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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2018 신명기 28:1-14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9232018 신명기 28:1-14

PastorYK 2018. 9. 25. 04:51
제목: 하나님의 복이란-성도의 무거운 책임-

(받은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될 때, 약속의 복이 임하고,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다. 이 아픔이 없는 성도는 없다.)     

       

오늘도 복을 주시겠다는 참 듣기 좋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복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지극 정성으로 빌고 빌어서 받을 수 있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자녀들과 소통이 되고 사랑이 넘치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런데 인격의 하나님을 처음부터 알 수 없고 인격적인 만남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성도들의 반응은 말씀을 받으면 어떻게 나타낼까요?


마치 평생 장님으로 살다가 이제 갓 눈을 뜬 자의 상태, 한국에서 살던 자를 별안간 미국 주류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살게 한 상태라고 할까요? 그래서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인간적인 기쁨은 잠시, 점점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삶의 방식과 목적이 완전 다르니, 그래서 기독교 세계는 공포요, 도망갈 구멍이 없다고 한 신학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첫 믿음인 구원은 거저 주셨지만 그러나 복중의 복인 믿음의 열매는 쉽게 거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복중의 복인 믿음의 열매를 쉽게 주시면 생각과 지혜가 깊어지지 않고 성숙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의 골짜기를 구원을 받은 자녀들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데, 그러나 그 좁은 길은 결코 허망하지도 헛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상상할 수 없는 약속의 복인, 들어가고 나오면서 복이 되고,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게 하시고, 꾸어줄지언정 꾸이지 않게 해 주시는 길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복을 받으시려면 무엇보다도 시119:66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우린 그냥 첫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첫 믿음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저 받은 첫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되기까지, 즉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과정은 적지 않은 세월, 험하고 험한 신앙의 훈련을 통하여 배워가면서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믿음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은혜요, 믿음입니다. 그런데 단지 선물인 믿음만으로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판단은 큰 오산임을 우린 시119:33-39, 66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첫 믿음만으로 다 되었다가 아니라 이젠 성도로서의 그 책임이 따르는데 그 책임을 지려면 그 길을, 원리를 알아야지만 합니다.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 그리고 그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성도로서 무엇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깨달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순종할 수 있도록 무섭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시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도록 자신과 세상의 유혹과 습관과 싸워야 합니다. 단지 받은 그 첫 믿음만이 능사가 아니라 성도된 우리들은 그렇게 좋아하던 세상의 것을 다 버려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게 어디 쉬워요? 그냥 교회만 다니면 탐욕과 그 좋아하는 허탄한 세상의 것들을 거저 받은 그 첫 믿음으로 쉽게 포기할 수 있어요? 경험하고 계시듯이 아니잖아요! 피 터지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점점 더 알아가면서 믿음이 자라가야지만 이에 따라서, 조금씩 세상의 헛된 뜻을 포기하게 되고, 포기하면서 하늘의 뜻을 채워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과 가치를 깊이 알아가면서 늘 달콤하게 보이고 느껴지는 세상의 세력과 늘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어떤 기도를 드렸다고 하던가요? 엡1:16-19 입니다.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2)구원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3)성도된 가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풍성인지를 알아야 하고 

(4)어떤 힘과 능력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구원인지를 너희들은 꼭 알아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단지 나도 전혀 그 구원의 가치와 풍성함을 모르는 첫 믿음만으로 만족하려고만 하고 있기에 어떤 문제가 지금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어요? 기업보다 더 썩어버렸습니다. 왜요? 믿음의 믿음이 아닌 주신 첫 믿음만을 가지고 만족하려고 하니까, 버려야 되는 자기의 옛 사람과 행위를 지닌 체, 희생은커녕 실속만 챙기면서,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는 것입니다. 

첫 믿음, 첫 구원으로는 세상을 이길 힘과 능력이 안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능력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데, 그냥 첫 믿음을 받은 것으로 될 줄로 알고 그래서 살았던 대로, 살아오던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로구나! 로 착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에게 항복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면서 믿음의 열매를 맺어 가는데 있습니다. 주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몇 군데만 찾습니다.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골 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피눈물을 몇날 며칠이 아니라 평생에 흘려야 합니다. 왜요?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삼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문제는 자기 자신의 죄의 뿌리의 깊이입니다. 본이 되고 제자도 삼아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성도된 자신들은 깊이, 아주 깊이 숨겨진 자신의 죄의 뿌리 때문에 전혀 방심할 수 없습니다.


여차하면, 잠시 한눈을 팔거나 근신 경계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나의 더러운 죄가 ‘확! 뒤덮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만을 바라보아야 하기에 ‘오지랖 넓은’ 그런 삶은 불가능합니다. 단순한 삶을 지향(志向)하게 됩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를 갖게 되기에 가능한 떨구어내게 됩니다. 여기저기 늘어놓지 않게 됩니다. 늘어놓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요 그 뜻은 믿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갖게 되면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삶을 이루어가는 자신을 볼 것입니다. 점점 더 하나님 중심이 되면서 삶도 같이 단순해져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아하! 이것이 신앙이요 믿음이로구나!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엡5:15-18 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신앙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계가 있습니다. 어떤 단계인가 하면, 벧후1:4-7 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단지 거저 주신 그 첫 믿음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인 사랑을 공급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셔야 하는 단계가 있기에, 그 성장 순서를 잘 보세요!


첫 믿음은 자격과 상관없이 거저 받았기에 자랑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방향이 생깁니다. 

그 다음 단계를 보시면 덕(德)입니다. 

이 덕(德)은 저는 도덕적 윤리적의 삶으로 보고 있는데 그래서 보통 목사님들이 목회를 하면서 답답해서 하는 소리가, 믿음, 믿음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아래위도 없이 막 살아가는지, 그런 교인들을 교회 안에서 하도 보게 되니까,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던가요? 즉 덕(德)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예의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禮)를 배워 익숙해 져야 하는데 별안간 예(禮)가 생기지 않습니다. 버릇없고 예의가 없는 형편없는 자신을, 예의를 가진 반듯한 사람으로 준비하려면 그것도 결코 쉽지 않기에 가정교육을 중요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은 성도는 자신의 삶의 기준이 버릇이 있는지 없는지를 정확하게 살펴보면서, 고칠 것은 고치고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단계는 지식입니다. 어떤 지식일까요? 무엇보다도 성경(聖經)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이젠 절제(節制)의 다음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도달하려고 해도 어떤 피나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할까요? 절제가 잘 되시는 분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세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절제의 단계까지도 미쳐버리는 훈련의 과정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절제(節制)까지만 이르러도 대단한 영적 수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아니하시고 인내를 요구하시면서 경건(敬虔)에 이르러야 하고 그 다음은 형제의 우애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완전 죽으라는 것입니다. 완전 희생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운명이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요 도달해야 되는 구원의 목표입니다. 신앙의 진전과 성장이 따르지 않으면 진정한 예배로 드릴 수 없고 원하는 그 뜨거운 찬송을 드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악기로 인한 그런 차원의 찬송은 찬송이 아닙니다. 그런데 첫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제발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속아서 교회는 믿음, 믿음, 믿음만 하다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겨우 기어서라도 힘겹게 따라가면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시119:10, 69, 106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찾았으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전심으로, 또는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그렇게 했는데도 어떤 고백을 다시 하던가요? 시119:168-176 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송을 발할찌니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찌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말씀을 진심으로 굳게 붙잡고 또 붙잡았지만 잃은 양같이 유리(流離)표박되기에 도와달라고 하면서 긴 시편119편을 마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허탄한 것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는 100% 못난 인생인데, 방황할 수밖에 없기에 사망만이 남는 그 참담한 인생을, 구원하여 주셨기에, 그래서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할 때,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의 현실을 느끼고 보면서 절망과 낙심이 닥쳐오지만 그래서 마치 허망한 성도의 전 인생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길에서는 결과가 신28:1-15의 풍성한 약속의 복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길을 따라가는 것이 지혜입니까? 어느 길을 따라가는 것이 복입니까? 두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그 자신이 편하고 즐겁던가요? 아니잖아요? 마냥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예수님을 따라가느라고 쩔쩔매고 힘들어 하는 것이 100번 낫지 않을까요? 

시135편을 함께 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주창조보다 위대하다는 내용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우주창조, 그 어떤 기적들하고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이 구원이기에, 그래서 여호와를 찬송하라, 찬송하라, 찬송하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단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구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구원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찌 이 사실을 놓쳐서 헛된 세상의 것들 때문에 방황할 수 있는가? 그래서 136편을 보세요! 어떤 찬송을 드리던가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인자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그 모든 것들도 나의 그 모든 형편까지도 결국 인자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하시려는 모든 것이었다! 는 것입니다. 아픔까지도 가난까지도 실패까지도 다 합친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 비명, 절규를 지나면서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이 없으면 진정한 찬송은 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원하는 집, 차, 학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뜨거운 찬송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불가능합니다. 안 됩니다. 못합니다. 터지는 그 뜨거운 찬송은 고통과 핍박과 절규가 깊으면 깊을수록 되지, 넉넉한 조건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기에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하여 한가지 만, 더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의 책임을 다하셔서 복을 받으시려면,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어떤 때가 있다고 하는데,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때는 이미 임했기 때문입니다. 

요7:5-6입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미 와 있는 구원의 때입니다. 마치 중생의 때가 각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고 자꾸 이상 말을 하는데 정말 큰 일 납니다. 오늘 이후로는 다른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잘 들어보세요! 믿음과 구원이라는 테두리 안에는 두 차원이 있는데 우선은 거저 받은 구원과 믿음입니다. 그 다음 구원과 믿음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맺는 구원과 믿음인데 그렇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딤후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을 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구원으로 구원에 이르는 두 차원이 이루어져야 그것이 참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이 두 차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자기의 믿음과 구원의 그 가치를 바로 알게 됩니다. 이해를 위하여 설명을 드리면, 저는 첫째 믿음은 거저 받은 믿음이기에 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거저 받은 믿음의 씨를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 판에 심어서 자기가 말씀과 은혜로 키워 열매를 맺는 그 열매를 저는 믿음의 열매라고 합니다. 바로 그 과정을 통하여 얻은 믿음의 열매를 확실하게 확보해 가는 자들만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 단지 거저 받은 믿음의 씨만을 가지고 만족 해 하고, 그 다음 단계로 가지 않으면, 열매가 없는 씨가 되는데 결국 받은 믿음의 씨에서 열매가 없다면, 단지 씨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믿음의 씨를 받았으면 그때부터 농부들처럼, 매일 추수할 때까지, 정신없이 보살피고 보살피면서 땀 흘려 보살피면서 가을에 추수하게 되듯이, 그 과정을 통한 수확이 있어야 그 믿음의 씨의 가치를 알게 되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때가 있다고 하여서, 받은 믿음의 씨를 그냥 갖고만 있으면 그 열매가 저절로 그 씨의 열매를 맺어 수확하게 해 주던가요? 아닙니다. 믿음으로 믿음이, 구원이 구원으로 이르게 되듯이 계속해서 보살피고 보살피면서 땀 흘려 보살피면서 애를 써 가야 합니다. 심은 씨에게는 적절한 계속적인 단비와 햇볕이 필요하듯이 믿음의 씨도 늘 은혜의 단비와 은혜의 햇볕이 항상 같이 가야지만 가을에 수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갈6:9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런데 때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세상의 허망한 일에만 집중합니다. 그것은 거저 받은 복된 믿음의 씨를 장롱 속에 깊이 감추어 둔, 미련한 자와 같은 것입니다. 주신 때를 자기가 무식하고 무지하여 포기하면서 숨겨두므로 어떤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어떤 책망을 받았는지 알지요? 

마25:14-30입니다. 달란트를 각각 주셨는데 다른 두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수확으로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냥 감추어주었다가 다 빼앗기고 망합니다. 씨를 심은 당시에는 아무 활동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면서 서서히 변화되는 씨를 보게 됩니다. 심은 당시에는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지만, 그러나 실은 내내 농부의 수고로 심겨진 씨앗이 터져서 뿌리를 내리게 되고 줄기와 잎을 자라게 하여 가을에 얻게 되는 수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자꾸 부인합니다. 단지 때라는 말로 말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충만하게 내리고 있지만, 자기가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거부하여 늘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지, 은혜의 때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고후6:1-2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때가 있다는 맞지 않는 말로, 주시는 은혜를 외면하게 하고, 피하도록 그 여지를 만들어 주시려고 합니까? 말씀이 싫어서 도망가는 어리석은 자들을 일깨워 더 이상 도망치도록 못하도록 도와줘야지, 이미 온 때를, 때가 있다고 속여서 다들 방심하게 만들어 놓으려고 합니까? 때는 이미 왔습니다. 이제 믿음의 씨를 마음 판에 심어서 말씀을 주고 은혜의 햇볕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각자가 힘껏 보살피면서 가을에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한 수확의 때는 기다려야 하지만, 믿음의 씨는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 믿음의 씨는 이미 2000년 전에 다 주신 것입니다.


그 씨를 받을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에 때가 있어야 믿게 된다는 흉악한 그런 말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면 그 믿음의 씨를 자기의 마음 판에 심어서 말씀으로 키우고 은혜의 햇볕을 받아서 나름대로 믿음의 열매를 맺을 때, 바로 고후13:5의 말씀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신 그 말씀처럼 그 확증이 자기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받은 믿음의 씨만으로는 믿음을 모릅니다. 그 믿음의 열매를 온갖 세상의 유혹과 미혹을 이겨내면서 그리고 동시에 거친 신앙의 훈련과 깊어가는 깨달음 속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기에, 그래서 이젠 열매를 맺기 위한 수고와 땀 흘림 속에서의 맺을 때만이 있지, 믿음의 씨를 받을 때가 있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복음을 들을 때이지, 듣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고후6:1-2 에서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음의 열매를 맺어가는 때만이 있지, 듣지 않아도 되는 때가 없습니다. 바른 복음의 말씀을 늘 듣고 들으면서 그 믿음의 씨가 자라 믿음의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믿음의 가치를 알게 되고 그 과정이 반복이 되면서 점점 신앙이 깊어가야 됩니다. 깊어가면서 미치도록 좋아하던 세상의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능력과 함께 사랑의 삶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믿음을 주신 이유입니다. 깊은 영적인 경험을 해 나아가게 되는 그 성도들만이 주시겠다는 신28:1-14의 약속의 복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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