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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09092018 신명기 27:1-10 본문
제목: 큰 돌, 석회 그리고 기록하라
신명기의 말씀은 40년 광야 생활을 다 마치고 죽음이 임박한 모세가 가나안 땅 입국을 앞두고 그간의 일을 회상하면서 한 설교라고 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그 과거가 무엇이었고, 그리고 왜 지금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는가? 또한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은혜를 입고 기적과 기사로 인도하심을 받았지만 세상의 힘과 능력으로 인하여 입성을 거절하므로 이 광야 40년간을 돌다가 다 죽고 이제 이렇게 우리들이 요단강 앞에 선 이 현실을 보라”가 모세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설교의 중심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너희들이 그간 실패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출32장인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사건으로 실패했고, 민13장인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보낸 정탐꾼들의 부정적 보고로 결국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죽어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모세가 간곡하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을 어떻게 들어갔느냐? 은혜로 얻은 땅이라고 하면서, 이제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면, 너희들은 절대로 이스라엘이 잘나서, 강한 힘을 가져서 들어간 것이 아니요, 의로워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분명 목이 곧은 백성임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을 격노케 한 자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 조상들과 한, 그 약속으로 인하여,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제발 하나님의 이 율법, 규례, 법을 지켜내라”가 신명기의 중심 내용입니다.
그중에 오늘 주신 신27장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요약을 하면
(1)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
(2)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요단강을 통하여 들어가면
(3)너희들은 저주의 에발 산에 큰 돌을 세우고
(4)세운 돌에 석회를 바르고
(5)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그 돌 위에 기록하라
(6)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 자체로 돌단을 쌓고
(7)그 돌단 위에 하나님께 번제 즉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이며
(8)화목제를 드려서 (9)거기서 먹으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신27장의 말씀은 앞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이 무엇인지 숨겨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신27장 말씀이라도 제대로 깨달으면 성경의 전체 내용을 먹은 것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받아들여서 따라가기 시작하면 더 이상 속지 않을 수 있고, 당연히 인생방황을 끝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방황하던가요? 왜 돈으로 평가하고 해결하려고 합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정?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삶의 시작과 끝을 오늘 말씀처럼 이렇게 보장해 주시고, 어떻게 하도록 말씀을 주시고 있으시기에, 따라가려고만 하면 절대로 성공이지, 실패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실패가 불가능한 것이 성도된 우리들의 큰 복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만으로도, 힘은 들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방황에서 완전 벗어나고, 영원히 자유 할 수 있는 복된 길을 제시하고 있기에, 함께 살펴보면서 크게 깨닫고 결단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즉 요단강을 건너가면 큰 돌을 세우라고 하셨을까요?
돌은 모든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마음 판에 말씀을 새기라고 하시는 그 말씀 안에는 얼마나 인간의 마음이 굳어 있는지, 얼마나 강퍅한지, 좀처럼 아니 절대로 말씀이 새겨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겔3:4-7, 11:19입니다.“***”강퍅하고 굳은 마음은 아무리 말씀을 전해 주어도 전혀 이해도, 들을 수도 없는 딱딱한 돌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5:21-24, 렘6:10, 19, 렘7:23-28, 렘9:6-16의 말씀을 봅니다.
“***” 얼마나 그 마음이 강퍅한 지를 이렇게 고발(告發)하고 계십니다. 특히 신명기에서 내내, 모세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라!” 를 몇 번이나 언급하시고 계시던가요? 내내 수없이 반복하시고 계십니다. 왜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강퍅하여, 마음이 둔하여, 단단한 돌과 같아서 전혀 들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듣지를 전혀 못해도 반복적으로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는 그런 그들일지라도 결코 포기를 할 수 없다는 깊은 바다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내 듣지 못하는 자녀들을 어떻게 하여서 말씀을 듣게 하시던가요? 독생자 예수를 죽여서 듣게 하신 것입니다. 내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인한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로 가나안 땅을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다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은혜의 가치를 아세요? 전혀 듣지 못하던 내가, 말씀을 새길 수 없는 돌 마음에 불과한데, 이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순종하게 된, 그 가치가, 정말 어느 정도인지 측정할 수 있습니까? ***
단지 글을 몰라서 사기를 크게 당하여 전 재산을 몽땅 빼앗겨, 온 가족이 거지가 되어 길거리로 나서게 된 그 경험, 이민 온 어떤 사람이 그 나라의 말을 몰라서, 죽도록 고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경험을 누가 했더라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를 하게 된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 복인지를 어느 정도, 측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몰라서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버려졌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진리를 찾다가, 찾다가,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여 결국 버려져서, 우리들을 한없이 부러워하고 있는 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바로 우리들인데, 그런 복을 받은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돈 돈 돈, 나 나 나 할 수 있을까요? *** 양심도 없기에, 생각하는 머리도 없다면 몰라도, 배울 것 다 배웠고, 계산도 기막히게 하면서, 진리의 말씀은 왜 듣지 않으려고 합니까? 아니 늘 말씀을 그렇게 들고 있으면서 여전히, 진리보다는 돈과 능력과 힘으로 살려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이젠, 항복하고 말씀으로 돌아와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 제발, 더 이상 속지 마시고, 진리를 몰라서 그렇게 고생하다가 버려진 옛 철학자를 비롯한 세상의 헛된 것들에 빠져서,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너무나 부러워,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는 그들을 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헛된 것으로 싸워, 서로간의 쩔쩔매지 마시고, 헛된 것으로 즐거워하지 않도록 늘 긴장하면서 자기의 역할을 굳게 지켜내자는 말입니다. 진리를 몰라서 버려진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늘 보고 듣고 사는 우리들을 보면서, 한결같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그럴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복된 자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할 말을 잃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큰 복이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볼까요? 마13:9-17, 눅10:21-24입니다. “***” 그런데 우린 여전히 그렇게 생명의 말씀을 들어도, 영혼을 말려 죽이는 해서는 안 되는 인간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말인지 아십니까? 물론 그 인간적인 말은 저주이기에 모르고 한, 자기의 말이, 저주라고 할 때는, 당연히 듣기 싫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인간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 서로가 좋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목사로써 저는 어쩔 수 없이 밝혀서, 다시는 그런 막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될 것입니다. 무슨 막말인가 하면, 오직 예수 구원은 비현실적이고 살아남을 수 없는 도태(淘汰)된 차원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맞는 말입니까? 그리고 아니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으면 망해요?
정말 망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돈이 말씀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합니까? 그래서 주일 장사에 대하여 막아서도 안 된다! 특히 수요 금요 성경공부정도는 대충해도 된다는 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말려서 죽이려는 막말을 하는데, 이건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더 무서운 저주입니다. 듣기 좋은 저주인데 듣기 좋은 저주는 허락해도 욕설은 하지 말라는 것인데, 어느 쪽이 더 낫던가요? ***그런 막말을 주변에서 들을 때, 아무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혹시 우리 중에 그런 저주를 저주로 여기지 않고 있는 분이 계신 것은 아닙니까! 진리를 찾다가 죽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진리를 듣고서도 항복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고 있는 그런 자들을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기절초풍 정도가 아닐 것입니다. 하늘이 꺼지고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쉴 것입니다. 그들의 그 한숨이 모아져서 지금의 한 도시를 삼켜버리는 초강력 토네이도(tornado)가 된 것이 아닐까요?
(2)말씀을 이렇게 반복하고 또 반복하시는 이유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지라도 마음 판에 말씀을 새긴다는 것은 능력이요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쉽게 단번에 말씀이 알아듣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일은 없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죽어라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단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이 참 더디게 성장하는 이유가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지, 금강석처럼 단단한지를 모르고, 그냥 쉽게 말씀이 새겨질 것이라고 큰 착각을 하여서 셀 수도 없는 반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엄청난 기적 속에서도 내내 불순종하여 터지고 또 터지는 역사만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목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알게 합니다. 그래서 반복을 하셨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목이 곧은 교만한 백성, 쓸모없는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가? 라는 의심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린 중요한 원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약속에 의한 입성, 하나님의 약속으로 들어온 이스라엘이지 그들의 의로움이나 실력으로 능력으로 인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너희들은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요 그냥 내버려두면 박살이 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너희의 구원은 너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나의 약속으로 인하여 들어왔는데, 들어온 지독스럽게 못난 너희들에게 이 율법, 규례, 규범들을 왜 주는지, 반복적으로 말씀을 왜 하시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 규범, 규례들을 따라하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너희들은 맞아죽을 짓만 하고 말기에, 이 율법에 순종하라, 지켜라, 따라야한다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40년을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다 나가 자빠져 죽어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늘 넘어지고 자빠지고 배반하고 그래서 울고불고 하다가 끝이 난, 너희들의 미련했던 모든 조상들의 그 못난 광야 40년을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내내 듣고 순종하라’를 반복해 주신 것입니다. 살리려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들여보내는 것은 그들을 시험하시려는 것도 아니요 천국백성의 그 자격을 따지려고 하시려는 것도 아니요 잘나서 들여보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으로 인한 구원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고 있던가요? 최소한 주신 말씀을 우선으로 여겨야지요, 그리고 정말 감사한다면, 그래 더 이상 내 생각에서 머물러 있지 말자! 내 생각대로 이젠 살지 말자! 그 어떤 손해를 볼지라도 순종하자! 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전히 하는 불평의 목소리가 목사님! 어떻게 신명기를 전체 다 읽으라고 할 수 있어요? 수 시간이 걸린다고요?
아니 그걸 누구 몰라요? 그래서 it is option!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if you love Jesus truly, Now how can I read all Deuteronomy? I’m not crazy!라고 할 수 있어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힘들어도 읽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들의 하는 말이나 생각을 보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누가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은혜를 모르는 우리 자신들이 다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누구든지 살 길은 주신 이 말씀을 오직 따라야지만 됩니다.
둘째로 큰 돌에 석회를 바르게 합니다. 석회를 바르게 하시는 데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석회는 말 그대로 조개껍질에서 나온 흰색을 띤 석회입니다. 이것을 큰 돌에 입히라고 하시는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깨끗한 돌, 쓸모 있는 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칠고 쓸모없었던 성도들이 주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서 깨끗함을 받아서 거룩한 자녀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을 마22:11-13, 계3:4, 18, 19:8, 14입니다. “***” 성도는 예복, 흰 옷, 흰 세마포를 입었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막도 보면 성도를 상징하는 성막을 담으로 둘렀는데 그 담도 다 검은 세마포가 아닌 흰색 계통인 세마포를 두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정결, 깨끗함은 신27:6의 희생제사인 번제라는 말씀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죄를 씻음 받아서 정결하게 되었듯이, 모든 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으로 깨끗하게 됨을 말씀하시는 말씀이 신27:2의 하얀 석회가 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택함을 받은 성도가 주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았다는 뜻이 신27:2의 말씀입니다. 결국 큰 돌 위에 흰 색의 석회를 칠한 부분에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판에 말씀을 새기게 된다는 뜻으로 결국 성도라면 말씀대로 살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이 성도의 생명과 빛이 되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헛되고 썩어서 아무 가치도 없는 세상의 뜻과 이익과 가치만을 바라면서 살아가던 죽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뿌리요 그 중심이요 원리가 되도록 새롭게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기적이요 시기와 다툼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우리들을 서로 화목하고 연합하면서 기쁨의 교제를 가능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7:7에서 화목제물을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자로 점점 바뀌어 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를 받아서 달라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인내를 통한 화평보다는 자기 때문에 늘 싸우기 바빠하던 그런 우리들에게 거짓과 참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돈만 알고 돈만 좋아하므로 싸움과 다툼과 거짓으로 살던 우리들을 거룩한 삶, 화목한 삶,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자로써 영광과 자랑과 기쁨과 칭찬이 있는 삶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말쟁이요 거짓말쟁이가 될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신명기 오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하나님만,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면서 순종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닙니까? *** 당연히 아멘이지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경우,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들은 그 시작과 끝이 다 하나님의 주관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기에 실패는 결코 없습니다. 아니 실패하는 것이 불가능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승자요 패자(覇者)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구원에 감사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27:9-10의 말씀을 보세요! “***” 성도의 몫은 말씀의 순종입니다.
약2:20-26입니다. “***” 순종은 성도의 책임이요 의무이기에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종은 성도의 꽃이요 열매이기에 순종하지 않는 성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어떤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는 들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지식으로만 남으면 그 지식은 가정과 이웃과 친구에게 정죄 만하게 되고 결국 상처만 줄 뿐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악한 지식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바른 말씀을 배워야 되고 배우면서 지식이 쌓이도록 해야 합니다. 지식이 쌓여 가면, 처음에는 사랑보다는 정죄하는 못난 성도가 되지만, 이 단계는 누구든지 다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요하신 간섭으로 단지 지식만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시고 결국은 순종케 하십니다. 그러면서 지식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 사랑의 말씀, 인내의 말씀으로 놀랍도록 변화가 됩니다. 점점 더 순종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구원의 가치도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순종하게 되면서 믿음의 눈을 뜨게 되고, 순종하게 되면서 주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순종의 깊이에 따라서 삶의 기쁨과 감사가 비례하게 됩니다. 순종하게 되면서 말씀에 대한 이해가 구체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물론 순종하면 할수록 삶의 희생과 사랑과 인내함도 비례합니다. 주님의 길을 사모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최고의 지상 목표로 정하게 됩니다. 때문에 더욱 주님처럼 그렇게 살지 못한 그간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 숨을 거두면서도 주님의 길,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유언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모두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면서도 능력과 사랑과 희생이 없는 이유는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약1:22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지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기에 늘 짜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쉽게 살려고, 돈으로 해결하려고, 못난 짓거리만을 하게 됩니다.
약1:26의 말씀을 보세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속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입 조심을 해야 할 우리들이 입 조심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입만 조심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입 조심을 못하기에 주시는 말씀이지만, 성도 각자가 자신이 어떤 악한 습성과 죄에 묶여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각자의 숨겨진 죄들과 싸워서 벗어나야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을 하지 않으면 썩어 냄새나는 음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모두에게 불편을 주는 자가 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만, 종국에는 실패로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모르고 헛된 수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진리의 말씀을 알고 순종하려는 그 과정이 있기에 결국 승자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전부터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중요함을 순종하라! 지켜 행하라! 로 대신 하셨던 것입니다.
신27:3, 8의 말씀처럼,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각자의 마음 판에 깊이 새기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각 세포마다, 뼈마디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셔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선택은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입니다. 늦으면 안 되기에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전부터 모세를 통하여 신신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나 한 사람 믿어서 복되고 복되게 하시려고 이런 수고를 감당하도록 강력하게 명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은 자신이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날마다 어떤 수고와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지 경건의 노력과 훈련 없이 신앙의 수준이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신앙의 수준이 어떻습니까? 스스로 점검하시고 당장이라도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시면서 보이는 작은 것부터라도 순종하셔서 예비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넘치도록 받고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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