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3/22/2020 - 사무엘상 2:1-11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3/22/2020 - 사무엘상 2:1-11

PastorYK 2020. 3. 22. 17:59

말씀: 삼상2:1-11                                               

제목: 한나의 믿음의 기도

오늘 등장하고 있는 ‘한나’라는 여성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고 차고 넘치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또는 전혀 아무 고생도 없이 살아 왔었기에 그래서 드린 찬송입니까? 아니면 천국에서 내려왔기에 이런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까? ‘한나’라는 여인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이런 찬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한나’라는 여인이 우리와 완전 다른 존재였기에 드릴 수 있었던 찬송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한나’라는 여인도 우리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조건과 완전 동일했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환란과 우환 속의 삶이었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자식이 없어서 아내 된 ‘한나’는 격동해야 했고 엘가나의 다른 아내인 브닌나처럼 아이를 낳고 살아가고 싶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놀라운 찬송을 드립니다. 간절한 기도로 믿음의 아들을 낳았지만, 그녀는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사무엘을 타락한 제사장 엘리에게 맡겨야만 했습니다. 그 아들이 보고 싶어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제한된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하나님을 뜨겁게 온전하게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까요? 

 

그날 천국의 천사로써 내려와 드린 찬송도 아니요 우리와 모든 삶의 조건이 달라서 정말 특별한 복을 입었기에 그래서 드린 찬송도 아니요우리들처럼 환란과 우환 속에서, 힘들게 얻은 아들을 타락한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고 돌아와서, 매년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참담한 처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왜 그 이상의 은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헛된 세상의 것들 중의 한개도 내려놓지 못하여 쩔쩔맬 수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나아지지 않을 수가 있던가요

 

자신이 진정 성도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예전하고 무엇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나는, 분명히 이렇게 ‘한나’처럼 찬송을 드리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어떤가요? ~ 그러나 ‘한나’의 이 놀라운 기도나 그 큰 신앙과 믿음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훈련과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놀라운 ‘한나의 이 고백’일까요? 이 놀라운 찬양고백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확신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시119:141-143입니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여러분들은 정말 자기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여도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이기에 환란과 우환이 여러분들에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여러분들의 즐거움이셨습니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19로 인한 이 환란과 우환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정말, 말씀을 진리로 제대로 믿는데, 그래서 그렇게 방심할 수 있고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헛된 세상의 것들을 위하여서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면서 진리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흥미와 열심은 어찌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고 별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릴 수 있을까요? 다름이 아닙니다. 시119:137-141에서 알 수 있습니다.

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이런 고백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죽도록 사랑할 수 없었고 그러다가보니, 세상에서의 도움과 승리만이 즐거웠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이 말씀과 기도의 시간보다 세상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대충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의롭지 아니하시고 정직하지도 아니하시고 성실한 말씀도 아닐 뿐만이 아니라 악한 그런 나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전혀 믿겨지지 아니한 결과입니다. 아닙니까? 그러나 ‘한나’의 고백만 보시더라도 어떤 찬양을 드리고 있던가요? 다시 볼까요? 삼상2:1-11입니다.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9.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나입니다. 그래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끝까지 지켜낸 결과입니다. 그런 강력한 믿음은 어디에서 올까요? 

 

시107:23-32입니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이 시편기자의 고백과 찬송이 어떤가요? 저는 시편을 100번 이상을 묵상하였지만, 저는 시107편의 23-32의 이 말씀이 보석 중의 보석을 찾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상황을 수천 년의 전에 당시 107편 시편기자를 통하여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보세요! 큰 폭풍 속에서 오직 말씀을 의지하여 신실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더니 어떤 결과를 누리게 됩니까? 잔잔함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잔잔함으로 구원받은 그 기쁨을 누리고 있는 자녀들에게 어디로 인도해 주신다고요?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여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큰 폭풍이 없었더라면 만약에 ‘한나’에게 그 큰 아픔이 없었더라면 이런 찬송과 고백을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성도에게 환란은 복일 수밖에 없는데, 특히 중요한 말씀으로는 환란 때문에 의의 하나님, 정직하신 하나님, 성실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더 깊은 신앙과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난리입니다. 환란과 위기입니다. 지금 의로우시고 정직하시고 신실하시고 안전을 약속하신 그 하나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이지, 두렵고 떨려서 나만 준비하고 나만 먹고, 나만 안전하면 되고 그래서 이웃과 여러분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서는 관심도 배려함도 없는 지체라면 그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나는 전하고 있던가요? 복음입니까?

 

~만약에 위기를 전하고 있다면 아니면 위기를 전하고 있습니까?~ 코로나 바이러스 19보다 더 큰 바이러스가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나’의 고백과 그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뜻인데 시107:33-43입니다.

33.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깨닫게 하시는지,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이 말씀이 감동입니다. 보세요!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또 반복하여 주신다는 점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반복하시면서 어떤 결과를 주십니까? 잘나가던 어느 시점에서 다시 또 다시 저희로 감소하게 하시고 비굴하게 하시고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는데, 곤란 속에서 자녀들을 높여 주시고 가족처럼 양 무리를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역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정직한 자녀들은 믿음으로 알게 되면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한나’가 기뻐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43절의 말씀을 다시 보세요!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정직한 지체, 자녀들은 어떤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합니까? 변덕스러운 하나님, 힘들게 만 하시는 이상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한나’는 인자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세요? 이해가 아니 되니까?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어떤 기도를 드리던가요? 

 

자기만 그리고 자기 일과 가정에만 높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일과 자기 가정에만 우선을 두는 그 이기심은 이런 ‘한나’가 드린 아름다운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드릴 두 번째 말씀은 ‘한나의 기도’를 우리도 드리기 위하여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한 번 더 언급합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그 환경을 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환경을 보면 어떻게 이런 삼상2장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저 같았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왜요? 이제 젖을 겨우 띤 상태니까, 2-3세나 되었을까요? 걸음마 정도를 하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는데, 그 어린 아이를 성막에 두고 오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어떻게 해서 얻은 아들입니까? 성태하지 못해서 쩔쩔매다가 얻은 아들이기에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하고 예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수밖에 없는 아들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기막히게 귀한 아들을 성막에 두고 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엘리 제사장은 제사장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도 문제가 심각한 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인 제사장 홉니비느하스12절에서는 불량자요 17절에서는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다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12

12.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사무엘상 2:17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런 곳에 아들 사무엘을 둔다는 것은 신앙 이전에 믿음 이전에 용납할 수 없고 그래서 ‘한나의 서원’도 이런 핑계와 이유로 남편인 엘가나를 꼬득여서 민30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취소할 수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한나를 보세요! 어떤 기도를 드렸던가요? 사무엘을 받치면서 한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겁고, 기쁘다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을까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서원은 드렸지만, 어쩔 수가 없나이다! 어떻게 엘리 제사장과 불량배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는 곳에 부모로써 두고 올 수가 있나이까? 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도 못난 종의 마음을 이해 해 주실 줄을 믿고, 이번 일은 아주 없는 것으로 여겨주시옵소서! 하고 사무엘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 찬양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한나가 기도하여엡2:18의 말씀입니다.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3:12입니다.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것도 당당한 만남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때문에 기도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듯이 기도의 삶이 생활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대통령이 도와주려고 만나자고 하는데 바쁘다고, 약간 아프다고, 오늘은 기분이 나쁘다고 그 약속을 취소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기도의 시간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형편없고, 참으로 무지한 그런 나를 기도라는 시간을 통하여 받아주시고 들어주시기까지 하시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힘들고 복창 터지는 일로 죽을 지경일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위로가 되십니까? 살면서 생긴 깊은 마음의 상처까지도 치유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기도의 삶을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기도의 삶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우리들이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가 생활화가 되면 바랄 것이 없게 되고 자족하는 삶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물론 여기에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라는 엄청난 사랑이란 그 조건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 사랑을 모르고 나아가는 것은 아직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면, 그 기도는 언제나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신앙의 문제아가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다는 그 자체를 따지고 보면, 영광이요 복이요 특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시간을 놓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기도가 성도들에게는 영광이요, 복이요 특권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기도가 자랑의 조건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실력과 능력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정한 수(水)를 떠놓고 또는 불상과 그 외의 어떤 신이라고 믿는 존재 앞에서 하는 기도는 기도인가, 아닌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모르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조건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요,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속박하고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존귀한 자가 되었는지, 더욱 자신을 부인한 주님의 마음, 성령의 도움으로 그들을 섬기고 돕는 역할이 삶으로 배어나와야지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도는 아직도 바른 기도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참 기도의 결과는 결국 자기가 부인되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세상의 필요를 위한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그 이유는 마6:33입니다.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성도에게 기도는 복이요 영광이요 특권인데, 왜 기도하기를 도살장 끌려가는 그 이상으로 힘들어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죄가 더 크게 지배하고 있기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2) 경건의 훈련이 부족하므로 말씀이 자기의 습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데로 응답하여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하는 대로 다 응답을 하신다면 누가 기도하기를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대로 응답을 하신다면 이 지구는 곧 망할 것입니다. 함부로 하는 기도를 응답하셔서 곧 망하게 할 수가 없으시기에 응답을 하시지 않으시는 것인데, 그런 이유도 모르면서 기도를 거부하는 것은 미련함과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기도에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것인가? 단지 시간 낭비요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행위가 기도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럼, 기도를 드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선물을 주실까요? 

 

필립얀시의 기도라는 책에 실린 예화입니다. (P.522-523)

헨리나우웬은 남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아무도 내게 기도하면 달라진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기도하지 않으면 쉽게 화를 내고, 마음이 무거우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자주 놓쳐서 자신이 아닌 남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입견에 따라 행동하기 쉽다. 변덕스럽고 사소한 일에도 원한을 품는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린다.”  물론 그는 하루에 한 시간씩 교회에 앉아 있자면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고, 안절부절못하고, 졸리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았을 때, 기도한 뒤로 부터 하루가 다르게,   한 주가 다르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일관성을 잃어버렸을 테고, 그저 갖가지 사건 사고들이 이어지는 평범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구약 성경을 본문으로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The Bible Jesus Read} 라는 책을 쓰면서, 원수들에게 복수해주시길 요청하는 시편의 저주시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적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 뒷산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이른 바 ‘분노의 산책’ 이야기도 했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상대방에게 느끼는 분노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깊은 감정을 주님 앞에 쏟아 놓으면 치유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십중팔구 무거운 짐 보따리를 벗어버린 듯 홀가분하게 돌아오곤 했다.  가시처럼 마음 속에 박혀 있던 억울한 심정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큰소리로 하나님께 상한 마음을 아뢸수록 상대방에 대해 너그러운 생각을 품게 됐다성령님은 내 이기심과 정죄하는 마음을 지적하셨다.  지난날, 형편없이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며 저질렀던 잘못들을  다른 이들이 넉넉하게 용서해주었던 사실도 기억나게 하셨다.”

지금도 막 그런 시편을 읽은 참이다. 누군가 그 옛날에 그런 글을 써놓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알다시피 분노의 산책을 시작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요즘도 주일 오후가 되면 뒷동산을 헤매고 다닌다.  여우 굴을 한번 들여다보고, 딱정벌레가 소나무를 파먹은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고, 눈 밭에 난 동물 발자국을 따라가기도 한다. 물론 걷는 내내 기도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찬양의 산책’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에 분노가 녹아내리고 상처가 치유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생산성은 세상에서 줄 수 없는 놀라운 변화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되는 것이요 기도의 삶을 생활화하지 않을 수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기도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왜 쉬지 말고 하나님께로 지속적으로 나아오라고 하셨는가? 세상의 것인 돈과 권세와 명예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욕과 탐심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computer 게임, 세상의 new one, 더러운 포르노 영화와 잡지, 연속극, 술, 담배, 마약, 도박, 음란한 생활 등 나를 죽이는 세상의 그런 수많은 것을 미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질병, 가난, 온갖 고통을 주는 악한 세력들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짓과 게으르고, 당당하지 못하고, 열등감과 미움과 불평과 근심과 낙심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여차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늘 기도를 드리면서도 무엇이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벧후1:10-11의 말씀입니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의미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슨 기도를 구하고 있었습니까? 

 

엡1:19입니다.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놓치는 것은 휩쓸려 떠내려가는 강력한 물가에서 던져준 밧줄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 순간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쓸려 내려가지 않으시려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늘 기억하시면서 기도의 삶을 유지(維持)하실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고, 끝까지 구원을 이룰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한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놓지 않는다는 뜻은 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내 방식대로, 생각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는 기도의 삶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성도들에게는 절대적인 조건이기에 그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드리는 일에 수고에 조금도 인색할 수도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책에 실린 사막교부의 예화입니다. (P147-148)

어떤 형제가 포에멘을 찾아와 말했다.

“형제여!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저는 정욕으로 인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비스티온에게 갔더니 ‘이 격정이 당신안에서 살도록 더 이상 용인하지 마시오’ 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포에멘이 형제에게 말했다.

“히비스티온은 하늘의 천사처럼 살아서 이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오. 하지만 당신과 나는 정욕으로 가득 차 있소이다.  만일 어떤 수도자가 자신의 배와 혀를 제어하여 늘 고독 속에 머문다면, 자신이 아직 실족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오.”

어떤 형제가 정욕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맹렬한 불처럼 밤낮으로 그의 마음에서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굴복하지도, 그 유혹 떄문에 고심하지도 않고 오직 굳게 싸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 불은 그를 떠났다.  그의 인내가 그 불을 끈 것이다.

또 다른 형제 역시도 정욕에 사로잡혔다.  그는 한밤중에 일어나 어떤 은둔자를 찾아가 유혹에 대해 털어 놓았고, 은둔자는 그를 위로했다. 형제는 힘을 얻어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욕의 영이 다시 그를 유혹했다.  그는 또 은둔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그래도 은둔자는 형제를 꾸짖지 않았고, 그의 유익을 위해 이렇게 말했다.

“마귀에게 굴복하지 마시오.  그대의 영혼을 지키시오.  마귀가 괴롭힐 때마다 나를 찾아오시오. 그러면 마귀가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결국 물러날 것이오.  마귀의 충동질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보다 마귀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없으며, 마귀의 유혹을 은폐하는 것보다 마귀를 더 즐겁게 하는 것은 없소.

그래서 형제는 열한 번이나 은둔자를 찾아갔다.  그는 자꾸 몹쓸 상상을 하는 자신을 꾸짖으며 은둔자에게 말했다.

“사랑을 베푸셔서 저를 격려하는 말을 해주십시오.”

은둔자가 그에게 말했다.

“형제여, 내 말을 믿으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공격하는 이 온갖 상상들을 그대에게 옮기신다면, 그대는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이오.”

형제는 은둔자의 말과 깊은 겸손을 통해, 수도자가 정욕의 유혹과 부단히 싸우며 인내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은둔자는 정욕의 유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구원 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가서 정욕에 맞서 싸우는 훈련을 하라.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7) 라고 말씀하셨다.”

 

셋째 기도의 원리는 1)기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뜻은 무엇인가? 넓은 세상의 길을 포기하고 좁고 좁은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신이요, 세상의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 더러운 무지한 자신과 세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어렵고 힘이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던 세상의 길을 버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로 가야 되기에 이를 놓고 기도를 드리니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는 결국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데 있기에 혼자서 독백 식으로 마냥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2)나만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지 말고 듣는 자세, 즉 주님이 말씀하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폭탄을 쏘듯이 그냥 침을 튀기면서 퍼부을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믿음의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전혀 안 들리지만, 자꾸 하시다가 보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보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고 더욱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체험하게 되시면서 오직 예수님만을 존귀케 하는 역할, 악을 선으로 갚는 수준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3)한나처럼 포기를 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원하는 아들 사무엘까지도 내려놓았듯이 다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던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기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기도는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허락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마6:9-13입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의 내용을 보세요! 거룩함입니다. 그러므로 4)기도는 현실적인 생산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생산적이 되면 안 되는 것이 기도라면, 시간을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평안이 사라지고 마음의 부담이 깊어가고, 멋대로 살게 되고, 사소한 일에 원한을 품게 되고,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아십니까? 때문에 손해 보는 것과 같은 기도의 시간을 드리면 드릴수록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무분별한 자신이 정확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충동적인 태도를 누르게 되고 실수가 적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근심이 물러갑니다. 행여 일이 잘못될까 초조해 하지도 않게 됩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일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체험합니다. 기도는 결코 헛되지도 미련한 행위도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변화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죄인의 구세주이심을 믿기에 그래서 순종하고자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항상 기쁨을 주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입술이 되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손해를 본다는 그런 거룩한 기도는 손해가 1불이라면, 거룩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므로 인한 손해는 수억만 불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므로 인한 이익이 1불이라면, 거룩한 기도를 드리므로 얻는 이익이 수억만 불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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