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1/19/2019 - 사사기 20:1-48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1/19/2019 - 사사기 20:1-48

PastorYK 2020. 1. 22. 14:15

말씀: 삿20:1-48                                               

제목: 자기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4)

 

삿20장의 말씀에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그러나 삿20장의 말씀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1)삿20:1-18까지의 말씀을 보셨지만, 지파 간에 얼마나 정당하고 합당한 결정을 했습니까? 타락한 것을 듣고 나서 내린 그들의 응징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기에 이해가 더더욱 안 될 수 있습니다. (2)게다가 베냐민 지파는 어찌해서 간악하고 더러운 비류들을 내놓지 않아서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기에 삿20장의 말씀은 어렵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날 그 첩을 rape한 놈들을 찾아서 심판을 받도록 내 주었을까요? 아니면 베냐민 지파처럼 싸움을 택하셨을까요? (3)특히 삿20:17-25의 말씀을 보셨지만, 다시 보겠습니다.

17.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하나님께서 나가서 싸우라고 두 번 씩이나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400,000명의 대군을 거느린 이스라엘 군이 26,700명의 군사를 가진 베냐민 지파에게 두 번이나 패배를 당합니다. 한번은 싸우다가 22,000명이 죽고 다음 전쟁에서는 18,000명이 죽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까? 분명히 응답을 받아서 나갔는데 이런 엄청난 패배를 한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기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오늘은 그 원인을 밝혀서 이런 처참한 전철을 다시 밟는 어리석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베냐민 지파에서 비류들을 내놓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순순히 내보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순순히 가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아마도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옳은 대로 멋대로 살던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자기 자식이 저지른 그 만행을 알았다고 하여 포기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못합니다. 남의 자식의 악행은 심판대상이라고 쉽게 결정할런 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비롯하여 자기의 자식의 만행은 용서와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아닙니까? 자신들의 자식들이 비록 이런 참담한 만행을 저질렀지만, 내 놓을 수가 없다는 그들의 그 뜻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식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율법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위엄하심이 땅에 완전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자신의 악한 자식일지라도 순순히 내줄까요? 그러나 신13:6-11의 말씀을 보세요! 

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8.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11.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저지른 죄로 인한 심판의 그 대상은 누구든지 간에 상관이 없이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시 레24:10-23입니다.

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12.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4.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17.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19.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22.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2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니 그들이 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민15:32-36입니다.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값은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합니다.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옳은 대로 선택했습니다. 오늘 말씀만 보더라도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질서는 완전하게 무너진 상태라는 것을 쉽게 알게 합니다. 하나님 쪽이 아니라 세상에 여전히 깊이 묶여 세상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총회에서 정한 결정사항이 아무리 그럴듯할지라도 질서가 무너진 당시에 누가 순종할까요?~ 베냐민 지파도 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수적 열쇄일지라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싸워보겠다는 것입니다. 끝장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형제간의 이런 싸움은 세상 사람이 봐도, 이해가 전혀 안 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될 수 있는가? 라고 의심하게 하는 사건이 삿20장입니다. 그렇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성경은 인간의 기준과 지식으로 보면, 상식이하로 판단이 됩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보셔야,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눈으로 본 삿20장에서의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내 기준과 방법이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 옳은 대로 하면 이스라엘일지라도, 교회일지라도, 이렇게 망한다! 입니다. 그런데 3000년 전의 사건의 말씀이지만, 지금 우린 어떤가요? 말씀과 자기 중의 무엇이 우선입니까?

 

지금도 말씀이 우선이 아니라 자기가 우선이기에 삿20장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의 잘못된 신앙의 방향을 알게 하시니,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삿20장의 말씀을 통하여 또 확인이 되어야 되는 것은, ‘야! 정말 인간들의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강력한지’를 제대로 실감하게 하는데, 정확하게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말씀이요 사건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삿20장의 말씀에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으면서도 베냐민 지파에게 이스라엘이 두 번씩이나 당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여인을 rape하여 죽게 한, 베냐민 지파 동성연애자들을 심판하러 온, 이스라엘인데, 아니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에 걸쳐서 40,000명이나 죽임을 당하게 하셨을까? 여기서 우린 40,000명의 죽음이 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리는 왜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싸워야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지만 말씀의 흐름과 처음 듣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재 언급합니다. 형제의 간의 전쟁의 원인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고 있었던 타락한 레위인의 첩 사건 때문입니다. 레위 인이 도망했던 자신의 첩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자 베냐민 지역의 기브아라는 곳에 머물다가 그 동네에서 살던 더러운 동성연애자들의 망령된 rape으로 레위인의 첩이 죽게 되었고, 이를 참지 못하고, 레위인이 집으로 돌아와서 그 죽은 첩의 몸을 12 조각을 내어 각 지파로 보내면서 생긴 사건이 삿20장의 동족상잔이 되고 만 것입니다. 레위인의 첩의 rape과 베냐민 지파의 전멸은 이스라엘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첩의 그 기막힌 죽음을 통하여 “이것은 나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깨닫고 회개를 하고 첩의 시신을 땅에 묻었다면 이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뼈아픈 사건은 사전에 막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회개는커녕 모든 잘못을 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동성연애자들에게 돌리면서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이런 지경으로 만들었지, 자신은 아니라는 이 레위인의 변명과 자신의 분노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지적이기도 합니다. 왜 총회에서 이 레위 인에 대한 첩의 사건을 다루지 않았는가? 문제를 삼아야 되는데 모두가 기브아 사건만을 두고 이에 대한 응징을 합의해서 결정했던 것이 무엇보다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0,000명의 대군을 가진 이스라엘 11개 지파가 30,000명도 안 되는 베냐민 지파에게 그것도 두 번씩이나 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총회가 첩을 두었던 타락한 레위 인을 두둔하면서 누구를 심판하려는가?

 

이스라엘 총회 너희들도 멋대로 하면서 회개 없이 누구를 심판하려고 하는가? 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삿20장의 말씀입니다.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러 온 이스라엘 11지파인 너희들도, 기브아의 동성연애자들과 똑같이 멋대로 살던 죄 덩어리들이면서, 왜 회개가 우선되지 않고, 단지 율법만을 앞세워서 자신들은 의로운 자처럼, 베냐민 지파만 심판하려고 하는가? 이 점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래서 두 번 씩이나 베냐민 지파에게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레위 인의 첩의 문제에 56대하여 눈감아 주고, 기브아 비류들의 음행, rape한 것만 죄악으로 여겨서 응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자기 기준이요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둘 다 징계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명해 주십니다. 요8장을 보겠습니다. 요8:1-11입니다.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총회의 결정사항도 여기에 걸립니다. 이 점을 깨닫게 하시려고 400,000명의 이스라엘 군사가 30,000명도 안 되는 베냐민 지파에게 당하여 자그만치 40,030명이나 되는 전사를 잃게 했던 것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입니다. 

 

비슷한 사건이 삿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의 자식 69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비멜렉과 다르지 않은 사건입니다. 결국 세검사람으로 왕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서로 죽이고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 내용이 삿9장에 나옵니다. 때문에 삿20:8-11의 말씀처럼 이스라엘 11지파가 모여서 힘을 합친다고 하여, 베냐민 지파의 동성연애자들의 죄를 심판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아닙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았어도 그것이 이기는 조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해결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생각과 기준에서 볼 때에, 큰 죄는 절대로 놔, 두지 못하고, 작은 죄는 눈감아 주어도 된다는 이 인간적인 발상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는 큰 죄, 작은 죄를 구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런 잘못된 기준에 빠져서 얼마나 못난 짓거리를 수없이 하고 있는지 인정하십니까? 죄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죄의 경중을 성경에서는 따지지 않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일뿐입니다. 이스라엘의 11개 지파처럼 자기 마음대로 심판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부터 회개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죄에 대하여 징계를 하고 심판을 해야 합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 회개도 없이 심판을 해 봐야 삿20장의 사건처럼 동족간의 지울 수 없는 전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들도 뒤에서 할 짓, 못할 짓을 다 해놓고는 남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치고 야단을 치는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실제 모습이기에 삿20장의 사건은 귀중한 교훈이 됩니다. 자신이 하는 불륜은 지고한 사랑이지만 남이 하는 사랑은 용서할 수 없는 불륜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뻔뻔스런 이중성입니다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눅15:1-10의 말씀입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성도들의 회개는 즉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여 돌이키는 것만큼, 큰 기쁨이고 가문의 자랑이요 복은 없습니다. 만약에 성도가 드러난 죄를 밝히지 못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죽이고 가정을 깨뜨리고 교회를 무너지게 합니다빛을 받은 성도의 특권은 죄가 발견되면, 즉시 회개를 하는데 있습니다. 회개를 놓치면 어디까지 간다고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죄를 감추고 남의 죄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삿20장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재현할 뿐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망하는 것입니다왜요? 그것은 불 속에 자기 몸이 타는데 방치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즉시로 고백할 때에 오히려 좋아지지, 나빠지지 않다는 것을 즉시로 회개하고 사는 성도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엄청난 하나님의 복(福)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지은 죄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죄를 회개하면서 놀라운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기회가 되면서, 얼마나 소중한 성군(聖君)으로 남고 있습니까?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죄를 내내 감추고, 회개를 하지 않았던 사울 왕은 영원토록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왕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은혜를 아는 성도의 특징은 결코 죄를 감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백하고 회개하면 완전하게 씻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죄 사함의 은혜의 복을 받지 못했기에 기를 쓰고, 악을 쓰면서라도, 어떨 때에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자신 죄에 대하여 자신 있게 고백하느냐 자존심 때문에 못하느냐에 따라 평가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점을 늘 기억하면서, 감춰진 죄가 밝혀질 때마다, 도망가지 마시고, 피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고백하므로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늘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 사함의 복을 누리고 있는 복된 성도들이, 죄라면 치를 떨어야 되는데, 세상의 돈과 권력과 인기와 명예 그리고 흥미를 위하여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으면서, 주일 마다, 나는 성도라고 하며, 신앙고백을 한다면, 죽은 개도 웃지 않을까요? 그러나 지금 신앙의 현실은 죽은 개들도 웃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성도 즉 의인으로 인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특권도 특권이지만, 그 책임이 결코 만만하지 않기에 더더욱 긴장하시고 만만의 준비를 그것도 아주 바쁘게 늘 쉴 사이가 없이 하셔야 될 것입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사기를 통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라면 한 영혼에 대한 그 가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사기 내내 보면서 느끼는 점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보니까, 70명의 형제를 죽이고 지파간의 피를 흘리고 이젠 수십만 명이 죽는 지경으로까지 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점점 희석되어 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보다 존귀한 그 무엇이 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바꿀 것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자기의 죽음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죽음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성도로써 하루의 삶은 어떨까요? 점점 더 내려놓으면서, 내리는 판단과 얻게 되는 결론은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요? ~ 물론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 뜻은 ‘막 살아가도’ 된다는 뜻도 아니고 ‘기죽은 자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고 헛된 세상의 것들로 즐거워할 이유도 없고 단지 하루하루를 호흡하고 있을 동안에 오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 목표인, 그리스도만이 자기의 중심이요 모든 것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누구든지 죽고 말텐데, 굳이 욕심을 부려서 상처를 주고받고 할 필요가 어디 있고, 곧 없어질 것이고, 영원히 움켜쥐고 싶어도 절로 다 내려놓고야 말 것인데, 그리고 그 헛된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고 즐거워하려는 그들의 그 시간과 물질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 낭비가 아닙니까?

 

성도는 이런 가치관이 몸에 깊이 아주 깊이 뼈 속까지 아니 영혼까지 깊이 스며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겠다는 그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지, 죽음에 대하여 전혀 준비 없이 사는 그 사람은 성도일지라도 목사요 장로일지라도 선지자로 제사장일지라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기도하고 해결하려는 그 의도를 보면, 다 그럴듯하지만, 아닙니다.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이기에, 이런 반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을 드리면 스스로 속이고 속고 있기에 이런 변을 서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죽음을 당연시 하지 못하고 죽음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 즐거워하고, 더 갖지 못하여 전심으로 헛수고하기에, 그 사람은 자기의 잘못된 그 방향이 결국 오늘 말씀처럼 뭐가 뭔지 모르는 그런 상황으로 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현실이 되면 마치 무엇과 같은 일이 생기는지 아세요? 산양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산양은 앞을 끌고 가는 지도자가 앞으로 달리면서 그 앞에 깊은 절벽으로 떨어지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같이 떨어져 죽듯이 그런 짝이 난다는 것입니다. -7-

 

다들 속고 있다가 보니까, 다들 분별을 못하고 있고 방황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한 사람이 잘못하면 그 잘못 때문에 다 같이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 그 한 사람의 타락이 가져오는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한 사람이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 결과는 자신과 가정과 나중에는 공동체인 교회까지도 완전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양만 교회이지, 기업도 아닌 무서운 마피아 조직이 됩니다. 

 

지금의 교회들을 보세요! 다는 아니겠지만 특히 대형교회를 보면, 심각합니다. 아닌가요? 그 시작은 영적인 지도자의 타락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 성도의 타락이 주는 그 결과하고는 비교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지금 세상의 것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말씀은 시119:72-73의 고백이 봇물이 터지듯이, 화산의 마그마가 터져 나오듯이 터져 나오게 합니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그래야지만 시편 89편 기자의 이런 놀라운 고백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시89:19-26입니다.

19 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
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이 거룩한 기름으로 부어 부었도다
21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23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24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5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26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지금 제가 드리고 있는 이 말씀에 대하여 이해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무슨 봉사를 했다고 하여 그래서 높임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다들 어떤가요자기의 신앙을 무엇으로 인정하고 있던가요? 단지 자기의 입술 고백만으로 나는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정말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정말 자기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아버지라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 확신은 세상의 것으로 쩔쩔매지 않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확신하고, 확신하고 있다면, 그 확신은 죽음을 늘 준비하는 자로써 욕심과 멋대로의 삶은 점점 버려가야 할 것입니다그 확신은 멋대로의 삶이 너무나 어색하여 거짓말, 꼼수, 이기심, 불평, 원망, 미움, 시기 질투, 이런 차원에서 벗어나, 다 내려놓은 성도로서의 자유와 배려와 희생과 충성만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가요? 나는 어느 편입니까? 

   

삿20장을 통하여 드릴 마지막 말씀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에 대한 책임 범위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죄악은 그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책임이어야 하는데, 그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의기투합을 하면서, 세움을 위한 연합은 완전 빵점이었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그 아픈 부분의 회복을 위하여 서로 힘들게 다같이 희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긴 시간을 놓고 보시면 압니다. 회복을 약속하셨다면 그 회복을 위하여 다같이 고생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당장 형편없기에, 그래서 내일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회복의 약속이 있다면, 힘들게 끝까지 인내하면서 서로가 희생한다면, 회복의 그 때를 위하여, 오해를 받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서로 심하게 다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가, 회복이 되면, 그 가치는 비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회복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차고도 넘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의미가 있고 보람이 되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시133편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는 한 목표를 향하고 있기에, 우리 이웃들의 나이와 배움의 수준과 지위와 삶의 수준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일지라도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이웃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힘이 약한 이웃들 때문에 복(福)을 받을 수 있습니다나만 잘 되려고, 이웃들을 무시하고 짓밟아서 내친다면, 냄새나는 자신의 발목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성도들의 가정과 교회의 진정한 힘은 연합에서 나옵니다. 그 연합은 희생이 늘 따르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나의 가정과 교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는 그것이 바로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것이 또한 강력한 힘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게 된 성도들의 당연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면서 입술이 터지고, 두 손을 들고 힘 있게 찬양을 드리면서 눈물을 마르도록 흘릴지라도 가난하고 힘없는 그리고 병든 이웃들을 외면하다면 위선자요 외식하는 악행이기에 가증하다고 주님의 정죄를 받았던 바리새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자기의 역할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시간이 즐거움으로까지 되어야 합니다.  2. 동등한 입장에서 진솔한 대화를 끊임없이 서로 해야 합니다. 3. 차별 없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그 마음을 끊임없이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직 희생 속에서만 비로써 관계가 열리고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가르침이 갈4:19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서로가 해산의 수고 없이 안 됩니다. 

 

물론 그러다가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망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시면 안 됩니다. 특히 가족의 고통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고통을 들어주시려면, 자신 때문에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결국은 레위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자신의 죄를 감출 것이요 감추기 때문에 남의 죄를 들추어내어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엡2:19-22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함께 지여져 가야할 운명입니다. 같은 배를 탄, 주님의 지체들입니다. 나 혼자라는 것은 용납이 될 수 없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능한 아니 늘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느끼기 위하여 얼마나 지체들 간의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의 가정과 교회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로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오직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예수님에게 all in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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