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9222019 사사기 3:1-31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9222019 사사기 3:1-31

PastorYK 2019. 9. 24. 02:19

제목: 가나안 족속들과 사사들의 역할

 

오늘 사사기 3장에는 두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로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에 대한 시험을 하시려고 남겨 두신 가나안 7 족속에 대한 말씀과 그리고 둘째로는 사사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사사는 일차적으로 백성들의 분쟁을 해결해 주는 사법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과 보호하는 군사적, 행정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왕 같은 실제적 책임자라고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특히 사사들은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의 역할을 합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사입니다. 그래서 사사들이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등장을 하는 경우를 쉽게 봅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사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알게 하는데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중에 이 점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먼저 가나안 7족속의 정체와 그 세력들을 남겨두신 이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오늘 등장하는 사사인 웃니엘과 에훗과 삼갈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가나안 7족속의 정체는 무엇인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도구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린 아이를 물이 가득 찬 수영장에 빠뜨려서 물을 먹여 마치 죽을 것 같은 상황으로, 그 당시는 수영을 못하니까 아이가 살아보려고 끝까지 발버둥 치게 되는데, 그러나 그 쓴 경험이, 나중에 자신이 그럴 수 있기에 이를 사전에 막으려면 수영을 배워야 되겠구나’를 스스로 느껴서, 수영을 하게 되듯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중에 전쟁을 제대로 잘할 수 있게 하시려고 그래서 남겨 둔 가나안 족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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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수영을 잘하기 위하여 물이 필요했듯이 그와 같은 원리입니다. 수영을 못하던 아이가 그 물 때문에 수영을 배우듯이, 전쟁을 모르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통하여 전쟁을 배워 싸울 줄 아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숙한 십자가 군사가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전쟁을 위하여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것일까요? 나를 죽이는 죄하고의 전쟁입니다. 혈과 육의 전쟁이 아니라 영의 전쟁입니다. 

 

이 영적인 전쟁을 전혀 모르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죄인 가나안 족속과 싸워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 족속 하고 타협하고 우상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남겨 두었던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식민지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속에서 깨닫고 ‘아하!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지’ 하면서 하나님의 편을 들게 되면서 어떤 기적이 나타나던가요?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자신들이, 그 반대로 가나안 족속을 지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이김과 승리는 가나안 족속하고 타협하고 연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니까 이기게 되더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어떻게 해야 되는 줄을 아는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원리를 얻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할 줄을 모르는 성도가 아니라 전쟁을 할 줄 아는 십자가의 군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가요? 싸우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 

 

평화와 평안을 원합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WCC의 원리요 주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평화, 평안, 승리 그리고 사랑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내가 남겨둔 가나안 7 족속을 믿음을 가지고 인정사정없이 몰아내 버릴 때, 그래서 가나안 족속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맛보게 되는 잠시적인 승리에서의 평안과 사랑이지, 죄와의 전쟁 없이,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평화와 사랑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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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되시지요? 성도된 너희들은 죽을 때까지 가나안 족속과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단 한 번 싸워서 이기면, 그것으로 영원한 이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을찌라도 그래서 한 번에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을지라도, 원하는 그 평안과 승리와 사랑의 삶은 유지되지 않는다! 너희들은 죽을 때까지 가나안 족속과 싸워서 이길 때에만 오는 승리와 평화와 사랑이지, 그 끝없는 영적인 싸움이 없이는 너희들은 안전과 평화를 결코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 하는 광명한 천사의 모양을 하고 있는, 악의 세력 WCC는 어떻게 속이던가요? 왜 싸우니, 서로 사랑하지, 하나님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싸워 이기라고 하니? 그것이 말이 되니? 하면서 성경 말씀을 모르는 무지한 교인들을 그럴듯한 그들의 더럽고 악한 전략을 가지고 속이면서 막강한 세력을 곳곳에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기억하세요! 우린 죽을 때까지 가나안 족속과 싸워서 승리와 평안과 사랑을 확보해 가야 합니다

 

단 번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사사기 내내 또는 구약 말씀 내내 보셔서 아시겠지만, 가나안 7족속이 지속적으로 죽임을 당하면서도 불사신처럼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나안 7족속은 보이는 세상 세력뿐만 아니라, 타락한 자아를 상징하는 악한 세력이기에 내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은 세력이기에 성도일지라도 죽을 때까지 전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오직 끝까지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면 바로 어떤 증세가 나타나는가 하면, 오늘 삿3:8, 14의 말씀처럼 가나안 족속의 노예, 종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1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 팔년을 섬기니라"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가나안 족속인 세상이 하나님을 택할 때보다 잠시 행복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감사하여 세상인 가나안 족속을 택한 것이 참 잘한 선택으로 인생이 마감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아닙니다. 결국 어떤 처지가 된다고요?

삿3:7-9, 12-15의 말씀을 보세요!

"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2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 팔년을 섬기니라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

더럽고 악하기가 끝이 없는 가나안 족속인 세상의 핍박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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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3:9-10, 15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변화가 왔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삿3:10-11에서는 “이기니, 그 땅이 태평한지” 라고 하시고 30절에서는 “그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아멘일 것입니다. 아멘이라고 답변을 하셨는데, 그럼, 어느 성도만이 이 말씀을 믿을까요?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이 말씀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을 해 보고서도 다시 나타나는 증세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믿어서는 안 되는 자신과 헛된 세상의 재물과 즐거움에 믿음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역시나 포기합니다. 망하는 길을 택합니다. 가나안 족속과 연합을 이룹니다. 이 어리석은 반복을 죽을 때까지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또는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고 나면, 나는 결코 동일한 이스라엘과 같은 전철을 전혀 밟을 것 같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까?

 

바보 짓거리를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할 수 있다던 자신의 강력한 결심하고는 전혀 다르게 자연스럽게 이미 세상인 가나안 족속의 세력으로 다시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런 한심스러운 자신을 항시 경험하다가 오늘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것입니다. 그 미련한 반복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자기(自己)라는 옛 자아는 가나안 족속인 세상 세력과 연합을 잘합니다. 아니, 한 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구원 받기 전의 사람의 실체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고 있습니까? 

엡4:18-1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래서 구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렘17:9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것이 바로 나의 실체요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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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요? 그만 웃기세요! 착각도 그런 착각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런데 문제점은 당신 자신은 더럽고 더럽기가 한이 없다고 아무리 몸부림을 치면서 그렇게 말을 해줘도, 그 사실을 전혀 믿지 않고 여전히 멋대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망합니다. 죽습니다. 버려집니다. 사사기에서 확인이 되고 결국 사사들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즉 영원한 사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풀어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무슨 싸움을 해야 한다고요? 

 

성도는 남겨둔 가나안 족속과 죽을 때까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자아와 믿음의 자아 간의 전쟁은 끊이지 않게 된 운명입니다.

그래서 롬8:5-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이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일지라도 선하고 악한 두 성향을 가진 자들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성도들에게 더럽고 악한 세상의 자아의 영이 완전하게 없어졌다고는 말씀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함께 내 몸 안에 두 세력이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죄인이라고까지 합니다.

롬7:21-24의 말씀을 보세요!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고백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은 오직 더러운 악한 세상의 영만을 가지고 있기에, 이 더러운 세상을 피하거나, 싸울 어떤 힘과 방법과 원리를 전혀 모릅니다. 지지고 볶고 볶이면서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운과 운명을 따지고 삽니다. 스스로 운과 힘이 있으면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심히 착각합니다. 자신들의 방법과 원리로 가능하다고 늘 오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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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영 즉 성령 하나님을 모신 자가 되었기에 세상의 악한 영과 싸울 수 있는 복된 자가 되었고, 구원 전과 동일한 환경 안에서 가나안 족속과 싸워 믿음으로 이길 때, 예전에 느낄 수 없던 기쁨과 감사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좁은 길을 가게 됩니다. 손해 보는 삶을 갑니다. 열악한 삶에서도 감사하게 되고 자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사사이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기다 보니까,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살전5:16-18의 말씀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롬7:25의 말씀도 보세요!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자신 안에, 성도 안에 두 영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에 악한 영, 세상의 것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타락한 자신과 싸울 수가 있는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이 완전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여기서 대단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성도들은 물론 자신의 뜻대로, 판단대로 세상의 악한 영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만약에 더럽고 악한 세상의 쪽을 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가만 두지 않는다는 기막힌 사실입니다.

그것이 삿3:8, 14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남겨둔 가나안 족속을 통하여 공격을 받지만, 그 공격을 받으면서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고 부르짖게 되면서 전쟁을 할 줄 아는 십자가의 군사가 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인 점과 흠이 없는 거룩한 존재로 자라게 하십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하심입니다.

히12:1-14입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징계하시는 이유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이스라엘이 미워서가 아니라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고 결국은 화평과 거룩함을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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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는 사사를 보내주셔서 어떻게 해야 가나안 족속을 이길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시기에, 여기서 오해하여 ‘사사는 영웅이다’로 가면 안 됩니다. 사사를 통하여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를 가르치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사사처럼 순종하여 승리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영원하신 사사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면서 ‘자기 부인을 하라! 그리고 다 맡겨버리라’고 하시면서,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절로 얻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할 때만 오는 승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영원한 승리를 얻었고 그 복된 길을 열어 주셨기에, 예수님보다,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먼저 감사 찬송을 드려야 맞는 것입니다. 점과 흠이 없는 존재로 준비가 되려면 인간 스스로는 선한 일, 즉 구원을 이룰 수가 없기에 영적인 전쟁을 할 줄을 아는 구원자 사사들이 등장하는 것이요, 종국에는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점과 흠이 없는 영광스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롬8장인데 롬8장의 내용은 성화가 아닙니다.구원은 취소될 수 없다는 구원의 성격에 대한 말씀입니다.

롬8:10-14입니다.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를 너무나 좋아하는 타락한 자신의 타락한 영을 누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도록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을 통하여 성도의 인생을 초토화시켜 버리도록 하십니다. 가나안 세력과 영적 전쟁을 하여 이김이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평안과 안전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늘 싸워야 하기에 그래서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수천 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결국 사사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국 택함을 받은 자녀들은 절대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내고야 말지만, 그러나 구원을 받은 자답게 가나안 족속과 싸우지 못하고 피하거나 머뭇거리면 그 시련은 혹독하다는 것을 우린 아브라함의 사촌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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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전5:1-5의 말씀을 보세요!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음행을 저지른 자에게 교회에서는 혹독한 고난을 지나게 하시겠다는 뜻에서의 징계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 싸우지 않으므로 혹독한 고난을 지나야 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사사 때에는 혹독한 고난을 당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사사기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사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릴 두 번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사를 세우셨는지 사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바른 신앙관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삿3장에서도 보면 삼갈 사사는 간단하게 이름과 업적만 나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말씀은 삿3장에 등장하는 웃니엘과 에훗과 삼갈을 보세요! 그들이 구산 리사다임과 모압 에글론과 블레셋 사람 600명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로부터 해방을 시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방을 시켰는가? 하나님 편에 서자 승리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 너희가 그 복된 선택을 하지 못하면 어떤 부끄럽고 한심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는가? 이것을 고발하는 것이 사사기의 중요한 내용들 중의 한 가지입니다. 부연을 드리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용사인 사사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었는가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편을 들지 않아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세상의 세력인 가나안 족속에 속아, 얼마나 비참하게 당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사기에서 알아야 되는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에훗은 정말 대단한 인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려고 에훗의 사건을 길게 말씀하실까요? 다른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에훗 역시 하나님 편으로 서자 태평이 임했다는 공통적인 교훈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에훗을 통하여 주시려는 말씀은 사사로 부름 받은 에훗이 하나님 편으로 서서 에글론의 왕을 죽이고 도망한 후에 에브라함 산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보아서 모압의 뛰어난 용사 10,000명가량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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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보면 에훗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훗이 얼마나 강했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마음 먹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에훗을 통하여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인데, 생각해 보자고요! 이스라엘이 노예로만 있었고 사실 전쟁다운 전투를 위하여 훈련을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서 늘 승리를 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전쟁 경험과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뛰어나 힘이 너무나 센 용사들인 모압의 군대 10,000명가량을 다 죽일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도 한 명도 피할 수가 없었다고까지 삿 3:29에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29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무슨 뜻일까요? “너희가 하나님의 편에 선다면, 10,000명 또는 100,000명이겠느냐, 1,000,000명이겠느냐, 아니면 천만 명, 또는 일억 명이 두려울 수가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무엇이 겁이 나겠느냐! 를 말씀하시려고 에훗을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개인과 가정과 나라의 태평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 영웅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에훗의 사건에 대한 말씀을 길게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삿 3:30에서 80년간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다는 말씀도 에훗 때에 하나님이 모압의 용맹스러운 군사 10,000명을 죽인 사건을 기억하는 동안에 태평했다는 것입니다. 이 에훗의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할 수 있는 고백과 결심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되겠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지 않아서 이 꼴을 당했었구나’를 에훗 사건 때문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에훗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나라가 못 쳐들어왔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쪽으로 자꾸 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영웅 아닌 영웅을 만들고 있고, 그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 줄을 아십니까? 나는 영웅이니까!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리와 역할을 믿음으로 끝까지 감당해야 되는데, 나실 인이었던 삼손을 보세요! 엉망이었습니다. 단지 받은 힘만을 의지했습니다. 나실 인으로써, 믿음의 거룩한 싸움은 해 보지도 않고, 막 살다가 버려집니다.

-9-

 

 

그래서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들의 삶의 주체는 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사사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태평한 것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외부의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웃니엘, 에훗, 삼갈, 기드온, 드보라, 삼손으로 말미암아 펼쳐진 그 메시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되겠다, 눈으로 보고 확인이 되었기에 이제는 하나님 편만을 들게 되면서 이스라엘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게 되었더라’ 이것이 사사기의 사사들이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기억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편을 들어서 태평하였더라면,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를 하게 되면, 다시 이스라엘은 징계와 채찍을 피하지 못하고 맞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그러니까 삿3:31의 말씀도 보세요! 말이 되지 않지요?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600명을 죽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말씀도 결국은 사사 삼갈이 하나님의 편을 들었기에 이런 구원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사사인 삼갈의 힘이 넘쳐서 단지 막대기로 블레셋 600명을 쳐 죽인 영웅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영웅을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다 이기적이고 악질이고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라면 쩔쩔매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말씀만 믿고 순종한다면, 그 놀라운 기회, 즉 선하게 쓰일 그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멘-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그래서 불가능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떠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고약하신 분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더럽고 악하고 고약한 세상 가나안 족속의 기준을 선택했기에 고약하신 무자비하신 하나님으로 등장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돕지 않아서 그래서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은 몰라도 전혀 모르는 영적 무지의 소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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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모르면 이스라엘처럼 억울하다고 하여 울고 맙니다. 보김 신앙으로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택한 자녀들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두들겨 패서라도 돌아오게 하시고 변화를 시키시고 마는 분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7 족속까지도 심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성숙해지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바알에게 외쳐보아도, 아세라에게 외쳐보아도, 우상한테 온갖 아첨을 떨어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든, 암몬이든, 모압이든, 미디안이 든 간에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정치적, 군사적 항복을 시키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깨우쳐 돌이키게 하시려고 작정하고 드신 복된 회초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초리에 불과한 그들이 강해 보인다고 하여 그들에게 아무리 빌고 빌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가나안 족속을 징계의 회초리로 쓰시는 하나님에게 온전히 항복하기 전에는 그 동원된 회초리의 심판은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교훈입니다. 

 

어느 만큼 터지고 돌아서느냐는 각자의 마음입니다. 죽도록 터지고 나서 하나님께 시비를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그 못난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스라엘처럼 악순환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우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사사기의 말씀이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대충도 안 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하기에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되고, 나를 부인하지 않을 수 없는 고된 훈련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쉽게 살지 마세요! 내 뜻대로 살지 마세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쉽게 살려고 하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고, 편하려는 것은 말끔하게 평생 싸워서 제거해야 되는 가나안 족속의 특징입니다. 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살려달라는 부르짖음의 사고가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겨 승리와 태평의 삶을 거머쥐라고 하지, 싸우지 않고 대충 편하게 가나안 족속과 타협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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