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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09162018 신명기 27:11-26 본문
제목: 축복과 저주의 산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박영선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말씀을 하시듯이, 예수님께서 꽃바구니를 옆에 끼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무지개를 타고 오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씻을 따뜻한 물도 없이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의 칼날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유대민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여서 어머니와 가족과 제자 앞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세상 앞에서 당당하셨습니다.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목숨을 걸고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완전하게 찢겨 돌아가셨습니다.
신앙은 중간지대가 없음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라! 담대하라! 내가 이김을 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요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신앙은 예와 아니요, 또는 흑과 백처럼 분명하지, 회색인 중간 지대는 없기에 그것을 알게 하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갈5:16-17, 갈6:8의 말씀을 봅니다. 육체의 소욕이 아니면 성령의 소욕이지, 육체와 성령의 소욕의 차원을 왔다 갔다, 육체와 성령의 중간 단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가면, 썩을 것을 거두게 되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으시면, 약속의 영생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괴로움이 따르는지 아세요?
삿11:29-40입니다.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는 아빠와 딸의 놀랍고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어리석은 서원을 드렸지만 순종하는 그 아빠와 아빠를 인정하는 그 딸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결국 무남독녀를 둔 딸 바보, 입다가 딸을 어리석은 서원을 하여 죽이게 됩니다.
우리라면 어떨까요? 특히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이중간첩처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신앙을 가진 자들은 상황에 따라 서원을 해 놓고서는 나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딱 한 번만 봐 주세요!” 그리고는 감히 슬쩍 넘어갑니다. 안 됩니다. 입다와 그의 무남독녀 딸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드린 자신의 서원은 입다처럼 딸을 포기해야 하고, 딸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고 아버지의 서원대로 순종했듯이 당연히 순종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예 했으면 예이고, 아니라고 했으면 아니요’입니다. 번복도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하라는 설교를 통하여 뭐라고, 교인들이 불평을 하던가요? 왜 목사가 설교 중에 살아가기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그 힘든 지체들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왜 마음의 부담과 상처를 주냐고, 불평합니다.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입다의 순종과 딸의 순종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제 젖을 뗀 사무엘을 하나님에게 받친 그의 부모도 잘못된 것입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설명을 자세하게 드리기로 하고, 먼저 알아야 되는 점은 인간 판단의 그 뿌리가 무지와 무식에서의 판단이기에 늘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될 수밖에 안 되는 그 이유로, 누구든지 다 상처가 되지, 감사와 위로를 받는 성도는 없습니다. 왜요? 다 악질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악질인지, 자존심을 슬쩍 건드려 봐요?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근본이 악질이기에 구원을 받았어도 상처를 받아가면서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한 상처는 상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받는 상처는 인간의 기준에서의 상처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에서의 그 고통, 그 아픔이 결국 영화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요17:1, 4-5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십자가의 깊고 깊은 상처 때문에 예수님도 영광스럽게 되시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들은 특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 이중간첩과 같은 그런 신앙에서는, 하나님 편도 못 들고, 그렇다고 세상 편도 못 드는 그래서 ‘예와 아니요’를 반듯하게 전혀 못하게 되는데, 그것처럼 악한 상태는 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회색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믿지 못하여서, 늘 그럴듯한 포장으로 살아가는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자신은 포장된, 위선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위선 신앙이 되면, 늘 듣기 좋은 설교만을 원하고, 늘 자기편에 서 주기를 원하는데, 바로 그런 위선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실체가 노출되어야 하는 그런 설교를 들으면 당연히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무슨 이따위 설교를 해!’ 하면서 자기에 대한 변명을 할 것입니다. 언제나 중간지대에 서 있게 되면, 하나님 편을 들자니 세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 같고, 그렇다고 세상의 편을 들자니 하나님이 무섭고, 바로 그런 자들이 이겨내지 못하여 결국은 다 깨지고 무너진 다음에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말씀을 듣고 곧 회개를 하고 최소한 돌이켜야지, 마지막까지 가서, 대성통곡을 하게 되는, 최악으로는 가지 말자는 절실한 부탁입니다. 거기까지 가지 않으려면 먼저 무엇을 생각하셔야 합니까? 왜 나는 성도로써 분명한 ‘예와 아니요’를 하지 못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훈장을 받던가요? 회색분자처럼 적군 아군의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던 비겁한 자가 훈장을 받던가요?
전쟁이 두려워서 싸울까 말까 하던 겁쟁이가 훈장을 받던가요?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는 하는 그들은 다 비겁한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했을 때, 명예로운 훈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상처(傷處)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때문에 영광스러운 상처는 성도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당하고 손해보고 깨지고 터지면서 심한 상처를 받게 되지만,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편에서 살다가 당하는 고통과 환란이 성도의 승리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환란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행14:22, 롬8:17-18, 고후1:8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되는 성도들은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기에 고난당하게 되는데, 그러나 보세요!
고후7:10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결국 회개를 이루는 영광이요 큰 복이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결코 세상 때문에 근심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라면 세상의 일로 마음이 굳어져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교회를 다니면서 드리는 기도를 보면, “늘 제 멋대로 하고서는, 비겁하게 살아놓고서는, 결국 절망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 이번 한 번만, 봐 주세요?” 그건 우리들의 못난 구석일 뿐입니다. 입다와 그의 무남독녀 딸을 보세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보세요!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때문에 기꺼이 다 포기하고 있습니다.
‘예와 아니요’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와 아니요’가 분명하지 못한 지금 우린 무엇을 포기하고 있어요? 전혀 쓸모없는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고 그리고 말씀 때문에 쩔쩔 매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교회만 왔다 갔다’할 뿐입니다. 세상의 고민만 심하게 하고 있지, 고민해야 될 신앙의 고민은 거의 없는, 죽은 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썩을 육신의 것들만을 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버림이라서 안 된다고, 아무리 해도, 순종이 살길이라고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쏟아 부어도 반응이 없어, 여전히 자기 뜻대로 가니, 참! 고민스럽기만 합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습니다. 순종하려는 고민이 전혀 없기에, 정말 그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나? 그들의 그 마음은 여전히 돌 판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 은혜로 새사람이 되어, 바뀌고 있을텐데,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해는 합니다. 순종하면 당장 손해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이 좋아서, ‘예와 아니요’를 못합니다. 현실적으로 지기 싫고, 손해 보기 싫고, 당할 수 없고, 고통의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인데, 언제까지 그럴 것입니까?
언제까지 늘 봐 주어야 합니까? 지기 싫고, 손해 보기 싫고, 당할 수 없고, 고통의 길을 따라갈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매로 ‘반 죽어’ 항복을 받아내는 길밖에 없는데, 알아서 선택을 하세요! 그래서 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에 주시는 말씀이 두 번째로 드릴 본문이 바로 신27:16-26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조금 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왜 설교 중에 거친 쌍소리까지 해야 되는가? 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잘 들어 보세요! 먼저 질문합니다.
왜 축복과 저주의 두 산으로 백성을 나누어 세우신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따뜻한 말씀, 선한 말씀이 아니라 전혀 아닌! 듣기도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흉악하고 망측한 저주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배우지 못한 무식한 하나님이라서 그런가요? 바른 말을 쓸지 몰라서 그러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런 듣기 싫은 저주의 율법을 주시는 이유는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내 자식들이기에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버려두려고 하신다면 이런 저주의 율법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는 어떤 관계일 때 그냥 하는 대로 내버려 두던가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포기할 때입니다. 롬1:22-32입니다. 포기하면 그냥 내버려 두는 법입니다. 내 자식이 아니면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신27:16-26의 말씀이 바로 그 차원입니다. 너희들은 내 자식들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들을 키울 때, 또는 여러분이 자식을 키울 때, 자식들이 또는 자신이 잘하는 짓이 많던가요? 잘못하는 경우가 많던가요? 거의가 잘못합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가 많지, 잘한다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자식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게 되던가요? 아니면 듣기 거북한 쌍말도 막 하게 되던가요? 쌍말도 하게 됩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가만히 보세요! 우리들은 듣기 좋은 말에 반응을 하던가요? 무서운 협박에 듣던가요? *** 좋은 말로 경고, 책망을 하면 전혀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 가던가요? 아! 그때, 왜 나는 듣지 않았던가! 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불평이 내가 잘못했을 때, 반을 죽여서라도 끌고 가지, 왜 내버려두므로 이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 죽은 여동생이 나한테 죽어가면서 그랬고 나 같은 사람들은 왜 좋은 말로 하여 이 지경에까지 나를 이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아버지를 향하여 심하게 늘 불평, 불만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이 없으셨나요? 도시락 싸 들고 와서라도 나를 말리지 왜 말리지 않아서 이렇게 되게 했냐고 속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불평한 적이 없어요?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인생이 참 짧기 때문인데, 아니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어떻게 그런 기막힌 경험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던가요? 아니면 교만해 졌거나, 아니면 이젠, 잘 먹고 살다가 보니까, 다 잊었을 것 같은데 가만히 자기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보세요! 허다한 그런 경험을 수없이 했을텐데요? 왜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무시무시한 조교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겁박과 협박을 받게 되던가요? 심지어 듣지 못했던 심한 쌍소리도 조교들이 하던가요? 좋은 말로는 전혀 통하지 않은 인간말종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삼상2:12-17, 22-25, 27-34, 삼상3:15-18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런 무시한 말씀을 받았지만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삼상4:1-22입니다. 아이를 밴 엘리의 며느리까지 죽습니다. 심지어 죽으면서 아이를 낳았는데 한이 맺은 아이 엄마는 자신의 아이의 이름을,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으로 이가봇’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이렇게 슬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제사장 가문의 며느리가 얼마나 슬펐으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까지 하면서 그런 참담한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습니까? 지금 우리 중에 그런 종말을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가봇이 되지 않으시려면 세상에 깊이 빠진 자기부터 항복하세요. 사람은 근본적인 태생이 좋은 말로는 완전 듣지 않습니다. 얻어터져야 들어요! 좋은 말로 하면 사람을 우습게봅니다. 심지어 저렇게 예쁜 성지, 수현이를 보더라도 좋은 말로 하면 전혀 듣지 않아요! 그래서 하신 말씀이 저주의 율법입니다. 때문에 악한 나를 알게 하고 변화를 주는 그 복음이 없으면 누구든지 마냥 무너집니다. 우리 주변에 법이 없어도 된다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그런 어른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해 보세요! 어떤 반응을 하시던가요? 화를 내지 않으면 전혀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귀에 달콤하지만 그러나 자기의 영혼을 서서히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재미있고 달콤한 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면 아주 잘 듣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심보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래서 어떤 율법을 주시게 되는가? 바로 오늘과 같은 저주의 규례를 주신 것입니다. 100% 너희들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가치는 죄송하지만 포장된 썩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믿음이 없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포장된 썩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그런 자들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에, 어떤 반응을 나타납니까? 예뻐 보이고, 잘나 보이고, 없으면 안 된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만약에 누군가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믿음 없는 그를 포기하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의 가치는 살면서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그래서 가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속게 되고 상대방에게도 속게 됩니다. 멋지게 포장된 썩어빠진 고기 덩어리를 선택하면서 결국 나중에 대성통곡을 하지만 you are too late! ***이런 기막힌 경험은 한 번만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속고 속이는 그런 삶을 여기저기서 반복하지 않으시려면, 저주의 에발 산에서의 더러운 삶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도로서 고집을 꺾고 하나님에게 항복할 때 비로소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복된 삶을 주시려고 그래서 은혜의 구원을 주시고 은혜의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회개는 빠를수록 가치 있는 결과와 서로에게 큰 유익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세상의 일로 머뭇거리면서 위선자적인 회색분자로서의 신앙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또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식사 후에 자세한 말씀으로 우리의 감추어진 더러운 죄의 뿌리를 찾아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한없이 부족한 존재인가 하면, 남자들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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