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2/16/2019 - 사사기 15:1-20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2/16/2019 - 사사기 15:1-20

PastorYK 2019. 12. 17. 16:59

말씀: 삿15:1-20                                          

제목: 삼손의 사사로운 블레셋 보복

 

 

오늘 설교내용과 관계가 되어, 어제 (12/14/2019) 뉴스 시간에 들은 보도 내용을 전해 드립니다. 어느 지자체의 높은 지위에 있던 한 공무원이 관용 승용차도 사용하고 있는데, 장거리 업무 시, 피곤하다는 이유로 수천만 원 되는 Van을 구입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라의 세금 즉 백성의 피와 같은 세금으로 산 미니밴이기에 조사를 받고도 남아야 했는데, 심지어 그 미니밴 안에 안마 의자까지 넣어서 자그만치 7천만이라는 나라의 세금, 백성의 땀과 피를 흘려서 낸 세금을 이런 식으로, 적지 않은 공무원들이 낭비하고 있다는 보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가요? 이런 식의 세금 낭비와 직위 남용이 타당합니까? 우리들이 낸 세금을 이런 식으로 공무원들이 함부로 멋대로 권력을 가졌다고 하여 낭비를 한다면, 용인하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그들은 그들의 그 지출에 대한 조사 받고 이에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일벌백계로 삼아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사이었던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는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 즉 별정직 공무원이라고 해도 됩니다. 믿음의 어른입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되는 당시의 사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한 직책이기 때문에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로 직분을 이용하면 직권남용이기에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공적인 일로 받은 직분을 개인적인 곳에 쓰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런데 삼손을 보세요! 무엇을 위한 사사이었던가요? 특히 초유의 힘을 받은 신실한 사사로써 그 힘을 무엇을 위하여 쓰고 있었나요? 세상 즐거움과 그로 인하여 자기가 받은 자존심 회복과 화풀이용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 삼손과 지금 성도된 집사, 장로, 담임목사라는 지체들과 비교해 보세요! 무엇이 다른가요? 성도들이 무엇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던가요? 

 

희생과 섬김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직분자이던가요? 아니면 사리사욕을 위한 기도와 욕구를 채우고 있던가요? 다 자기의 개인적인 유익과 필요를 위하여 받은 거룩한 직분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적으로, 받은 신령한 능력과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타락한 삼손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 점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말씀이 필요합니다. 먼저 나실 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후에 거룩한 직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실 인에 대하여 더 살펴볼 말씀이 있습니다. 

 

삿13:5의 말씀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어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나실 인들의 머리칼은 마음대로 자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자라는 대로 놔두도록 하셨는데, 문제는 고전11:3-16의 말씀입니다.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관계이지만,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여자는 남자로부터 났고, 남편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아내이기에 그래서 여자인 아내는 머리가 길거나 모자를 써야 합니다

 

이런 율법은 남편인 남자에게 아내인 여자들은 반듯이 순복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기에 마땅히 모자를 쓰지 말아야 하고 머리가 길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남자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라는 뜻으로써 만약에 남자가 모자를 쓰거나 머리가 길다는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노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문화를 보면, 노예들만이 자신의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성도가 기도할 때, 머리에 덮는 것과 긴 머리는 그리스도 외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순복을 하고 있다는 의미로써 그리스도와 자기를 욕되게 하는 행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성도가 기도 시에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결코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노예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처럼 자신의 머리를 길게 길러야 하는 나실 인의 이 영적인 원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자가 남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요 차별을 하게 하였듯이, 나실 인에게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두라는 그 이유도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머리가 긴 나실인이 된 자기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성별된 자, 구분된 자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긴 머리를 허용했던 것입니다. 

 

신약의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성도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히브리 원어에서도 ‘하시딤, 케도쉼’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뜻은 신실하며 거룩한 자들 하나님께로 분별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하시딤과 케도쉼’이 영어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가 하면, 성도들 즉 Saint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서신에서 ‘신실하며 거룩한 자들, 하나님께로 분별된 자들’을 헬라어로는 ‘하기오이’로 기록했습니다. 결국 머리를 길게 기르도록 허락을 받았던 나실인은 신약의 성도를 계시하는 단어인 것을 알게 합니다. 특히 어디까지 연관을 시켜서 나실인, 성도라는 직분에 대하여 이해를 해야 하는가 하면, 고전6:19-20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가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내가 아닙니다. 예전의 나라는 존재는 이미 떠나고 새로운 내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갈5:24에서 성도 자신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갈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런데 문제는 삼손 자신이 나실 인으로써 정말 구분된 삶을 살고 있었는가를 오늘 삿15장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먼저 삿15:1-5의 말씀을 보면, 삼손은 자신의 아내가 친구의 아내로 된 사실을 확인하고는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서 각 두 마리 마다 꼬리를 묶어 그 꼬리에 불을 붙여서 풀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사기 15:1-5

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묶여진 두 마리 여우가 곳곳으로 어떻게 날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두 마리만이 아니라 150쌍을 그런 식으로 해서 불을 꼬리에 붙여 놓았으니, 곳곳이 불바다로 변하지 않았겠습니까? 상상이 가십니까? 결국 삼손의 개인적인 감정과 보복조치로 베지도 아니한 곡식단과 감람원을 완전히 불살라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겠지요! 삿15:6에서 알 수 있었듯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그 행위가 자신의 아내를 삼손 친구에게 준, 이것이 불살라 버리게 된, 개인적인 원인이었음을 알고, 삼손의 악행 때문에 삼손의 아내였던 그 여인과 그 아비가 불살라서 죽임을 당합니다. 

6.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그러자 삼손도 다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그 여인과 아비를 불태워 죽인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해 버립니다. 성경은 사사인 삼손의 개인적인 보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일이 끝나지 않고 삼손의 만행으로 이스라엘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합니다. 

 

블레셋 인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레히에 편만-널리 구석구석까지 가득 찬 상태-이라고 9절에서 말씀합니다. 

9.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결국 삼손은 동족 유다로부터 단단하게 결박을 받아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인도되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삿15:14입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이제 이방인 블레셋 손에서 죽을 위기에서 삼손이 다시 하나님의 신의 권능이 임하여 단단히 결박되었던 줄을 불탄 줄을 끊듯이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 천명을 죽이고 맙니다. 멋진 승리로 보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까? 나라의 구원을 위한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 개인적인 감정과 사사로운 일로 일어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사사입니다. 사사다워야 했습니다. 사사는 공인이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삿2:16-18의 말씀입니다.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하지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고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사사는 나라를 더러운 세상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받은 신령하고 거룩한 자입니다그런데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써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었습니까?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위기를 조성하는 자로써 사사로써는 대단히 부적당한 인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사들을 보세요! 삿3:11, 30, 5:31, 8:28입니다.

 

사사기 3:11

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사사기 3:30

30.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사사기 5:31

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사사기 8:28

28.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사사들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변변치 못했던 몇몇 사사들과 같이 삼손의 사역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삿15:20, 16:31의 말씀을 보세요!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단지 ‘지내었더라’라고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라엘의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로써의 그 거룩한 사명을 받은 사사 삼손이 얼마나 못난 짓을 했으면 이렇게 평가를 하셨겠습니까? 삼손의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 자신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로 그것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생긴 싸움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가능했지, 그냥, 삼손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더라면 그는 이미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엄청난 힘과 능력을 주셨지만, 삼손은 끊임없이 개인적인 복수로 말미암아 사사로써의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삼손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십니까? 우리도 구분된 거룩한 자로 은혜를 입었지만 삼손처럼 개인적인 일로 얼마나 못난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하고는 거리가 먼, 자기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므로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을 초래했습니까?

 

성도로써 개인적인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던가요?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고, 부끄럽게 하고, 어떤 성도는 개인감정과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가정과 교회까지 무너뜨리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간 큰 사람입니다. 사라질 보이는 세상의 것을 성도가 의지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벧후2:20-22의 말씀을 보세요!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그래서 빌2:12를 보시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라도 그 상태는, 세상의 더러운 뿌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죄의 뿌리들이  몸 속, 아주 깊은 곳까지 곳곳에 깊이, 아주 깊이, 푹! 배어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방심하거나 태만하면 어느 새에 자신이 세상 기준에 와 있다는 것을 뒤 늦게 느낄 때가 많이 있기에 늘 고민거리가 됩니다. 긴장하셔야 합니다. 틈을 주시면 안 됩니다. 긴장과 틈을 주지 않는 삶이 생활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삿15장의 말씀을 통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내용은 자신의 신앙이 바른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진단할 수 있게 합니다. 갈6:6-10입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아주 깊이 받아야지만 됩니다. 즉 말씀이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자신의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아니면 나는 죽어! 말씀이 자기의 생명과 동일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자기의 기업이 되지 않고서는, 성령의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시119:49-64입니다.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51.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5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54.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8.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60.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1.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이 고백이 현실, 실체가 되어야지, 단지 읽고 암기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삿16:17의 말씀을 봅니다. “삼손이 진정으로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네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자신이 구분된 나실 인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삼손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실인 사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만, 있었습니다.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도탄에 빠뜨리는 사사가 된 것입니다. 

 

부끄러운 사사로 인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삼손에게서만 볼 수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을 통하여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만 있기에 종교 행위만 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혀 부인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힘과 능력을 소유했던 사사 삼손을 보세요! 전부가 자기감정과 기준에 의하여 움직이기에 나타나는 결과는 순탄하지 못하고 나라의 태평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래도 성령의 역사가 있기에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시기, 질투, 근심, 원망, 의심하지 않고 평안, 화평입니다. 약3:13-18입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바른 신앙의 모습은 바로 평안과 화평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은 의롭고 정직하고 성결하기 때문입니다. 성결한 신앙은 어떤 처지 어떤 조롱 아픔 속에서도 의심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성결하지 못한 것은 이미 말씀이 떠나 있다는 뜻과 일치할 것입니다. 

 

삼손이 증인이고 그리고 삼손과 같이 살고 있는 평안이 없는 성도라 하는 우리가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약4:1-17의 말씀을 보세요!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싸움, 다툼, 비방은 정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싸움과 다툼과 비방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살길은, 승리의 영광스런 길은 주 앞에서 낮추면 그 다음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약4:10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자기를 낮추는 이것이 율법을 따르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평안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이 성령충만하지 못하기에 슬퍼하고 애통해 하고 울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기에 자신이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옛 자신과 싸울 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자기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했던 에덴에서도 결국은 시기 질투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하여 고난의 길을 얻게 되었지만, 바울처럼 그 기막힌 감옥 안에서도 아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급한 상황 처지에서도 바울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고백을 합니다. 빌4:13의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보세요! 바울의 그런 성령 충만한 놀라운 고백은 감옥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빌4:10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함께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리라”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도움의 손길을 받게 되면서 했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교회에서 돕고 싶어도 바울을 돕지 못했었지만, 이젠 다시 너희들이 나를 찾아와서 갇힌 나를 돌아보니,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선을 악으로 갚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생을 하는 너희들에게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고백을 다시 보세요! 빌4:11-12의 말씀입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신앙은 죽을 때까지 배워가면서 점점 달라져가야 합니다. 그러나 배워가시되 편하고 쉬운 쪽에서가 아니라 바울처럼 감옥이요 외면당하는 아픔과 홀로된 외로움 가운데서 신앙은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더욱 만족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제 1 본분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칭찬과 비난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프로다움으로 준비하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지혜요 능력이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찬양입니다. 삼손은 그런 영적인 준비가 없었기에 얼마나 부끄러운 사사이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당하고, 외롭고, 그래서 괴로운 그 과정이 복이기에, 삼손하고는 다르게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서도 감사로 고백하고 끝까지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어떤 성도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나는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된다는 그런 오해를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악한 도구로 자신을 드리지 마세요! 자기만 손해입니다. 이미 주신 이 성경 말씀을 따르는 그 선택만으로도 좁은 삶입니다. 자기 스스로 악한 도구가 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CS 루이스가 쓴, 당신의 벗 루이스’라는 책에서 아주 귀한 내용인, ‘아서 그리부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내용이 나옵니다. 들어보세요! ‘내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 같,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해 준, 논증들을 뒤집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없네, 그러나 예전의 회의적 습관의 불합리한 무게, 이 시대의 영(지금은 황금물질만능주의, 극 개인주의), 매일의 염려가 진리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앗아가 버려, 그래서 기도할 때면 존재하지 않는 주소지에 편지를 보내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다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아니야! 

 

내 합리적 지성은 온전히 확신하고 있지만, 그런 느낌이 종종 든다는 거지, 하지만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너무 자주 넘어지다 보면 다시 일어나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처럼 보이네,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일어나 걷는 것만이 분별 있는 일이니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편지의 끝을 맞는가 하면, ‘이런 일들에 대해 말은 참 잘하면서 정작 실천하는 바는 없으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말을 하면 실천은 안하게 되는 걸까?’로 끝을 맞습니다. 이해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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