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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10212018 신명기 29:18-29 본문
제목: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
저는 오늘, 구소련의 체르노빌 사건으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과 놀라울 정도로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체르노빌 사건은 한 사람의 방심과 실수와 설마가 만든 참담 그 자체임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최악의 사고가 1986년 4월 26일에 일어났는데, 벌써 32년이 지났습니다. 그 터진 경우를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사고는 관리자가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일어났다고 합니다. 20초 동안의 원자로 정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7초 후 520종의 위험한 8 ton가량의 방사선 동위물질들이 대량으로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원자로 폭발사고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린피스라는 사람은 당시 체르노빌 핵 참사 사건 20주기를 맞아 인접 3개국은 물론이고 유럽 전역의 보건학 및 의학전문가 6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건강피해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The Chernobyl Catastrophe – Consequences on Human Health)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이 70년간 지속되어 벨로루스에서만 모두 21,420명이, 주변 다른 나라에서는 71,660명이 사망하여 모두 93,080명이 사망한다고 내다봤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질병은 갑상선암인데 그 발생은 2056년까지 모두 137,000건이, 유방암 등 고혈압은 123,000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의 방심과 설마가 빚은 사고입니다.
악몽(惡夢)그 이상의 사고가 일어난 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00년에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체르노빌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다. 체르노빌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 알 수 없는 근심 걱정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사건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체르노빌이 이제는 안전한 과거 속의 사건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직 이 비극이 잊혀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체르노빌을 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체르노빌과 같은 기술참사 그리고 환경참사의 사고 재발 가능성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 7백만 명 이상의 우리 이웃이 이 사건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때에 발생한 사건으로 지금도 고통 속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체르노빌은 현재 우리에게는 물론 앞으로 여러 세대 동안 잊혀 지기 힘든 이름이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의 말씀과 깊은 연관이 되어 있어서 먼저 체르노빌의 원자 사고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체르노빌 사건을 말씀 중에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저는 이런 연관성을 찾았습니다. 너희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니 복된 나의 자녀들이기에 하나님께선 언약과 맹세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약하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믿고 따르라고 간절한 아비의 마음으로 언약과 맹세를 해 주셨는데,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반하고 외면하고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너희들이 나의 그 한없는 은혜를 입고서도 나를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가만 놔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쏟아 부어버리고 말겠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이런 뜻도 들어 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시고 맹세까지 하신 후에, 그렇게 내내 인간의 눈높이에서, 그 언약을 이루어 주시고야 말 것인데, 그리고 말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나를 외면하고 다른 신으로 가 버린다면, 어떻게 이렇게 막되 먹을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속상함이 오늘의 말씀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특히 18-19절의 말씀을 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찌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너희들에게 독초와 쑥과 같은 뿌리가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나는 아무 상관없다. 나만 편하면 돼! 라고 하는 자들이 생기는데, 바로 그런 자들을 어떻게 조치하실 것인지를 20-21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20-21절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다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그런 놈들은 구별하여 찾아내서 박살을 내고야 만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의 말씀, 분노하시겠다는 말씀에 대하여 방심하고 설마 나에게 일어날까? 나는 아니야 하면서 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경계와 긴장을 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바로 그런 자들에게, 체르노빌의 당시 책임자의 방심과 설마가 비참, 처참, 통곡하게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도 나는 아니야, 하면서, 방심과 설마로 판단하면, 바로 그런 자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이 쏟아지고야, 터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방심하고 있던가요? 진노에 대하여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기에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모르시는 분들은 바로 체르노빌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특히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다 방심하는 자요,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들인데 바로 신29:18-19의 그런 사람의 상태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저주의 그 틀 속에 속하게 된다는 것인데, 긴장이 지금도 안 되고 있지요?
왜 긴장이 안 될까요? (1)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던지, 아니면 (2)말씀에 대하여 여전히 생각 없이 사는 그런 어른이던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애를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써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방심하고 설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창19:1-17의 말씀을 보세요! 믿지 않아요! 거짓말로 여기고 농담으로 여기고 그래서 지체하게 되지요! 그러나 보세요! 창19:24-28입니다. 롯의 아내가 설마하고 뒤 돌아 보았다가 결국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나중에는 아내가 없는 아비 롯에게 두 딸이 동침하여 두 민족인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을 이루게 됩니다.
제발 농담으로 여기지 마시고 설마로 여기지 마세요! 분노의 불이 쏟아지고 맙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분노하십니다.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신 언약을 이루셔서 서로의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시려고, 그래서 늘 그렇게 보살피고 지도하시면서 온갖 정성을 다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을 받게 되시기를 그렇게 바라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방심하면서 멋대로 살면,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내 자식들이 죽은 다른 신에게로 떠나버리는데, 아니 어떻게 죽은 신,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말도 못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타락한 사람이 만든 물건을 하나님 대신 신으로 믿는데, 어떻게 좋게 이야기를 합니까? 특히 헛된 세상의 것들을 가지려고 다른 신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 무시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지독하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쉬운 이야기로 혼인을 했는데, 최소한 배우자 보다 훨씬 난, 상대를 데리고 와서 이혼하자고 해도, 그래도 속상하고 미쳐 버리는게 우리들인데. 자기 배우자보다 완전 부족한 자, 또는 원수 된 자를 데리고 와서 배우자와 이혼하자고 하면, 더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립니다. 자! 우리 하나님은 누구시던가요? 최고라고도 할 수 없는 최고이십니다. 더 이상 설명이 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무엇하고도 전혀 비교와 상대가 될 수 없는 분이신데, 아니 어떻게 그분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전혀 상대가 될 수 없는 우상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린 우상의 기준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우상을 따라간다는 뜻은 돌과 나무로 만든 그런 우상과 귀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가는 것도 우상이고 돈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도 우상이고 심지어 탐심도 우상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실은 자기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우상을 믿지 않으니까! 상관없어가 아닙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도 다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자기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면, 오늘의 이 무서운 말씀을 보시면서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고 여전히 멋대로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괜찮아’ 특별한 초능력자처럼 스스로 다 무마하고 해결할 수 있어! 한다면, 그것이 영화처럼 다 해결이 되고 무마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 어떻게 분노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실까요? 그냥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상관없이 가만히만 계셔도, 역시나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왜요? 왜 가만히 있는데도, 분노하세요? 인격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의 간절하신 바람과 소망은 서로가 알아가는 관계가 되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 세상과 전혀 차원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능력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여서, 너희들이 복을 받아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기 때문에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그랬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과 맹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는 언약과 맹세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과 맹세를 통하여 분명히 알아야 되는 점이, 믿음의 씨를 받은 자녀라면 믿음의 열매를 맺는 힘과 능력과 지혜가 있는 너희들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을 받게 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단지 힘과 능력으로 군림하시는 그런 악한 세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 언약과 맹세로 이루어진 그 구원을 너희들이 확인하게 되면, 이젠, 허망한 세상을 그렇게 죽기 살기로 따르던 너희 자신들도 하나님의 그 언약과 맹세로 인하여 이젠, ‘나는 하나님밖에 몰라!’ 로 삶의 방향이 확! 180도 돌아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적지 않은 다수가 언약과 맹세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만을 따르지 아니하고 허망한 것을 좋아하고, 헛된 세상의 것을 여전히 구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기도 해 줘도 좋아합니다. 귀신들의 세력이 너를 기독교인이구나! 라고 인정만 해도 좋아합니다. 그러니 분별할 줄 모르고 방황하고, 무지하여 자신의 간악함도 모르고 있는 그런 자녀들을 보고, 당연히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오늘의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은 포기 차원이 아닙니다. 너무나 슬프다는 뜻입니다.
본문으로 신29:24로 갑니다.
왜 하나님이 분노하실까요? 단지 규칙의 위반 문제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입니다. 인격의 관계에서의 배반으로 인한, 깊고 깊은 슬픔차원에서 분노입니다. 그런데 우린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자꾸 신앙을, 하나님의 하고의 그 관계를 전혀 몰라, 단지 규칙과 법의 문제 정도로만 아주 가볍게 여깁니다. 단지 신앙의 타락을 서류에 쓰다가 틀린 오자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주일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미워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성경을 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 미안해요! 정도일 뿐입니다. 아주 쉽게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신 은혜요, 어떻게 이루신 구원이신데, 어떻게 내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심각한 고통 속에서 최소한 금식하고 심히 아파하듯이 아파할 수 있어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29:18-19의 그런 사람처럼, 그래 나를 죽이려면 죽여 봐! 나는 상관없어! 나만 편하면 돼! 그런 식으로 그렇게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고 있으면 정말 큰일이 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타락에 대하여, 단지 교통위반정도로만 여기고, 벌금을 내는 정도로 여기면 재앙이 덮치게 됩니다. 하나님하고의 그 놀라운 관계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의 깊은 관계, 신뢰가 있는 특별한 관계에서는 서로의 오해가 생기면 그렇게 쉽게 물질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요? 그런데 쉽게여기고 마니까, 인격의 관계를 개 무시하니까, 그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의 우리의 관계는 물질적인 관계가 절대로 아닙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보세요! 서로가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있었잖아요! 요나단과의 약속을 요나단이 죽은 후에도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서로의 약속을 지켜내고 있었잖아요!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 다윗의 식탁에 앉혀서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던가요? 먼저 두 사람 관계에서의 약속과 신뢰를 봅니다. 삼상20:33-42입니다.
그리고 그 후, 요나단이 죽은 후 다윗을 봅니다. 삼하9:1-13입니다. 바로 요나단과의 깊은 신뢰, 그 관계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이 죽었지만, 그 신뢰는 이렇게 유지(有志)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얼마나 쉽게 여기고 있던가요? 쉽게 여기고 있기에 쉽게 깨뜨리고 있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자기 배우자가 배반해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하고의 그 신뢰, 관계는 함부로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럴 수 없잖아요! 결코 값싼 관계가 아니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분노와 질투의 불을 쏟아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노하시는데 하나님의 목회자들이 창기 된 성도들을 보면서, 웃으면서, 편한 마음으로 대하여 주고요? 말이 되요? 하나님의 사람을 훔쳐갈 작정입니까? 압살롬처럼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여 다윗의 백성의 마음을 훔쳤던 그리고 뒤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2. 특히 신29:19의 말씀을 다시 보세요!
우상숭배는 저주야! 절대로 우상숭배하면 안 돼! 라고 하시는데,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자신은 정작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하면, 그래 죽이려면 죽여라! 나는 당신하고 아무 상관없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평안할거야! 나는 인생을 말씀과 상관없이 즐길 거야! 한다면, 그 놈이야 말로 박살을 내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렘6:9-15, 렘8:8-12, 렘9:7-9을 봅니다. 분노와 질투의 불을 그 놈 위에 붓게 하고 이 책에 약속한 모든 저주를 더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참 무서운 말씀이지 않던가요?
이런 말씀을 보고 듣고도 우상 숭배, 하나님 말고, 세상의 돈과 즐거움과 탐식, 탐욕으로 향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면,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붓게 하신다는데, 이를 믿는다면, 어떻게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상관없어! 그냥 세상의 것으로 즐길 거야! 말이 됩니까? 하나님의 분노를 믿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를 전혀 믿지 않고 있기에 여전히 헛된 것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전 무시하는 자는, 겁이 전혀 없는 방자함이 끝이 없는 자입니다. 최소한 두려워하지도 못하는 그들은 문둥병에 걸린 자로서 저주 그 자체입니다. 그런 자들하고는 근처도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재미있게 보이거든요! 예전에 학교에서 땡땡이치던 자들을 부러워했듯이, 그런 막 되 먹은 자들을 오히려 참 신앙인보다 더 부러워하는 어리석기가 끝이 없는 그런 자들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기에 이렇게 망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전 무시하고 있는 그런 인간들 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늘 제가 드린 말씀입니다. 오늘도 또 생각이 나는데, 최소한 두려워하자! 그리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습관을 들이자!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실천으로 이어지면서, 성령의 열매를 낳은 복된 길이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린 성령의 뜻을 따라서 심어 영생의 열매를 낳아야 합니다. 자기 육체대로 심으면, 썩을 것을 낳을 뿐입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따르는 삶을 저주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체를 따르는 삶을 복과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니 언제까지 그럴 작정입니까? 성도라면, 믿음의 씨앗을 받은 자라면, 작은 죄에 영적인 아픔을, 주님의 그 십자가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저도 육신의 것을 버릴 수 없어서, 하지 말아야 되는 말을 해 버리는 바람에 그때마다 금식을 하는 편인데, 금식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다시는 그런 막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 자신을 괴롭게 하고 있으니 이 고통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더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기어서라도 따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식으로 따라가다가 보면, 점점 나아지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자신이 멋대로 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망합니다. 박살이 납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이 쏟아집니다. 나의 숨겨진 죄, 뿌리가 깊이 박힌 더러운 죄를 밝혀주는 자에게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기록해 주셨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빌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히13:17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특히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암 덩어리보다 무서운 죄의 뿌리들을 보여주실 때, 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막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성도된 너희들이 꼭 지켜내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임을 29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금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똥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 어떻게 금이 똥처럼 냄새를 풍길 수 있어요? 똥보다 더러운 죄를 씻어내면서 금의 그 실체, 가치를 드러내셔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쉬운 길이 아닙니다. 고통 그 자체의 길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감정으로 갈 수 없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다가 보면, 자식을 잃을 수도 있고, 전 재산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가족과 부모하고도 관계를 끊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방해가 되는 것들이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29:18의 말씀처럼, 신앙의 방해가 되는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여 자신 몸 안에 믿음의 씨앗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독초와 쑥의 뿌리가 생기면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에도 개의치 않게 되고 오히려 마음대로 하시요! 나는 당신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내 뜻대로 살면서 즐거워 할 것이라는 무서운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소련의 방사능 사건이 일어난 체르노빌이 될 것입니다. 왜요? 헛된 세상의 것들을 즐거워하다가 독초와 쑥의 뿌리가 마음 판에 박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도 자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즐기려는 자들의 마음 판에서 깊게 강하게 자라게 되는데, 그 자람이 독초와 쑥의 뿌리처럼 마음 판에 완전하게 박혀버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죄, 우상숭배를 독초와 쑥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따라가는 자들의 그 죄를 완전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되기에, 죄를 상징하는 독초와 쑥의 뿌리를 뽑아내는 해결방법이 완전 뒤엎어버리는 수밖에 없기에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쏟아버리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죄의 특성과 다름이 없는 독초와 쑥의 뿌리도 얼마나 질기도 깊은지, 결국 그 죄성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성경만이 아니라 우린 체르노빌 사건으로도 확인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린 늘 1980년에 일어난 소련의 체르노빌 사건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방심과 방관으로 인한 핵의 노출은 그 지역을 쑥대밭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체르노빌이라는 뜻이 공교롭게도 쑥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쑥의 근성, 사라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뿌리를 깊게 넓게 하여 제거 되지 않는 속성이 죄의 속성과 비슷합니다. 결국 쑥과 같은 죄, 바로 죄의 속성을 가진 쑥의 체르노빌이 인간의 죄 성으로, 그 정도야 뭐! 하면서 방심하고 방관한 실수로 전체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무도 살 수 없고 단지 짐승, 늑대들이 무리지어서 돌아다닌다고 얼마 전에 뉴스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특히 우리들이 지닌 죄와 싸우지 않고, 방심하거나 내버려두면 그 죄의 뿌리는 박히고 박혀서 독초와 쑥의 뿌리처럼 되어, 결국은 질기고 강력한 죄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분노가 이렇게 쏟아 부어져야 되는데, 제 2의 체르노빌을 보기 원하십니까? 체르노빌에 있던 세상의 힘인 핵발전소가 노출되면서 나타난 결과는 오늘 말씀을 방불케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기준대로 자기감정대로 세상을 따라가면 그 결과는 쑥이란 이름을 가진 체르노빌을 보라! 는 것입니다. 자기의 식은 저주다! 이 진리를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죄를 상징하던 세상의 핵 원자로, 그 핵발전소를 세상의 힘으로 믿고 살아가던 세상 사람들이, 성경이 이해가 아니 되시면, 체르노빌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그리고 회개를 하자는 것입니다. 죄는 확인이 되면 그 즉시로 확 잡아 뽑아내지 않으면 큰일이 납니다. 주변의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넓게 그리고 깊이 강력하게 땅 속으로 박히듯이 죄도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기는 아세요? 확산 속도가 대단합니다. 쫘 악! 퍼지고 말지요! 쑥대밭이 되지 않던가요? 그리고 내내 쑥의 자리를 다른 풀에게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쑥을 원하지 않는다면 즉시 뽑아내야 합니다. 죄는 더합니다. 특히 우리의 욕심, 탐심, 정욕, 자랑, 이기심, 거짓말, 미움, 불평, 근심, 시기 질투의 죄악은 죽어야지만 사라질 것입니다.
호흡하고 있는 내내 이 죄악의 뿌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늘 방해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습관을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하루 최소한 30분 말씀보고 30분 기도가 하루의 삶의 필수가 되지 않으면, 믿음의 열매를 낳지 못하게 되면서 그 대신에, 그 반대로 자신의 더러운 죄의 뿌리는 독초와 쑥처럼 마음 판에 깊이 아주 깊이 강력하게 박히고 박혀서 제 2의 체르노빌 사건이 터질 수도 있음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살길은 오직 돈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시119:49-56입니다. 물론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살지 말고 말씀이 힘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돈과 세상의 즐거움보다 말씀을 더욱 우선시 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모든 것을 다 잃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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