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Eli
- 산돌한인교회
- 홉니와 비느하스
- Philistines
- 1 Samuel
- Living Stone Korean Church
- 자기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삼손
- 보아스
- 사울
- 룻기 1
- 룻
- 1 Samuel 2
- 엘리
- David
- Ruth 2
- Judges
- Hophni and Phinehas
- Samson
- 사무엘
- 다윗
- saul
- 나오미
- Samuel
- They Did Which Was Right In Their Eyes
- Ruth 1
- Naomi
- 사사기
- 사무엘상 2
- Ruth
- Today
- Total
산돌교회
04/19/2020 - 사무엘상 5:1-12 본문
말씀: 삼상5:1-12
제목: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삼상 5장은 전혀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렵지 않으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의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먼저 아스돗에서의 사건을 봅니다. 하나님의 궤를 그들이 자신들이 믿던 신 다곤 곁에 두었는데, 다곤이 넘어져 다곤의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하면서 다곤을 세웠고 돌아간 다음에 그 다음 날에 들어가 보니, 다곤의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고 게다가 이젠, 다곤의 머리와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놓여 있었고 신당 안에 다곤의 몸뚱이만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정도가 되면 사실은 항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항복할 믿음이 없기에 기대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아스돗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독종이 퍼져서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자신들과 다곤을 쳤다고 하면서 날리치자, 방백들이 모여 고민합니다. 그런데 역시 항복하고 이스라엘로 돌려주자가 아니라, 그들이 내린 결정이 가드라는 지역으로 언약궤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손이 다시 독종으로 쳐서 심한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역시나 항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감히 에그론으로 또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해법과 방법을 찾으려는 인간적인 속셈입니다. 이 재앙이 어떤 우연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그론 사람들은 잘 듣고 있다가, 우리들을 하나님의 신의 심판으로 죽이려고 하느냐 하면서 반기를 둡니다. 그러자, 그때, 블레셋 방백들이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내자고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린 당시에는 이미 블레셋 지역은 초토화되고 맙니다. 돌려보내기로 결정한 당시 블레셋의 상태는, 단지 독종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성도된 우린 오늘도 보았고 예전에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참담한 사건을 하나님을 믿고 있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교인들이, 자신들도 이런 저주를 동일하게 당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처럼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두렵습니다. 두려울 뿐만이 아니라 블레셋처럼 그런 동일한 방응을 보이기에 이 말씀이 어려운 말씀인가? 라는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 나름대로 어떤 인간적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독종이 지역적인 문제인 줄로 착각하여 무식하게도 하나님의 궤를 이리저리 옮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블레셋으로서는 그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아니 어떻게 교회를 다닌다는 교인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동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무슨 뜻입니까? 당시 블레셋 지역에 생긴 독종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몰라서 생긴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독종을 연구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의 말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선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말씀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도 일하는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어떤 사람에게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증세가 나타나자, 병원으로 이송이 되면서, 무엇을 했다고 하던가요? 코로나 바이러스 19를 연구 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니 평생 교회를 다닌 집사라는 분이 그럴 수 있을까요? ~ 아니 독종을 연구하면 해결이 됩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을 알고 회개를 해야 해결이 되는데, 일주일 내내 생명의 말씀을 골방에서 보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거룩한 수고, 살길인 그 말씀을 즐겨야 되는데, 교회 집사라는 분이 말씀을 들고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19를 알아야 지만, 해결이 되는 것처럼 혼자만 안전하려고 또는 자기만 살아남으려고 골방에서 바이러스에 대해서만 공부를 했다는 것이 아닙니까?~이럴 수가~ 집사님이 블레셋 인들과 무엇이 달라요? 동일하잖아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만이 아니라 교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몰라도 말씀을 너무나 모릅니다. 이렇게 무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말씀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힘으로 빼앗으면 자기의 것이 됩니다. 노예가 그렇고 전리품이 그렇습니다. 특히 돈으로 사면 자기의 것이 되는데 돈으로 사도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한 예로 이 도령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춘향이의 타협하지 않는 정결한 마음입니다. 일편단심입니다. 세상에 빠진 더러운 마음, 거짓말과 욕심으로 찬 인간들은 세상의 힘과 능력에 팔리지만, 깨끗한 마음, 정결한 마음, 지조를 가지고 배반하지 않는 마음은
거래가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어떤 개나 고양이들도 보면, 주인이 오기 전에는 먹는 것도 포기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짐승이 더러운 마음을 가진 썩어버린 인간보다 낫습니다. 그 개나 고양이들은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그 상처 때문과 그리움 때문에 굶어 죽는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능력에 빠진 버려진 자들은 어떤가요? 욕심, 이기심, 자존심 때문에 선을 악으로 갚습니다. 배반하지만 배반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감사하는 조건도 보면, 언제나 손해 보지 않을 때, 감사하고,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감추었던 옛사람이 나타나서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다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도 죽음도 구원도 믿음도 은혜도 의리도 살 수 없습니다. 빼앗아도 안 되는 이 힘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이 더러운 세상 안에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과 재물이 통하는 그런 세상일지라도 결국 힘과 재물로 통용이 안 되는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힘과 재물에도 그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보세요! 힘으로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이 빼앗아 버렸지만 자기의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힘으로 살지 마라!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길이요 방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재주나 어떤 그런 능력 차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오직 주님의 길과 방법만을 따르려는 정결하고 정직하고 따뜻하고 의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우린 믿음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던가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쓰는 더러운 무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 어떤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믿음이 아니라 착각입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자가 된 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을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버렸지만, 그러나 그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무슨 일이 생기던가요? 다 망합니다. 병들어 죽습니다. 즉 말씀, 또는 믿음을 잘못 알고 사용하면 그 결과는 오늘 삼상5장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확인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도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끝까지 자기 옳은 대로 그릇갈 수 있습니까? 말씀을 모르다가 보니까, 말씀을 사사로이 풀다가 보니까, 결국은 외출도 못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학교까지도 shut down 해야 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블레셋처럼 이스라엘처럼 언약궤만으로 승리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치성으로 빌면 되고, 부적을 가지면 뭔가가 되는 것 같은 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런 종교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지체들 간의 관계가 최우선입니다. 가족처럼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그 관계가 부부처럼, 부모자식처럼, 죽마고우처럼 스승과 제자처럼, 그래서 아무나 그 안으로 쑥~들어올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하는 관계입니다. 아무도 그 안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교회 지체들하고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특히 그 관계는 목적이 오직 한 가지입니다. 거룩함입니다. 점과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다 맡겨버린 삶입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여 세상에서 인격을 무시당하므로 받는 상처와 그래서 관계가 깨어지는 일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교회는 회복과 세움이 이루어집니다. 아니 설령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로 오히려 더 깊어지고 강해지는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거룩한 역할에 있지, 세상에서의 승리와 성공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삼상5장의 말씀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고 빼앗겼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상시에 자기의 역할을 말씀 안에서 말씀을 얼마나 순종했느냐? 이것이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말씀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죽을 뻔 했었느냐? 순종이 안 되어 얼마나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기어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에게 나아갔느냐? 이것입니다.
성도라면 수입이 많아져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어서, 원하는 사람하고 혼인을 하게 되어 그래서 좋아하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깨달아서, 순종했더니 마치 히말라야 산을 정복한 그 산악인들의 기쁨처럼, 히말라야보다 더 높았던 자기의 옛 악한 세력을 정복한 그 기쁨, 큰 폭풍과 토네이도보다 더 강한 자존심, 이기심, 욕심과 게으름, 열등감 등 그런 악한 세력을 믿음으로 제압하므로 그래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다수가 알고 있는 그런 믿음, 하나님의 궤만 있으면 된다는 그 믿음은 코로나 바이러스 19만이 나타나게 되고 ‘이가봇’만을 낳습니다. 순종해야 되는 성도, 좁은 길을 가야 되는 성도들은 늘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끝까지 서로 참아내야 합니다. 당장 좋다고 하여 좋아하고 싫다고 하여 당장 싫어하는 그런 존재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삼상 5장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 존재 자체가 너무나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실체가 너무나 감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이 되다보니까, 바로 무너지고 맙니다. 견디지를 못합니다. 듣기 싫으면 바로 외면하게 됩니다. 자기를 짐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스스로 저주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늘 자기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키려고 하면, 마치 감옥에 갇힌 자처럼 느껴지는 법입니다. 왜요? 죄로 굳어진, 아니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래서 더럽게 악하게 살아온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순종과 좁은 길은 자기의 길과 자기의 자리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감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견디지 못하고 항상 도망하게 됩니다.
다시 끌고 오면 세상으로부터 항복하지 못하고 오직 도망칠 생각에 아무 것도 못하고 결국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맙니다. 그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우린 결국 자기의 굳어져 있던 더러운 옛 길과 냄새나는 세상의 자리를 내려놓게 되면서, 서서히 주신 새로운 복된 길과 영광의 자리를 확보하게 되는데, 이해가 되세요? 그걸 못하면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고 빼앗아봐야 그 언약궤를 둘 곳이 없으니, 당연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실 수 있어야 하는데 모시지 못하니까, 당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처럼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언약궤를 모실 수 있는 자로써 역할을 감당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삼상4-5장에서 그 결과를 또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의 자리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을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십자가 사건으로, 이젠, 모실 수 있는 그 믿음의 자리를 각 성도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닙니까? 독종으로 하늘의 사무치는 부르짖음만이 있던 그 참담한 현실을 우리들에게 자유와 평강을 넘치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까?~
거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믿음의 터전을 주신 것입니다. 부모님이 땅 수백 평을 강남 쪽에, 아니 강남이 아니더라도 수원이나 안양 그런 변두리에 유산으로 남겨주셔도 좋아서 정신이 나가고 마는데,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모실 수 있는 곳을, 우리 마음 안에게 영원히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그 가치가 그 기쁨이 어찌 땅 한 평 보다 못한 가치요 기쁨이 되지 못할 수 있단 말이니까?~’ 말이 됩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분이 함께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임마누엘 하나님을 시어머니처럼 여길 수 있을까요? 아니 아주 외면하고 있습니다. 내쫓아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아닙니까?~ 나를 살리고 자유와 평강을 주신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않으면서, 내쳐버리고 있다면, 그 성도는 인간 백정입니다. 인간 백정이 되고 싶습니까? 그 큰 은혜를 입었는데, 꼭 이런 질타를 받아야지만 합니까? 안 됩니다. 그 결과가 너무나 무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내일은 상급이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신 자의 성전된 그 가치는, 그분을 모신 자로써의 역할을 감당할 때에만 나타납니다. 멋대로 살면 큰일 납니다. 그러나 그분하고 동행하려고 하면, 대단한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은혜를 끼치는 자가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가치가 얼마나 무한한지, 오른 뺨을 때려도 왼쪽을 돌려댑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게 됩니다. 자기의 약함까지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절로, 자연스럽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끝까지 몸부림을 쳐야 됩니다. 그 싸움이 어렵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목말라 미쳐버리겠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냉수가 곁에 없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냉수를 놓고도, 먹으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식입니다. 이 인내를 감당하셔야 하고 유혹을 이겨내야 되는 싸움을 항상 해야 하기에, 믿음을 지키기란 피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바로 앞에 진수성찬을 두고도 먹지 못하는 식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세상이 그렇게 달콤하고 먹금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탐스럽기까지 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실패하는 이유가 세상의 것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먹으면 안 되는 선악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믿음으로 참고 조금만 기다린다면, 그 결과는 시4:7입니다.
7. |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
시128편입니다.
1.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2. |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
3. |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
4.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
5. |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
6. |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
그래서 이 복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복을 누리고, 세상의 힘과 능력을 넉넉히 이길 수 있고, 특히 임마누엘, 성령 하나님하고 동행하는 복된 영생, 그리고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관계, 가족관계보다 더 한 관계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힘들다고 포기하고 있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막대한 손해가 옵니다. 삼상5장에서의 그런 재앙이 옵니다.
세상의 것이 너무나 좋아서 항복하기 싫다고 하여, 인격의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마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행할 수 있게 합니다. 못하겠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가봇’을 낳고, 믿음을 붙들지 않으므로, 믿음의 권한을 쓰지 아니하여 이스라엘과 블레셋처럼 당하고 싶으십니까? 아니 더 당할텐데, 그 다음에 항복하시려고 합니까? 끝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을 기대했다가는 버려집니다. 눅18:8인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보이는 먹어서는 안 되는 탐스럽고 보암직스러운 먹금직스러운 세상의 세력들을 제압하려면, 매일 피 흘리는 경건의 훈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은, 또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배불러서 너무나 넉넉해서입니다. 아니면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괜찮다고 하여 괜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상 4장과 5장을 보세요! 다들 괜찮을 것이라고 오판을 했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망합니다. 당합니다. 다 빼앗기고 맙니다. 그렇게 되고 나서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신이 되고 싶으세요? 아니면, 미리 그렇게 되지 아니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고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말씀을 선포하고 즐거워하고 묵상하고 주의하며 잊지 아니하면서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진정한 승리와 기쁨의 내일을 준비하시는 현실이 되셔야, 할까요? 지금 여러분들의 나이를 보세요!
어느 사이에 중년이, 어느 사이에 노년이, 어느 사이에 주름이 가득할 것입니다. 늙으면 하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날이 누구든지 곧 오는데, 아니 그런 백발이 지신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큰 오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오늘도 성경은 무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발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만이 아니라 모두가 당합니다. 특히 불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고모라와 소돔을 잊지 마세요! 그러나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시던가요?
주님께서 고모라와 소돔 그리고 두로와 시돈에 가서 그 능력을 너희들에게 하는 것처럼 전했다면 이미 그들은 재를 뿌리면서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마11:20-24, 눅11:12-14입니다.
마태복음 11:20-24
20. |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
21.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22.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23. |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
24.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1:12-14
12. |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
13.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14. |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성령을 받은 우린 성령을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믿음이 나아도 훨씬 나아야 되는데, 정말 무엇이 그들보다 나은 것이 있던가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령을 우리들에게처럼 보내주셨더라면, 망했을까요? 망하기는커녕 회개를 하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린 무엇을 드리고 있나요? 헛된 세상의 것들을 더 갖지 못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용만 하려고 새벽마다, 금요철야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어떤 날이 임할까요?
코로나 바이러스 19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그 어떤 것이 우리 모두를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할 것입니다. 감이 잡히지 아니하신다면, 전기 공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 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얼마 못가서 다들 머리 풀고 장미꽃을 꽂고 히죽히죽 그렇게 웃으면서 돌아다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실일진데, 그렇다면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죽는 것이 복입니다.
전기도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날이 왔는데, ‘돈돈돈’ 하던 자들, 그 돈을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왔는데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고 또는 탈 수도 없는 최고의 차를 garage에 두고, 또는 전기도 없는 좋은 집에서 온갖 폼을 잡고 큰 소리를 쳐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젠, 아주 위험한 내일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일이 그렇다면, 아니 그럴 것인데,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일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03/2020 - 사무엘상 7:1-17 (6) | 2020.05.04 |
---|---|
04/26/2020 - 사무엘상 6:1-21 (4) | 2020.04.28 |
04/12/2020 - 사무엘상 4:1-22 (7) | 2020.04.13 |
04/05/2020 - 사무엘상 3:1-21 (7) | 2020.04.06 |
03/29/2020 - 사무엘상 2:12-36 (4) | 2020.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