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0072018 신명기 29:1-9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0072018 신명기 29:1-9

PastorYK 2018. 10. 8. 11:32

제목: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려 하심


오늘 말씀을 잘 보시면, 앞뒤가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의 내용을 잘 보세요! 동일한 말씀에 대하여 역시나 또 반복하십니다. 전혀 다른 말씀이 아니라 동일한 말씀으로 ‘순종하라’고 또 말씀을 합니다. 그 기적과 기사를 통하여 구원하여 주시고 40년간을 보살피신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가 중심 내용입니다. 물론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합니다. 그리고 반복하시는 다른 이유가 아무리 반복을 해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좋습니다. 그런데 4절의 말씀을 보세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주지 아니하셨다고 하시면서 다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5-8절의 말씀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40 년간을 인도해 주시면서 옷이 낡지 않게 하셨다고 하시고 발의 신도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도 먹지 못하게 하셨고 포도주나 독주도 마시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너희들의 주(主) 즉 주인과 왕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워서 이겨 동편 땅까지 주셨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아니 볼 수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기에, 마치, 시체에 불과한데, 왜 그렇게 해 주신 것일까요? 완전 낭비를 하신 것이 아닐까요? 마치 죽은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영원히 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도 주셨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이 정말!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당시 하나님께서 해 주신 모든 것은 다 무의미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필요한 것 그 이상의 것들을 다 해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6절에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들의 주(主) 즉 주인과 왕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이 됩니다.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 하나님을 알게 하시겠다는 이 말씀이 성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 당시에는 절망 그 자체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포기가 된 것이 아니라,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완벽하게 이루어 주셨음을 우린 고후4:5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수천 년 후에 일어날, 나타날 그 기적을 수천 년 전, 당시에 이렇게 먼저 말씀을 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타락한 우린 단지 오늘을 위하여 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여,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이 아닌 저주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시 기적의 40년 광야와 그 후의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주(主)가 되심을 알게 하시려고 이루어 주신 놀라운 구원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즉 기적과 기사와 능력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의 주(主)가 되시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진리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자녀들의 그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상관없이, 그 답답한 길고 긴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우리를 위하여 주가 되심을 알게 하시려고 그것이 살길이기에, 주가 되시겠다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수천 년 동안, 초지일관(初志一貫)굳게 지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놀고먹은 것이 아닙니다.


순간도 쉬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은 나의 주(主)가 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결과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지금까지 자녀들을 위하여 자녀들의 한 영혼 한 영혼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고, 신고 있는 신발이 닳지 않게 해 주셨고, 세상의 헛된 것들로 절대로 키우지 않으셨기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은 나의 주(主)가 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진리(眞理)입니다. 그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주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가까이 계셨던 것입니다. 시119:151입니다.“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못난 내가 하나님을 몰라서 방황하니까, 포기가 아니요 외면과 무시함이 아니요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늘 가까이 계셔 주신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나를 돕고 계셨기에 그래서 예수님만이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삶은 괴로움의 삶, 처절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와중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이지 않으시고 그 도움을 전혀 느낄 수는 없었는지는 몰라도, 내내 크고 큰 보살핌을 위하여 끝까지 쉬지 않으셨고, 늘 가까이에서 함께 계셨기에 그 은혜로 지금 나는 우리는 주(主)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찬송하고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깊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된 우리들은 어떤 찬송과 고백을 드려야 하는지 아세요? 바로 시145편입니다. 1-21절입니다. 무식함이 하늘을 찔렀던 무식 그 자체의 나(自我)이었지만 그런 나를 포기하시지도 무시하시지도 아니하시고 늘 가까이 계셔 주셔서 나의 주(主)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었구나! 를 확실하게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최소한 주님처럼 가족과 이웃과 늘 동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이 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하더라도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성숙함을 위하여 들어 줄 수 있어야 하고 기다려 주면서 인내심을 늘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잘 들어 주고 있고 기다려 주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고 좋은 관계를 늘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요? 늘 자기 말을 앞세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도망가려고 하지만 그러나 힘들다고 도망가지 아니하신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시면서 결국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主)가 되심을 알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도망치고 싶고, 피하고 싶지만 하나님 때문에 최대한의 노력을 하게 됩니다. 늘 도움이 필요한 이웃 곁에서 은혜를 입은 자답게 성도의 자리를 지켜야지만 되기에, 끝까지 인내하게 되고 노력을 하면서, 행복한 관계, 승리의 내일을 함께 이루어 보려는 소망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 말만을 하고 하나님의 강력하신 요구에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향하게 되면, 결국 인격의 관계가 아닌 business관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도 쌍방이어야 하듯이 한 쪽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자기의 이기적이고 잘못된 고집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건강한 부부, 건강한 가정과 교회를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 역시, 자기의 못난 고집과 자기편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관계도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 유명한 눅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같이 생각 해 보자고요!  둘째 아들이 멋대로 하다가 거지가 되었지만 나중에 후회하고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들어주시다가, 죽여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가죽신에, 반지에 게다가 소를 잡아서 잔치까지 베풀어 주시지 않던가요? 바로 그렇게 우리들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시면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에 하나님은 나의 주(主)가 되신다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면서 나가도 들어가도 복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여전히 자기 고집을 부리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까요? 어떻게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항상 쌍방이어야 하지, 한쪽만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나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지금 어떤가요? 하나님의 은혜로 항복하여서 좋은 관계를 위하여 노력하는 쌍방의 나(自我)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한쪽만의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면서 불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늘 같이 노력해야 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그 무한하신 열심 앞에 수십 년간을 교회출입을 한, 우린 이젠 항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놀라운 것은 그 과정이 참으로 절망 그 자체 속에서의 삶이었지만, 그것까지도 우리들에게는 유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 당시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주(主)가 되시는지, 전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결국 여기까지 역사하셔서, 주(主)가 되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전혀 하나님이 주(主)가 되심을 알 수 없었기에, 구약 내내 저주와 재앙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그러는 가운데, 무슨 일이 나타났던가요? 실패가 아닌 놀라운 구원의 성취가 이방민족, 나에게까지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지해서 불순종하여 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조금도 후퇴함이 없이 오히려 실패 속에서 성취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이스라엘이 잘나서, 쓸모가 있어서, 실력이 출중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주(主)가 되심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결국 죽어 있는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이방인까지 다 살려내시고야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젠 더 이상 무지함으로 머뭇거리지 말고 당연히 항복하자는 뜻입니다. 항복하여서 나가도 들어가도 하늘의 복을 넘치도록 받아내자는 뜻입니다. 왜 우리들이 항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뺀질뺀질 하면서 도망가기 바쁜지 알기는 아세요? 엡1:17-20의 말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어떤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힘과 사랑하심으로 이루어진 구원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다고요? 그런데 멋대로 살아요? 항복하지 않고 변명과 핑계를 대고 있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자신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기 뜻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절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처음에는 고통스러워서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자신의 삶 안에는 자유가 전혀 없는 것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24시간 통제받고 있는 그 느낌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미쳐버릴 것만 같다는 고통을 받지 않은 성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멋대로 하던 생각까지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견딜 수 있겠어요? 당연히 미치는 것입니다. 누구의 지배 하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그런 느낌, 완전하게 막혀버린 관 속에 있는듯한 느낌 때문에, 처음에는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으셨나요? 믿기 전에는 전혀 감시와 통제의 느낌이 없었는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도망치고 싶어도 안 되잖아요!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몰라요! 아주 작은 믿음을 가졌을 때에는 여전히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세상의 그 욕망이 강력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 힘을 이겨낼 수 없으니, 양쪽에 샌드위치가 되어, 그냥 힘들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준비된 영적 지도자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얼마나 괴로워했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보세요! 그랬던 내가 이젠 아픔이 아니라, 인격의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좋기만 합니다. 오히려 곁에 아니 계실까봐, 두려워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기적이지요!


이스라엘도 보세요! 결국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주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이방인까지 이렇게 믿는 자들로 변화(變化)시켜 주신 것을 보세요! 새롭게 창조(創造)된 우리 자신들을 보세요! 창조된 새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하늘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려는 그 자신들을 보세요! 구원 당시에는 처음이라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몰라서 고통 속에서 쩔쩔맬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우리들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고통하고 방황하였지만 이렇게 새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원하는 평안과 승리와 풍족한 가운데서 이룬 구원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이루어 주시므로, 이젠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福)을 받는 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몰라서, 몰라도 너무나 모르기에 알기 전까지는 당연히 방황하면서 힘겹게 버텨야 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찬송하는 자, 감사하는 자가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녀들의 현실은 고통 그 자체이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고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고, 원하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공급하여 자녀들을 구원하여서 하나님을 주(主)라 고백하게 하시고 결국 장성한 분량의 믿음으로까지 자라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기적이 아닙니까? 그 일하심이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보이지 않게 구원을 이루어 주시므로 결국 하나님이 나의 주(主) 즉 주인(主人)이 되시고 왕(王)이 되심을 알게 하신 것을 보세요! 그것도 세상의 죄악의 노예 속에서 말입니다. 멋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재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이렇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그 역사하심으로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복된 제가(김 목사)된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니 이럴 수가! 기가 막히신 하나님이시구나! 고백만이 나옵니다. 당장 잘 먹고 잘 입고 잘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복이 되게 하시는구나! 현실의 물질적 만족이 다가 아니었구나! 로 정리하게 합니다. 비록 머리가 나빠서 고생하고, 인내가 아니 되어 생고생을 그렇게 해야 했고, 가정의 풍지 풍파로 온갖 마음의 고생을 하기는 했어도 그것들이 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복의 과정이요, 하나님만이 나의 주가 되시는 그 복(福)을 이루어가는 과정이었구나! 가 되게 합니다. 성도로서의 견고함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신 훈련의 과정이었구나! 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벧전5:10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네. 그렇게 그대로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든가요! 그런데 예전에 아팠던 자신의 쓰디쓴 그 아픔들이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는 것이며 굳게 하시는 것이며 강하게 하시는 것이며 터를 견고케 하시는 과정이 이었는데, 성도로서 어떻게 여전히 그 아픔이 남아서 불평하는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슬픈 증거입니다. 예전의 아픈 추억이 온전케 되지 못하고 굳게 되지 못하고 강하게 되지 못하고, 터를 견고케 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예전의 모든 슬픈 추억들이 승화되어 아픔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을진대, 여차하면 예전의 아픔과 고통을 끄집어내어서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을까요? 아픔을 승화시키지 못한 지체들을 볼 때마다 그렇구나!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구나! 아직 하나님이 자신의 주(主)가 되지 못하고 있구나! 를 알게 합니다.


비록 3400년 전의 말씀이었지만, 결국 2000년 전의 예수님을 통하여 일차적인 구원의 성취를 이루어주시면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이 되기까지,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은 지속될 것을 알게 하시는데, 그러나 그 과정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이 주님을 알게 하는 거름이지, 미워서 주신 심판 차원이 아니기에, 그래서 주님을 알게 된, 성도된 자기 자신들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게 되고, 점점 달라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심을 알게 하시겠다는 신명기 이 말씀이 340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분을 알게 된, 나 자신을 보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문제는 저처럼 이런 이해를 못하고 있기에 문제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것으로가 아닌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안달하고 있으니, 그 복을 눈앞에 두고도 거머쥐지 못하고 방황하는 지체들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 놀라운 들어가도 나가도 허락된 그 하늘의 복을 누리면서,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소중하게 떠나야 되는 성도들이, 여전히 주신 믿음을 가지고 주머니 속에 넣고 키울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단지 헛된 세상의 일로, 자기의 썩은 기준으로 쩔쩔매고 있으니! 이처럼 안타까울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더 이상 세상의 것 때문에 시간과 힘을 다 쓰지 마시고, 부자가 되시려고 하지 마시고, 불변인 경건을 위한 시간을 반드시 남겨두셔야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도 안 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식의 회색분자는 더더욱 안 됩니다.


축복의 그리심 산이 아니면 저주의 에발 산이지 그 중간은 없습니다. 속지 마세요! ‘자기 스스로 나는 그래도 믿음의 씨인 구원을 받았어’ 라고 판단이 되시면, 죽기 살기로 갈아 엎어버리세요! 그리고 곱게 마음 판을 만들어서 말씀의 씨앗을, 은혜 안에서 키워나가세요!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최소한 30분 골방기도와 30분 말씀 마음 판에 새기기의 삶을 위하여 몸부림을 쳐 보세요! 지속적으로 한 3년만 해 보세요! 3년 후에는 아마도 지금 저의 이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최소한 그 수고를 하지 않으면 믿음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도의 제목이 세상의 형통과 승리와 같은 그런 복(福)을 추구하는 기도 제목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주(主)가 되시고 나는 이웃의 종 노예(奴隸)가 되기 위한 기도만을 드려야 합니다.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도, 욕심, 이기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도, 옛 습관, 버릇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도, 미신적인 전통에서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기 위한 기도, 자신의 역할인 남편과 아내와 자신과 부모로서의 본이 되기 위한 차원에서의 절실한 기도를 늘 드려야 합니다. 당장 안 되어 보여도 끝까지 유지해 보세요! 인격의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확신은 하나님께서 전혀 듣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3400년 전의 이스라엘과 죽은 나를 위하여 끝까지 보살펴 주시므로 주(主)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살펴 주셨다고요?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도록 그 확신을 주시려고 내내 나의 옷을 해어지지 않게 하셨고 신발이 닳지 않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들도 힘들다고 하다가 멈추지 마시고 기어서라도 나가 보세요! 가느라고 무릎이 다 닳고 팔꿈치가 다 닳아버리더라도 계속해서 그분에게 나아가 보세요!


주신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위하여 입은 옷과 신은 신발이 닳지 않게 하시고 내내 하나님의 것으로 먹이시면서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깊은 감동과 찬송으로 대신하게 하십니다. 그보다 큰 복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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