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3/16/2025 이사야 43:1-28 본문

주일 설교 말씀

3/16/2025 이사야 43:1-28

PastorYK 2025. 3. 17. 13:28

말씀: 사43:1-28                                           

제목: 너는 내 것이라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남녀 간에 사귀면서 자기가 상대방을 향하여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가 어렵던가요? 아니면 쉽던가요? 아니 부모 자식 간에도 사랑한다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깊은 관계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런 집안이 얼마나 되던가요? 저의 집안만 보더라도 아버지로부터 살아 계시는 동안에 자녀들에게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신 적이 아마도 한 번도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술 한 잔을 하시는 어떤 날이면, 당신의 마음에 그것이 늘 걸리셨는지는 몰라도 ‘야! 사랑한다고 말로 꼭 해야 되니? 아니야~ 마음이 중요한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얼마나 귀한 마음의 말인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고백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볼 때, 참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하게 된 주일말씀입니다.

 

오늘 사43장에서 바로 ‘너는 내 것이라’는 이 말씀도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가장 어려운 말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은 어떤가요? ~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이 왜 가장 쉬울 수 있고 또는 가장 어려울 수 있는 것인가? 일반적인 편에서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이 정말 어려울 수 있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이 나오지 않을까요? ~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면 또는 사랑해도 성격상, 그런 표현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어려운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43장을 통하여 ‘너는 내 것이야’ 라고 분명하게 고백하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것이야’ 라고 분명하게 고백하셨는데, 그 고백을 보셨을 때, 여러분들은 그 고백에 대하여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그 느낌, 어떤 그 가치 또는 어떤 그 강도가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어떤 기도를 드렸던가요?

 

엡1:15-19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구원의 크기가 어떤지 알아야 되는데 알게 되면,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너는 내 것이라’는 이 표현도 어떤 차원일까요? ~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는 내 것이라’는 이 표현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상상도 불가능한 하나님의 고백이기에 그래서 우린 이 고백을 생각할 때마다 기절초풍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서 그 자리에서 놀라 죽어야 되는데, 오히려 얼마나 차갑고 또는 대수롭지 않게, 별 느낌 없이 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슬픈 반응이 가능할까요? 어찌 이런 무감각으로 교회에 출입할 수 있을까요?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그건 ‘불가사의’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간밤에 ‘너는 내 것이라’는 이 말씀 때문에 놀라 기절초풍 하여, 기절하셨나요? ~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그 강도가 점점 더 강하여져서 emergency를 불러 늘 입원해야만 되었던가요? ~ 그 정도의 거룩한 damage가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기에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들의 근본이 죄 덩어리들이기에 그러나 은혜로 인하여 죄에서부터 벗어난 거룩한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실체에서 여전히 자기만이 왕이 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고 싶어하는 그 죄의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어떤가요? 은혜를 입었을지라도, 신앙인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을지라도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으로 또는 이웃의 종으로 살 수는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어떤가요? 은혜를 입다가 보면, 특히 어떤 능력의 은사를 받아 주변의 대우를 받게 되면, 자기의 그 근본 실체를 까맣게 잊게 되면서 힘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요? 마치 천하를 다 거머쥔 자처럼, 날뛰지는 않던가요? 그래서 얼마나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고 심지어 교만하다는 책망까지도 피할 수 없었던 경우가 있지 않았나요? 평생 경건의 훈련을 하지 않고서는 누구든지 말씀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면할 수 없었을텐데, 이 점을 간과했고, 놓쳤던 것입니다. 은혜를 입으면 처음에는 단지 신분의 변화일 뿐이지, 수준의 차원에서는 거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간과했기에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게 되면, 겸손하고는 거리가 먼 자가 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러나 성경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런 자기의 힘의 굴레에서 벗어나, 모든 소유권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까지도 그리고 자기의 시간과 재산과 물질과 능력과 소망과 그리고 대인관계, 가족관계까지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에게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종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요? 이제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은혜이기에, 그 은혜가 거룩함을 이루기 위한 능력이기에, 그 은혜가 없으면 안 되기에 그래서 은혜를 주셨지만 은혜를 통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과 창조의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한 이 놀라운 성경을 주시면서 이 성경이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신앙의 양식이 된 것인데, 그래서 우리들이 육의 양식을 늘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듯이, 영의 양식인 성경도 육의 양식처럼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함께 점점 주님을 깊게 닮아가야 했는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요? ~ 성경이 정말 자기의 영의 양식이기에 육의 양식처럼 먹고 있나요? ~ 은혜를 입은 자녀들은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맺어갈 수 있도록 하시려고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귀한 말씀을 우린 사43장에서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43:1-7의 말씀을 다시 또 보세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아니 어떻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우리들이 이런 고백을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받을 수 있나요?~ 정말 기절할 노릇이 아닌가요? 이런 고백만으로도 대만족해야 되고 무엇을 더 바랄 수가 있을까요?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능하지 못함이 전혀 없으신 그리고 나까지도 이미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사43:21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찬송을 드려야 되는 나를 위하여 죄에서부터 건져,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신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나요? 누가 여러분의 주인이시고 왕이십니까? 여러분들의 지금까지의 일희일비가 무엇입니까? ~ 나를 창조하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게 하시려고, 믿어서 하나님만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그동안에 어떤 기적과 사랑을 보여주셨는지, 잊지 않으시면서 그분과 동행하시다가 오신 오늘 이 자리이어야 하는데 그런가요? ~ 정말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전심으로 순종하시려고 말씀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복과 특권으로 여기면서 굳게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습니까? ~ 

 

만약에 여전히 말씀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복과 특권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래서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다면, 그건 아직도 ‘자기가 내 것,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것은 결국, 자기는 힘의 사람이라는 것인데, ‘너는 내 것이라’는 그 가치를 모르고 그 특권을 놓치고 사는 자녀에게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사43:22-28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43:22-28의 말씀을 봅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 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반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에게 욕되게 하며 야곱이 진멸 당하도록 내어 주며 이스라엘이 비방 거리가 되게 하리라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괴롭히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이 악한 모습이 지금의 자기하고 자신 있게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의 자기를 확인하게 하는 사43:22-28의 말씀인 것은 아닙니까? ~ 자기가 만약에 은혜를 입었는데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복과 특권으로 여기지 못하여 굳게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자기는 힘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님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가 하나님의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 말씀과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 구약의 그들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기에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워주신 나라까지도 지켜내지 못하여 결국 망하고 맙니다. 망하여 침략국이었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70년간 유배되어 있었다가 다시 또 약속하신 그들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왜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내내 시종일관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돌아오게 하셨는데 돌아오게 될 것을 사43:5-7에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돌아옴은 회복, 중생, 거듭남을 상징하고 있는 돌아옴입니다. 상징적인 이 돌아옴의 성취가 즉 회복이 드디어 메시야를 통하여 약 700년 만에 십자가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아직도 예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때까지는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구약 내내 자신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지, 얼마나 신실하신지 등 온갖 정보에 대하여 일일이 다 보여주시고, 다 듣게 하여 주시고, 그리고 너희들을 사랑하시기에 찬송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지 않은 기적이 없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만을 믿게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43:19-20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그 새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짐승까지도 승냥이, 타조까지도 하나님을 존경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린 하나님을 존경하고 있나요? ~ 그러나 구약 내내 눈과 귀가 멀어 있었던 이스라엘은 다 보았고 들었지만 하나님을 원하지도 부르지 않았더라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이스라엘인 것을 알게 합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괴롭히는 자녀로, 하나님을 일도 공경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가 아니라 결국 약속의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이, 회복이, 중생이 되면서 지금 이렇게 이방인이었던 우리들까지도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놀라운 복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사42:9의 말씀처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사43:19에서도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결국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들이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고 듣게 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는 복된 자들이 된 것입니다. 나의 실력과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100% 도움으로 인하여 얻은 구원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드릴 수 있는 찬송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편기자는 시편24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찬송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공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의를 얻을 것이라는,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시편기자도 이 정도라면, 그러니 다 성취가 되어 믿게 된 지금 우리들이야 말로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있을까요? ‘너는 내 것이 되었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있을까요? 의심할 수 있을까요? 내 몸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드려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더 이상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라’에서 순종을 기꺼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가요? 지금 우리들이 믿고 있고 있기에 날마다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나요? 날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나요? 

 

물론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다수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보았고 들었지만, 늘 못난 짓거리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자랑과 기쁨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못난 짓으로 숨기 바쁘고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회개는커녕 힘의 삶에 대하여 당당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날마다 도망 다니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는 식입니다. 돈만 있으면 만사 ok라고 하면서 악을 지속적으로 쌓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고전6:19-20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가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에, 더 이상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면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물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요? 여전히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닌데도, 자기 것인 냥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마16:2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즉 너의 몸과 마음도 이제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간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피하던 자기 십자가를 이젠 자기가 직접 지고 주님을 전심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야 되는 이유는 그 분만이 참 복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없는 삶을 먼저 보면, 주님이 없는 자에 대하여 아주 자세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습1:6-18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와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 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주님이 없으면 습1장에 기록한 이런 저주에서 못 벗어나기에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망함에서 벗어나, 승리자가 되려면, 습2:1-3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요, 자기부인은 역시나 너희들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너희 것이 하나도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연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을 따라갈 수도 없고, 자기의 정직함, 참됨 그리고 경건함이 없으면 공의를 행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겸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25편에서 7-11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이렇게 분명히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자녀들의 모든 죄들을 말끔하게 사하여 주시는 분이라고 내내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시32:5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103:11-12도 보세요!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그리고 사43:25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결국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 누구라고요? 바로 하나님이심을 이렇게 말씀으로 계시하셨으나 그러나 힘의 사람들인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죄 사함을 명하시자, 뭐라고 하던가요? 감히 요한의 아들이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해 하면서 결국 죽이기로 했던 것입니다. 

 

막2:6-8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말씀을 안다고 했지만, 이 말씀만 보더라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말씀을 들고 다니고 통독을 하고 수십번을 읽었을지라도 말씀을 모르면,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너는 내 것이라’는 그 놀라운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참담하다고 정죄하면서 결국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고 힘으로 살아가게 되면, 바로 유대인들처럼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분을 다시 또 죽이려고 했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 못하면 진리의 복을 차고 저주의 독을 마시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행복을 버리고 불행을 선택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라’는 그 복된 말씀까지도 자유와 기쁨이 될 수 없게 되면서 다시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현실은 슬픔과 환란 속에서 소망 없는 죄인으로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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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025 이사야 41:1-29  (17) 2025.03.03
2/23/2025 이사야 40:1-31  (17) 202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