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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10142018 신명기 29:10-17 본문
제목: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
먼저 중요한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하여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믿음의 씨앗을 받은 자,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믿음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씨앗 즉 내가 구원을 받은 자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질적인 방법과 차원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평생에 걸친 믿음의 습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낳아지는 믿음의 실천만이 알게 합니다. 믿음의 습관을 각자가 확보하고 유지(有志)해 나아가면서 그에 따라 각자에게 실천되는 그 믿음으로 확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씨,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믿음의 실천을 위한 믿음의 습관이 항상 삶 속에서 따라주지 않으면 늘 믿음에 대하여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습관만이 더욱 확실한 자기 믿음을 확보할 수 있음을 아시고 이제라도 시작하시는 것이 후회 없는 내일, 자랑스러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누가 누구에게 맹세를 하신 것이라고요? 사람인 내가 하나님에게 한 언약과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하신 언약과 맹세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하신 언약과 맹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과 맹세는 무엇이며, 왜 언약과 맹세를 하셨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언약과 맹세를 하셨는가? 창세기에서 확인 해 봅니다. 창12:1-3, 창15:1-5의 언약입니다. 먼저 창12:1-3의 약속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은 것이니라”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하고 하신 약속이 (1)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 (2)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해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3)너를 축복하면 복, 너를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겠다고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때가 주전 1800년경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의 약속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2000년 전에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다시 창15:1-3의 말씀을 봅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여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완전 포기하고 있는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다시 오셔서 약속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부분이 바로 4-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확인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6절로 말씀을 하셨는데, 다시 하나님께서 7절로 하시는 약속의 말씀이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십니다. 그러자 자기가 당시에 살고 있는 이 땅을 업으로 주신다고 하시자, 아브람이 8절로 묻습니다. 그 약속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거기에 대한 답변이 참 신랄(辛辣)하신데, 창15:9-11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염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무슨 뜻일까요?
아브람을 통하여 하시는 그 모든 언약인, (1)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고 (2)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해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3)너를 축복하면 복을, 너를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겠고 (4) 살고 있었던 그 땅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에 대하여 조금도 전혀 의심하지 말라는 차원에서의 쪼갬 의식(儀式)을 거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람을 위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시는데, 창15:12-21입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을 위하여 자세한 말씀과 함께 17절의 말씀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짐승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쪼갠 그 사이를 지나가신 이것은 그 약속을 견고히 지키고야 말겠다는 맹세차원에서의 행위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신 그 계약을 위반하는 자는, 짐승을 쪼개듯이 쪼개고 말겠다는 뜻에서의 약속인데, 결국 너하고 한, 그 모든 약속들을 책임을 지고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은 이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데, 약속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인 역할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쪼갠 고기 사이를 아브람과 함께 아닌 하나님만이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약속과 맹세를 하시는 것일까요? 라고 의심을 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기에 잠시 설명을 드리면, 그 이유는 당시 아브람과 사라가 불임이었단 말입니다. 자기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오셔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면서, 불임인 그들에게 아이를 주시겠다고 하시니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나아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저렇게 수많은 육신의 자식이 아닌 믿음의 자식을 줄 테니까,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단지 말이잖아요? 물론 쉽게 동의는 할 수 있겠지만, 곧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약속에 대하여 믿기는 믿었지만 여전히 의심이 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브람은 어떻게 그 말씀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라고 하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창15:9-10, 17의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주시는 의식을 하시면서, 약속을 다 이루어 주시겠다는 강력하신 의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브람은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이삭을 주실 때까지 아브람은 그 약속을 의심했음을 우린 창16장이후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그런 연약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그를 믿음으로 여겨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없는 믿음을 있다고 여겨주시는 그 이유는 무슨 뜻일까요? 이미 만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뜻이요 그 의미는 믿음의 씨를 거저 가진 자라는 것이요, 결국 믿게 되고야 만다는 뜻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만세 전에 주신 믿음이 자기의 믿음으로 되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해 주시고야 말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만세 전부터 한 없이 사랑하셨기에 그분의 그 사랑하심을 이런 의식으로 보여주시고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요 기쁨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고 그 사실을 놓치지 않기로 작정하셨기에 언약을 주시고 맹세까지 하신 것입니다. 특히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그 약속과 맹세를 전체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한 개인, 개인을 놓고 하신 언약이요 맹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9:10-11의 말씀을 보시면, 전체 너희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 장로와 너희의 지도자와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라고 하시면서 세심하게 불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뭉뚱그려서 아닌 한 명, 한 명하고의 구원의 약속을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 좋으시고 사려(思慮)가 깊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쁘다고 하여 대충하지 못하십니다.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하여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이렇게 구원을 받아서 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여튼 없는 믿음을 있다고 여겨주시는 그 이유는 무슨 뜻일까요? 설명하려다가 잠간 벗어낫지만, 없는 믿음을 있다고 여겨주시는 그 이유는 이미 만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뜻이요 그 의미는 믿음의 씨를 거저 가진 자라는 것이요, 결국 믿게 되고야 만다는 뜻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인 히11장으로 갑니다. 믿음은 히11:1-2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런데 히11:23의 말씀을 보세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에 대한 표현이 이상합니다. 다른 곳에서의 믿음에 대한 말씀은 다 이해가 됩니다. 히11:5, 7, 17, 20, 22입니다.
그런데 히11:23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아니 모세가 어떻게 엄마 뱃속에 있는데 뱃속의 모세가 믿음으로 나와요? 이해가 되요? 아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엄마 뱃속에 있는 핏덩어리에 불과한 모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뱃속에 있는 모세가 믿음으로 낳을 수 있어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말이 되지 않으나 결국 그 말씀 속에는 어떤 뜻이 들어 있다고요? 이미 만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드리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에게는 시제가 있습니다. 과거 현제 미래의 시제를 가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믿음은 나의 의사와 상관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창25:21-23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말1:2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입니다.
이 말씀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다시 말씀을 하시면서 그 점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9:8-13, 33입니다. 믿음은 오직 은혜로 얻은 것이지 너희들의 의지와 뜻과 실력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제발, 까불지 말고, 교만 부리지 말고, 당장 항복하여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을 받으라고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런 하나님의 뜻은 저버리고 나는 구원을 받았고 너는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했니? 나는 방언하는데 너는 방언도 못하니? 이런 식으로 차별을 두고 있는데, 은혜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특히 믿음에 대하여 오해를 하여 믿음이 없는 자 앞에서 자랑을 하거나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을 두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구원을 받은 자일지라도 신앙이 전혀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여전히 아이에 불과한 영적인 장애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요? 자기중심, 자기감정의 신앙이기에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믿음은 변덕스럽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하늘도 보이면 있다고 하고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자기 기준의 변덕이기에 복을 주시려는 고난도, 고난으로 강하고 굳고 견고하고 온전케 하시려는 고난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가 아닌 불평으로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앙의 귀감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른 신학적인 지식을 잘 배워야 믿음의 씨앗이 잘 자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한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기적이지요! 세상의 노예로 종노릇하다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는데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바로 그 기적을 드러내고 있는 거룩한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전혀 믿음이 없어 짐승처럼 살아가던 우리들을 결국 말씀으로 시작하여 십자가로 이루어 주시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어 이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늘 불평하고 미워하던 자들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된 것을 보면, 기적이지 않습니까? 주전 1800년경에 창15:8-10의 그 쪼갬과 그 사이를 지나시는 이 의식을 통하여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을 하셨지만, 결국 지켜내고야 마신 하나님의 그 의지와 열심과 능력만을 보더라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를 어렵지 않게 알게 하지 않던가요?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전 과정을 성경을 통하여 증언하시고 계시는데 아직도 기적과 기사가 필요하던가요?
말씀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렇다는 것을 누구에게만 알게 하셨다고요? 시147편을 봅니다. 이와 같은 원리와 가치를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보여주셨다고 19-20절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하시면서 “할렐루야”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선택된 우리들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까요?
2. 그렇다면 두 번째로 드릴 말씀은 이런 언약과 맹세는 왜 하신 것일까요? 결국 언약과 맹세를 하여 구원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책임을 다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내라는 것이 언약과 맹세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되는 점이 있는데, “내 백성답게 살라”는 그 뜻은 책임을 다하면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너희들이 나의 사랑과 은혜로 나의 자녀요 백성이 되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래서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하라는 뜻이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에서의 책임 있는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세요?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보기에 잘생겨서 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그랬어요? 아니면, 머리가 천재라서 아까워서 해 주신 구원다고 했어요?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단지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것이 언약을 하신 이유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이해가 안 되다보니까, 하나님이 장난치는 것 같고, 만화 차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만세 전에 준비된 언약인데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하신 언약과 맹세가 결국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에 우린 어떤가요? 그냥 교회만 출석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지식, 감정, 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교류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완전 메마른 관계로 보여 집니다.
이보다 슬픈 일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전혀 상관도 관심도 없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너무나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무관심으로 자기 할 일만 한다면, 어떨까요? 이보다 슬픈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매일 술로 살 것입니다. 나중에는 견디지 못하여 미쳐버리지 않을까요? 혹시 상사병에 걸린 어떤 사람들을 주변에서 듣거나 보지 않았나요? 지금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꿈같은 사랑을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사랑도 아니요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 대신 죽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인격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래서 그 약속을 하셨고 짐승을 쪼갠 후에 지나가시는 강력하고 강열의 맹세까지도 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처럼 우리도 믿지 못하기에 이해도 전혀 아니 되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약속하셨고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약속과 맹세로 그 놀라운 사랑이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비현실적인 사랑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만화보다 더 만화와 같은 그 사랑이,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그 사랑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통에, 어떤 기적이 나타나고 있던가요? 그 사랑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을 전하려고 사랑을 받은 주의 자녀들이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고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안에는 저도 한 몫을 챙겨서 이렇게 매 주일마다, 매 수, 금요일마다 이 사실을 전하는 일꾼으로 종으로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지요! 그 극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이 왜 그런 희생을 하는 것이며, 섬기기 위하여 모진 고난과 고통까지도 감수(甘受)해야 하는가? 라는 의심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자기 혼자 살아가기도 바빠 죽을 지경인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웃에게 알리려고 목숨까지도 재산까지도 부모 친척과 가족까지도 다 버려야 한단 말인가? 미쳤나? 돌았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러나 금요일 저녁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들이 얼마나 스스로 속고 있으며, 힘과 지혜가 있다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조소와 조롱을 당하고 있는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사람은 이렇게 보이는 몸만으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다워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다움이 있으려면, 누가 나를 창조해 주셨으며 자신의 삶의 목표가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몸만 사람이지 참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일 뿐입니다. 즉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할 뿐이요 슬플 뿐이요 헛된 것에 빠져서 방황할 뿐입니다. 금수에 불과하다고 하지요! 짐승에 불과한 자가 돈이 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고 지위와 지식을 가졌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간단히 이야기를 드리면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을 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로 믿고 따르게 되면, 나아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믿을까요? 복이 있는 자만이 듣고 믿어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 바로 믿음의 씨를 거저 받은 자, 구원을 거저 받은 자들이 바로 복된 자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아멘- 하지만, 나는 복된 자,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해 놓고서는 늘 어디로 향하고 있던가요? 바로 골방과 말씀으로 향하지 않을 수가 없어야 하는데, 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삶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하고의 점점 깊은 관계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일일일, 돈돈돈 하고 하나님에게는 늘 나중에 보자고 하면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그분하고 멀어지니까? 행복하던가요? 감사하던가요? 평강이 넘치던가요?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마약의 불과한 가치이기에 결국 완전 치명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거저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우선이 돈과 일과 출세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과 의를 찾고 구하면서 따라가야만 됩니다. 평생에 걸친 믿음의 습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낳아지는 믿음의 실천만이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습관을 각자가 확보하고 유지(有志)해 나아가면서 그에 따라 각자에게 실천되는 그 믿음으로 확인이 됩니다. 그래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라고 하신 것을 우린 시1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시1편입니다. 복된 자는 말씀을 주야로 습관적으로 묵상하는 자인데 말씀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는 형통의 복까지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형통인가?
시37편입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그 복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세요? 저를 보세요! 평생에 걸친 믿음의 습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낳아지는 믿음의 실천을 하므로 제가 어떻게 변화를 갖게 되는지를 저도 알고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믿음의 습관을 각자가 확보하고 유지(有志)해 나아가면서 그에 따라 각자에게 실천되는 그 믿음은 복 그 자체가 됩니다.
나가도 들어가도 복을 받고 있고, 꼬리가 아닌 머리고, 빚진 채무자가 아닌 모든 것을 다 가진 채권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모으셔서, 각각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참예케 하시고, 언약의 맹세에 참예케 하시더니 우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루어진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 꼭 꼼수를 펴야 합니까? 다 내려놓고 따라갑시다! 그것이 진정한 유일한 성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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