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3/30/2025 이사야 45:1-25 본문

주일 설교 말씀

3/30/2025 이사야 45:1-25

PastorYK 2025. 3. 31. 08:53

말씀: 사45:1-25                                           

제목: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건축하는 사람이 공터에 집을 짓게 될 때, 그 집 주인의 마음에 쏙 들게 짓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나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재료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중에서 집 주인의 성향과 취향에 맞추어서 택해야 하고, 게다가 원하는, 마음에 드는 크기와 색깔까지도 맞추려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옷이나 가전제품을 살 때도 그렇고 사람을 만나 혼인하기까지도 보면 얼마나 고민하면서 힘든 결정을 하게 됩니까? 하물며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 우리들을 구원하여 항복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수고는 어떠할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없이는 안 되기에, 은혜를 입고 점점 항복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을 보면, 기적입니다. 무엇보다도 힘으로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어떤 특권이요 복이요 영광인지를 알아야 하기에 오늘도 그 사실을 사45장을 통하여 밝혀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45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다른 나라들을 고레스 왕에게 항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7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정복자로 세우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동시에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게 하시려는데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이 구원의 가치는 측량할 수 없는데, 구원인 그 의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솟아남과 같이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9-10절에서는 유대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그 누구도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1-13절에서는 장래 일을 예언할 수 있고 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레스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4절은 이런 역사하심을 통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15-19절에서는 하나님하고 우상을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20-25절에서는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열방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45장은 일어날 역사에 대한 말씀이기에 저도 이에 맞추어서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160년 후에 세울 바사국 고레스 왕에 대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모든 자녀들이 우상에서 벗어나, 힘이 아닌 역사까지도 주장하시면서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모든 예언되었던 말씀들이 다 거짓이면 몰라도 그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적들과 예언들을 보여 주셨는데 그 모든 예언들까지도 특히 사45:1-3의 고레스에 대한 예언까지도 예외 없이 다 사실로 역사를 통하여 99% 아니라 100% 증명과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들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 사실로 판단이 되었다면, 예언을 다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요? 여전히 의심해야 할까요? ~

 

특히 놀라운 점은 어떤 목사나 선교사가 능력이 나타나면 어떤가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능력의 그 사역자들에게 구름 떼처럼 모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요즘은 이단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그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보면, 그것도 참 기이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생기고 있는 것일까요? ~ 그러나 그런 증상은 지금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 때부터 계속해서 있었던 증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구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기적 속에서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타락하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북이스라엘은 완전 망했고 남유다도 보면 계속해서 어떻게 되던가요? 예수님 이후에는 나라까지도 거의 1900년간을 잃고 맙니다. 

 

특히 예수님 때에도 보면,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다는 점은 지금의 증세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기적을 따라다니면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그러나 믿는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표적만을 구하는 악한 세대라고 책망하셨던 것만으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다 자기 필요에 의하여 움직이는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자기 필요에 따라 움직이다가 보니까, 나중에는 그 기적이 자기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예수님 곁을 많은 사람들이 떠났던 것을 요6:66-68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십자가의 사형을 동의하여 결국 예언 그대로 예수님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실은 이단무리를 따라다니고 능력의 목사들을 추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필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또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데, 성령의 도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됩니다. 자기 필요, 감정, 상식과 대중의 힘에 의하여 믿게 되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의 특징은 힘을 따르던 자들과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린 스반 집사나 사도 바울을 통하여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하십니다. 먼저 스테반 집사를 볼까요?

 

행7:54-60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모습에서 누가 보입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눅23:32-38입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미움과 불평의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입어 고백하는 구약의 시편기자도 봅니다.

 

시33편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사45장하고 그 내용이 비슷하지 않나요? 은혜를 입으면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이 시편 33편의 내용이 우리들의 고백이요 찬양이요 간절한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과 찬양이 하루 온 종일 노래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가요? ~ 그 은혜로,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인간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보셨나요? 내가 지금 그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는데’ 어찌 잠잠할 수 있을까요? ~ 성전 된 나, 만세 전에 택함을 받아서 중생된, 거듭난, 완전 재창조 된 나, 나를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뜻인가요?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기에, 나 때문에 큰 바보가 되신 하나님이신데, 그 큰 사랑을 우린 사45장에서도 느껴지지 않던가요? ~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면 참 고레스로 오신 예수님을 통한 회복은 더 큰 사랑이 아닐까요? ~

 

 그래서 우린 그 사랑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하는데 교회의 현실은 점점 더 참담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구약의 어느 누가 모든 인류의 역사를 다 기록한 이런 성경을 가지고 있었던가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있었나요? 아니면 모세오경을 쓴 온유함이 승했던 모세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성군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 받았던가요? ~ 솔로몬, 그 위대했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들이 그런 성경을 갖고 있었을까? ~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신약의 우리들만이 모든 구약과 신약을 한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구약 전체를 가지고 모든 하나님의 그 일하심의 전 과정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볼 수 있는 자는 성전 된 우리들 외에는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게다가 모든 기독교의 핵심원리인 기독론이 예수님 떠나고 나서 1500년경이 지나서야 깊이 신학자들이 연구하는 가운데 다, 정리가 된 그 귀한 신학을 우리들이 이렇게 매주일 설교를 통하여 듣고 보고 배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조건은 최고입니다. 구약의 그 누구보다, 아니 신약의 초대교회보다도 실은 하나님을 더욱 닮을 수 있고 가장 크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최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젠 과학의 발달로 성경의 주석, 해석까지도 그리고 온갖 설교도 곳곳에서 늘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금 우리들의 신앙적인 특혜는 구약 성도들하고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조차에서도 그 특혜를 비교해 볼 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완벽한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영적인 수준과 상태를 보면, 구약의 타락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더 타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날에 안전할 수 있을까요? ~ 신약의 우린 구약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입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린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최고의 신앙조건 속에서도 아직도 말씀과 기도 없이 힘 때문에 세상 때문에 불평과 원망과 근심 속에서 방탕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큰 바보가 되셨는데, 그 큰 은혜를 입은 내가 세상에서 큰 권력을 쥐게 되었을지라도, 큰 재벌이 되었을지라도, 노벨상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이 세상에서의 아무리 큰 성공을 얻었을지라도 죽음과 심판은 아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믿음 때문에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승자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예수님 당시 비록 거지였지만, 구약의 말씀이 그에게 가난을 이기게 했을 것인데 어떤 말씀이 은혜가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이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29:45-46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구약의 말씀을 읽다가 보면, (출31:13, 사45:3, 6, 52:3-6, 60:15-16, 렘16:21, 겔13:23, 14:8, 15:7, 겔17:19-21, 20:12, 26, 38, 42, 44, 22:16, 22, 33:29, 34:27, 35:4) ‘알리라’라는 말씀이 곳곳에서 그들이 나를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되리라라는 말씀이 수없이 끼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드리고 싶은 것은 (1) 잘하든지, 못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결국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임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들처럼 자기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미련하여서 못하고, 죄성으로 악하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면서 인내하십니다. 그리고 결코 자기 유익을 구하시지 않으시면서 끝까지 보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알게 되면, 시91:14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나를 알게 하여 결국 내가 그를 높여주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나 아닌가요? 

 

(2) 우린 ‘알게 하시겠다’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정확한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알게 하시겠다’는 이 말씀만으로도, 은혜를 입은 나를 위한 것, 나를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 모든 말씀이요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이었다는 것이 확인이 된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하시려고 이 인간의 모든 역사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만을 오직 바라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을 따라간다고요? ~  

 

다 나를 위한 말씀이었고 다 나를 위한 그간의 역사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 놀라운 느낌을 가진 자녀들의 현실의 삶은 어떠해야 될까요? ~ 내가 사는 동안에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내가 누구를 부러워 하리요? ~ 이 고백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구약의 말씀을 보면 인간의 모든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이 다 나를 깨닫게 하고 나를 향하고 계신 말씀, 나를 여호와 하나님인줄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 모든 사건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시기에 구약도 이젠, 다 감동이 되게 하십니다. 

 

구원을 받아야 되는 나를 위한 모든 구약의 사건들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우주 만물이 창조된 이유요, 나 때문에 아브라함이 등장한 이유요, 나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세워지고 그리고 그 역사를 주신 것이요 그리고 나 때문에 오셔야 했던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시더니 결국 무엇이 이루어지던가요? ~ 만물의 창조와 더불어 생기는 그 모든 인류 역사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의 뜻을 위한 것인데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그 중심도, 힘의 나라가 아니라 잘사는 나라가 그 목적이 아니라 출19:5-6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며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거룩한 백성으로써의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 열방에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되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탄생된 신정국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초대 왕 사울, 둘째 왕 다윗 그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끝으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게 됩니다. 타락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후 점점 타락하게 되면서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 공격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되고, 남유다도 타락으로 바벨론으로부터 3차례의 공격을 받다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면서 주전586년에 모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70년간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70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하여 제 2 스룹바벨 성전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사장 나라의 그 중심인 성전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독이 됩니다. 

 

결국 마24:1-2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 2 스룹바벨 성전이 작았기에 당시 로마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왕이 큰 성전을 다시 지어 이스라엘로부터 인심을 얻으려고 거의 40년간에 걸쳐 세워진 헤롯 성전이 주후70년경에 로마의 공격을 받고 말씀하신대로 완전 파괴가 되고 맙니다. 돌 위에 돌이 남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성전을 통하여 제사장 나라로써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기적이 일어나던가요? 망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열방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보이던 건물 성전을 다 포기해 버리시더니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을 모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워주시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건물이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자, 성령을 받은 성전 된 성도들을 통하여 드디어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수많은 기적 속에서도, 그 큰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도 하나님의 그 뜻을 전혀 할 수 없었는데, 제사장으로서의 그 역할을, 성전 된 성도들을 통하여 이루어버리시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영원한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성도들을 통한 이 성취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어떤 놀라운 일이 숨겨 있었는가 하면, 죄로 죽은 자녀들을 한 영혼도 빠짐이 없이 온 역사를 통하여 다 회복을 시켜 버리시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실은 영혼의 회복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쓰여져야 했었지만, 그렇지 못하므로 멸망을 당하고 말았는데 은혜를 입은 성전 된 성도들을 통하여 죽은 영혼들을 위한 아름다운 발이 되어 하나님을 믿는 기적을 이루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케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도 그 은혜로 회복이 되어 죽은 자를 살리는 그 기적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가요? ~

 

물론 회복의 기적은 단지 신분의 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닌데, 마치 끊어진 기차 철로처럼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 목표까지 가야 되는데, 그것이 회복된 자녀들만이 알 수 있는 기적의 연속이요 영원한 승리의 행보요 영광이요 자랑이요 감격과 감동인데 가다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과 도움과 수고로 얻은 구원으로, 회복이 된 사도 바울을 보면, 어떤가요?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all in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위대했던지, 그 은혜가 얼마나 소중했던지 그래서 바울이 어디까지 참고 어떤 수고를 했던가요? 

 

고후11:23-28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빌4:4-8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내려놓았습니다. 다 맡겨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나 죽어 이웃을 살리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치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구약 내내 실패했지만, 이 회복의 기적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령을 보내주시더니, 성전 된 자녀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어 그 소중한 영혼들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망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까? ~ 어떻게 구원을 받은 자들이 세상의 형통이 구원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불신과 미움과 다툼과 거짓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은혜를 입었는데 불평을 할 수 있다고요? 은혜를 알던 시편기자도 고백합니다.

 

시32편입니다. 1-2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죄 사함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이 복인지를 알면, 보세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3-5절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자기의 모든 허물들을 다 고백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고백했던가요?

 

6-7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자기의 허물을 감쪽같이 감추면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보호는 감추지 않고 다 고백할 때 이루어지더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 고백할 때 안전이 보장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깨달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8절입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시고, 우리들을 주목하여 훈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가르쳐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멋대로 살지 말고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하지 말고 철저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심하게 매 맞고 돌아오지 말고 말씀을 하실 때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항상 찬양할 줄 알아야 한다고 9-11절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결론입니다. 나의 이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여 높여주시려고 인류 심판이 홍수사건을 비롯하여 구약의 성막과 성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리고 그 후에 지금까지 나를 위한 시간이요 사건이요 역사였습니다. 나의 그 가치를 아시나요? 나의 구원을 위하여 아담부터 지금까지 동원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들이 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동원되어 어떤 수고를 했는지 느끼실 수는 있습니까? 

 

특히 이 성경을 나에게 주시려고 수천 년에 걸쳐서 모세를 시작으로 수십 명의 주의 종들이 한 자, 한 자 틀리지 않으려고 온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하여 두루마리에 기록하려고 평생 흘린 땀을 생각해 보세요! ~ 나를 이렇게 존귀케 여겨주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요? ~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이 나의 승리요 실패요 자랑이요 부끄러움입니까? 나의 주인, 나의 왕이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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