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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03/29/2020 - 사무엘상 2:12-36 본문
말씀: 삼상2:12-36
제목: 그 속에서의 사무엘
그 속에서의 사무엘이란 뜻은 완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의 사무엘이란 뜻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아브라함하고의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사무엘을 태어나게 하시고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속에서의 사무엘인가? 그 이유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완전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존재할 수 없는 곳, 현실이 완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곳에 사무엘을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난 당시 자신의 가정환경과 그리고 자신이 드려진 당시 성막의 상태를 보면, 어떤가요?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완전 혼돈하였고 공허하였고 흑암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과 한나가 자신들의 그런 조건 때문에 불평을 했었을까요? ~ 우린 어떤가요? 언제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나는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나는 왜 형편없는 조건인 흙 수저일까? 그래서 무엇을 소원합니까? 왕자나 공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끊이지 않습니다. 금수저이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권이라도 해 보게 됩니다. 즉 현실에서의 성공, 능력의 자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엇입니까?
현실은 사라지는 모든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곧 사라집니다. 그런데 다들, 곧 사라지고 마는 그 현실로 인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사라질 현실의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미련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보세요! 현실의 성공과 승리를 위한 사역이 아니잖아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구원을 이루시려고, 사라지고 마는 그 현실의 시간과 조건을 단지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때문에 현실의 만족을 위한 수고는 손으로 기름과 공기를 쥐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현실의 성공은 오직 생각이 없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들만이 바라는 성공입니다. 성도라면 사라지는 현실의 시간과 조건을 통하여 거룩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여전히 사라질 현실의 성공을 이루지 못하여 안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의 즐거움, 당장의 행복, 당장의 멋과 맛, 당장의 부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진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신앙은 당장에서의 벗어남이어야 합니다.
당장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세요! 조금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현실의 즐거움을 위하여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완전 무너진 그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꾼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준비되는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인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써 사역을 하게 되는데 그 사역은 결국,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들의 진정한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알리시려고 사무엘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 현실이 영원한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차원이었더라면, 즉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 현실이 영원한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차원이었다면, 인간들은 양심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연합하여 공동체를 작게는 가정을 아니 자기 자신을 지켜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잖아요!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즉 이 현실이 영원한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차원이었다면, 사무엘이 필요할까요? 아닐까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사라지기에 이 현실은 실체가 아니기에 그래서 사무엘을 그 안으로 보내셔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신앙인이라는 성도들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이 모든 것입니다. 즉 현실이라는 시간과 조건이 영원할 것이라는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믿고 있습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믿고 있는 자들은, 왜 사무엘이 태어나야 되는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현실만이 모든 것이라 현실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그들은 성막도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잘 알아서 하는 존재로 큰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다 괜찮은 사람으로 믿고 있는 그 자신들의 실체는 무엇이던가요? 현실의 성공과 즐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조금 후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지만, 엘리 제사장을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과 동일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현실의 성공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은, 사무엘도 예수님도 성경 말씀도 필요할 수 없습니다. 즉 현실의 성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있는 이유는 현실이 순간이라는 것과 자기가 죄인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일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히 웃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어주셨다는 복음이 정신 나간 이야기로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모르고 있기에 언제나 이 역사는 구약 당시나 지금과 같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현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헛된 성공, 헛된 즐거움을 구하고 찾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성공하려고 하고 즐거워하려고 하니, 스스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여전히 전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도 보세요! 그들이 자기가 하는 그 짓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알면 그럴까요? 그들에게 오직 현실의 만족만이 모든 것입니다.
오늘 순종하여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타락 정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두 아들이 무슨 짓을 하던가요? 구체적으로 봅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이라는 자들의 타락이 어떠했느냐 하면 12절에서는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17절에서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22절에서는 심지어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다고까지 그들의 죄악상을 일일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조치가 내려지게 됩니까?
2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죽이기로 뜻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는 27절에서 36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오셔서 구체적으로 어떤 재앙이 엘리 가정과 후손들에게 임하게 될 것인지를 친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경각심(警覺心)을 위하여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27-36절의 말씀입니다.
27. |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
28. |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
29. |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
30. |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
31. |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
32. |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
33. |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
34. |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
35. |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
36. | 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1. 점검하는 차원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2. 그럼, 이 재앙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3. 제사장들의 완전 타락과 사무엘의 준비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신앙(信仰)이란 무엇입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럼,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 현실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현실의 즐거움이, 즐거움이 아니고 현실은 사라지는 조건이요 공간과 시간이기에 이 사실을 모르면, 영원히 불 못인 지옥 속으로 버려지기에 우린 영원하신 하나님을 거저 받은 믿음을 가지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현실이 헛된 것임을 알기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아니 믿게 된 것인데,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 즉 자아(自我)가 중심이 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기준인 거 함과 진실함과 공평함을 자신의 삶의 내용과 목표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세요! 이들 직분이 거룩한 제사장이지만 그들의 신앙의 타락은 심각 그 이상이었습니다.
겁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신 12절의 말씀에 공감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심각하게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라는 거룩한 신분 안에 목회자, 장로, 안수 집사, 권사 그리고 평신도라는 이 거룩한 직분을 가지고 날마다 어떤 모습이던가요? 우리들도 정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불량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라는 무서운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너희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멸시하고 있다고 엘리와 두 아들이 받았던 심각한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기억하세요! 행9:4-5입니다.
4.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
5. |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슥2:8입니다.
8.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을 치르는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눈을 찔렀다면, 엘리 제사장 두아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들이 성도라는 거룩한 신분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봉사와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 다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산돌교회식구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산돌교회는 어느 교회 안에서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사명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 우리들이 ‘신앙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귀가 따갑도록 들으셨고, 귀에 못이 박혔을 정도로 박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주변의 교인들과 사람들이 도전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들이 현실에 빠져서 이 정도로 하고 있기에 안심할 뿐,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께 all in할 각오를 못하고 있다면, 엘리 제사장의 타락한 두 아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유심히 돌아보셔야 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기준과 무엇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문제 때문에 자신이 가슴을 치고, 탄식을 하며, 심히 슬퍼하실 수 있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 분별과 깨달음을 하지 못하신다면, 역시나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셔야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신앙과 믿음이 하나님의 자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점점 더,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대하여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시작은 예수의 제자들을 죽이고 감옥에 쳐 넣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어떤 고백을 시간이 가면서 하던가요? 주후 55년경의 기록한 고전15:9, 주후 62년경에 기록한 엡3:8, 주후 63-65년경에 기록한 딤전1:15의 말씀을 보세요!
고린도전서 15:9
9.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
에배소서 3:8
8.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디모데전서 1:15
15.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1)먼저 주후 55년경의 기록한 고전15:9입니다.
9.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
(2)주후 62년경에 기록한 엡3:8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3)주후 63-65년경에 기록한 딤전1:15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린도 전서의 기록은 바울이 AD 55년경이고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와 같이 바울이 제 1차 로마 감옥 생활 중이던 AD 61-62년경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AD 63년에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다시 AD 63-66년경에 디모데전서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2차 투옥과 함께 AD 67년경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안심하거나 방심한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더욱 자신을 낮추고, 더욱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보면서 이방인의 사도로써 거룩한 삶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바울의 거룩한 삶은 미련 그 자체이었습니다. 고후11:22-31의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22. |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
23. |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24.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25.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26.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27.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28. |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
29. |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
30. |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31. |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
그 고난 중에서도 조금도 흐뜨러짐도 없이 전적인 하나님 중심, 복음 중심, 교회 중심으로 현실을 포기하고 오직 내일을 준비했습니다. 고후5:1-7의 말씀도 보세요!
1.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
2. |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
3. |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
4. |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5. |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
6. |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
7.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
현실이 아닌 오직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준비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진리를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능력, 즉 섬김, 희생, 인내함으로 살다가 떠난 바울입니다. 이것이 경건이요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은 늘 점검하셔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기준과 원리가 있습니다. 설령 순례의 삶을 살고, 금식의 삶을 살고, 세상 사람들과 사귐을 피할 자라도 그것의 신앙의 근본, 시작, 원인이 바르지 않으면 신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한 후에 확증하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주여, 주여” 할 뿐, 그런 신앙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타내고자, 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려는 차원에서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후5:8-10입니다.
8.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
9. |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오직 주님하고 동행하는 것만이 신앙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하고 동행과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신앙이기에 당연히 자신을 낮추게 되고, 남을 세우게 되고 그래서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가 된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를 높이고 알리려는 차원에서의 신앙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즉 영원할 수 없는 이 현실의 성공만을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더 이상 속지 마시고 이웃을 존귀하게 여기셔서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는 미련한 현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럼, 엘리와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받은 그 무서운 재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을 받았다가도 순종하지 않으면 버리신다는 말씀인가? 물론 오늘의 말씀만을 보면, 구원을 변개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요10:28입니다.
28. |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절대로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저주를 내리시는 이유는 무슨 뜻인가? 먼저 히2:1-3과 10:28-29의 말씀을 봅니다.
1. |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
2. |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
3. |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28. |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
29. |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구약보다 신약의 심판이 분명히 더 무섭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 안에는 구원 포기가 아니라 거룩한 협박으로써, 부모가 자식의 교육을 위하여 매를 들어야 하듯이, 그 차원에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내린 저주는 포기차원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죄의 결과를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런 오해를 주시고 있는 말씀을 봅니다. 히6:1-6입니다.
1.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2.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
3.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4. |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
5.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6.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
마치 성도가 죄를 저지르면 기회가 없다는 식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거룩하신 협박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진행되고 있는 말씀을 보세요! 히6:7-12입니다.
7.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
8.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9.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
10. |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11.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12.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그렇습니다. 말씀하시듯이 다시 11-12절을 보세요!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래서 내리시는 저주입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히12:1-13입니다.
1.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
2.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3.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
4.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5.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6.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7.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8.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9. |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
10. |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11.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
12.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13.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
자녀들의 징계는 회복과 세우기 위함입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구원이 취소될 수 있었다면 인내로써 경주를 하고,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낙심하지 말라, 끝까지 구원을 이루라, 믿음과 화합하라, 강팍케 하지 말라,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멜기세덱에 대한 말씀 등 이런 구체적인 말씀들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변개할 수 없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더욱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거룩한 몸부림을 치시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 주셨지만, 성화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열심으로 각 지체, 한 영혼도 빠짐없이 모두를 인도하시고 계시기에,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원 없이 세상의 악한 세력, 사라질 흔한 영광과 싸우는 이것이 구원을 받은 자로써 최소한의 도리일 것입니다.
3. 제사장들의 타락으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할, 사무엘을 세우시려고 젖을 땐 어릴 때부터 준비시키시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율법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 세워진 제사장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고 사무엘 같은 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적이지 아니하면 구원을 완성할 수 없기에 사무엘을 세우셨고 이스라엘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당시 왕의 역할인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사명을 받았던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잘 지킵니다. 그래서 구세주로 오신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엘리요 홉니요 비니하스와 같았던 우리들이 변화되어 가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죄로 인하여 완전하게 썩어버린 세상 속에서도 완전한 구원, 언약의 말씀들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엄청난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으로 자신을 붙들어 매는, 은혜의 줄로 꽁꽁 묶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자신을 용납하지 말고, 핑계대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것입니다. 싸우면서 믿음과 화합하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신앙이요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의 실정이 어떻습니까?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와 무엇이 다르던가요? 자기 멋대로 살면서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늘 그때 뿐 입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면, 주님과 동행하려고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있고, 말씀을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하게 여깁니까? 순종하고자 쉬지 않고 그분에게 나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나오기만 하면, 바로 엘리요 홉니요 비느하스의 길을 다시 거머쥐고 있으면서 전혀 두려움은커녕, 잘난 척까지 합니다. 이웃을 무시하고 괴롭힙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려고 아니 더 가지려고 만족하지 못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만한 일은 불순종하고 있는 홉니, 비느하스같은 자신들이 재앙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착각을 하고 있기에 그렇게들 여전히 부끄럽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 직격탄을 받지 않아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을 똑똑히 보세요!
교회의 타락과 인간의 욕심으로 지금 어떤 지경까지 왔는지, 지금의 이 현실을 똑똑히 보세요! 타락으로 인하여 결국 에이츠로 이미 엄청난 생명이 죽었고 신종바이러스로 계속하여 곳곳에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저주 아닙니까? 무서운 심판입니다. 게다가 곳곳에서 산불로 재산을 잃고, 곳곳에서 지진과 해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또 곳곳에서 종교전쟁으로 어떤 지경이던가요? 남극과 북극의 얼음은 점점 녹아서 낮은 지면을 바다로 덮여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고산 킬로만자로의 빙하나 스위스의 알프스 산의 빙하도 역시나 점점 녹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 결과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의 타락으로 이 지경까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저주도 부족하여, 꼭 나에게 그냥 곧바로 닥쳐서, 완전히 다 잃고 정신이 나간 후에야, 그 다음에 회개할 생각입니까? ~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이미 재앙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 와 있음을 모르세요? ~ 창6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타락으로 비가 내려서 결국 산이 빗물로 덮이고 인류는 진멸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의인 10명이 없어서 불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곧 어떤 기막힌 사태가 또 곧 벌어질지 계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태가 더 심각 해 지기 전에, 교회는 하루 속히 일초도 머뭇거리지 말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를 하지 않는 한, 치를 떠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신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깨닫고 회개를 하지 않는 한, 교회는 오늘 삼상 2장의 예언된 엘리 제사장 집과 후손의 저주가 끊임없이 빈번(頻繁)히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엘리며 홉니며, 비느하스에 불과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도 부족하셔서,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는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편한 데로, 원하는 데로, 하고 싶은 데로 살다가 부르심을 받을 작정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구원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 죽기 전에 끔찍한 조소와 경멸을 받고 회개케 하도록 하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축복과 저주는 자기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비참한 성도로 인생을 마감케 하시려고 주신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다가 받는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 지경까지 가기 전에 우리 모두 묶은 땅을 기경합시다! 좋은 말씀으로 기회를 주실 때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시고 포기할 것은 깨끗하게 포기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가 밝혀지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 판에 새겨 넣어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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