악하고 타락한 근성에 대하여 과소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악한 인간에 대한 칭찬은 절대 금물 중의 금물이라는 것을 특히 더욱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드보라, 삼손, 기드온, 입다 등 사사들을 영웅시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을 무조건 싫어하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사기요,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타락한 본능이요, 그냥 놔두어도 더럽고 미련한 것이 막 튀어나와서 깊은 상처를 주는 우리들은 한 여름의 초강력의 폭우요 완전 휩쓸어 버리는 토네이도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은 너희들도 완전 똑같다 것을 대변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끝까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보면서, 참으로 미련하고 뻔뻔스럽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 이상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6-

 

 

그래서 큰 착각을 하면서 남을 모함하고 모욕하고 탓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자기의 한심스러운 그 꼴을 심히 아파하는 성도 된, 자신들은 자기 말 즉 막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왜 이스라엘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왜 돌아오지 않느냐! 라고 쉽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야 하는데, 아니잖아요! 여전히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들 상황 판단이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살려주려고 해도 몰라요,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주객이 전도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죄 덩어리인 자기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으면서, 전혀 아파하지 못하는 그 믿음이 없는 교인들을 보세요! 거룩한 고민을 못합니다. 쓸데없는 고민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들이 주님이 가신 좁은 길,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이던가요? 결코 좁은 길, 손해 보는 길은 죽어도 외면합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당당하게 어렵지 않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괜찮은 사람들이었다면 성경을 기록하여 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치욕적인 말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너무나 똑같은 이기적이고 욕심이 넘치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도 모르고 오직 자기 배만 가득 채우려는 그런 미련한 자들이 우리들이기에, 그런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상담은 설교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오늘 사사기가 지적하는 것은 너무 쉽게 종교적인 용어와 종교적인 형태만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친 이스라엘을 보라! 결국 여호수아가 죽자 가나안 7족속인 죄를 제거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사사기의 말씀이라면 좀 더 시간상으로 길게 보면, 우상 숭배로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았느냐가 구약입니다. 신앙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이 결국 사사기의 말씀입니다. 

-7-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보면, 답답하지만, 답답해 할 것이 없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그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은혜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지금 우리는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말씀을 들으면 속으로 “맞아! 앞으로 그러면 안 돼!” 아파하면서 찔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찔리면 그리고 바로 고백하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이것이 복이요 그것이 기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과 힘으로 된 것이기에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멋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 사사기가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잘난 척에서 벗어나야 하고, 우월감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인을 삿2:3의 말씀에서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가시가 있어 아파하면, 즉 죄로 아파하면 그것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감춰진 죄가 지적을 받을 때에, 아프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지적을 받아도 아파하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적을 받으면 분노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되면, 말씀으로 자기가 저지른 감춰진 죄가 지적을 받을 때, 가시가 되어 자기를 찌르기에 너무나, 아프고 자존심이 팍! 상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알기에 참고 감사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멘,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꼴이 드러나면, 감추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감사드리게 됩니다. 그것이 상급이고 복(福)입니다. 

시32편입니다. “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6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8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10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지은 죄를 이런 저런 사건과 주변 사람과 설교를 통하여 인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인식이 되면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적받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함을 반복적으로 인식하면서,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자신과 수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 정도의 수준이 될 때에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 부모의 역할과 자식의 도리를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몰아내지 못한 죄가 가시가 되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오직 중생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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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눈물과 은사로 만족하지 마시고, 단지 자신의 가시로도 그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성도된 신분에 대하여 확신이 들지 않을 때에, 무섭게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빛의 말씀과 또는 이런저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그래서 속상할 때, 오히려 ‘아하! 내가 성도구나’로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삿1장에서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강한 철병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했기에 그래서 쫓아버리기 싫었다는 그들의 더러운 속마음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사기를 읽어 보면서, 드보라나 기브온이나 삼손과 같은 사사들을 영웅으로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을 보여주시려는 말씀이 사사기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의 것에 깊이 쪄 들어서 죄와 익숙해져 있는지, 그래서 세상의 악한 것조차 버리지 못하고 있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그런 자신을 어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주 깊이 깨닫게 하는데 사사기의 말씀의 요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꼭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쳐부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강하고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세상의 것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고통스런 패망과 재앙이 올뿐입니다.

이제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품과 외모가 아니라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거기에 하늘의 신령한 복이 임할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야 되는 성도의 가치, 십자가의 그 신앙의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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