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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12/1/2024 이사야 28:1-29 본문
말씀: 사28:1-29
제목: 기묘한 경영과 광대한 지혜
우리들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지혜와 지식이 자신에게 그리고 살아가는데 어떤 힘과 능력이 되던가요?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전하고 가르치는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던가요? 자기의 악하고 더러운 죄의 본성을 제압할 수 있었나요? ~ 선과 승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 다들 그들의 가르침을 보고 듣는 자들이 자신의 지식이 되고 지혜가 되기도 하지만, 물론 감동도 있고 도전도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떤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것이 되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의 진정한 힘과 능력이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가장한 힘의 목사와 선교사가 되기고 하고 신부와 수녀가 되기도 하고 스님, 또는 무당, 점쟁이, 이단이라고 하는 각 종교 단체들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지만, 성경으로 그들을 보면, 어떤가요? 나라와 역사에서 존귀한 자로 인정을 하고 인정을 받을지라도 실은 악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타락한 모든 인간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 복음은 어떤가요? 성경에서 주시는 교훈과 가르침과 은혜는 어떤가요?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빛과 소금이 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합니다.
그 결과가 성경을 위장한 이단 기독교나 일반 종교들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 결과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고 복과 저주로 나뉘고, 행복과 불행, 승자와 실패자로 영원히 나뉘고 말기에 그래서 하나님의 경영은 기묘하고 지혜는 광대하다고 하십니다. 완전한 복과 승자로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주시는 말씀을 보면, 어떤가요?
1절을 보세요!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왜 하나님께서 여기에서도 타락한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다시 또 예언하시는 것일까요? 지금까지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심판에 대하여 제1장에서부터 12장에 걸쳐서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열방에 대한 심판은 제13장-23장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24-27장까지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승리를 통하여 공의와 평화가 가득한 메시야 왕국을 예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28장부터 35장까지는 이러한 1장-35장의 그간의 전 내용에 대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을 선민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저주와 복의 노래를 통하여 앞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중에서도 사28장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의 노래입니다. 사28장에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의 노래를 통하여 은혜를 입은 너희들은 결코 이 전철을 밟지 말라는 차원에서의 반복이고 또는 은혜를 입기 전의 상태를 다시 보여 주시면서 왜 은혜가 필요한 지도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린 다시 사28장에서 하시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의 노래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그들이 어떻게 해서 망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화가 아닌 약속의 복을 이루어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과 손길, 즉 섭리와 경륜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얼마나 기묘하시고 지혜가 광대하신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북이스라엘이 망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1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주전 793-753년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할 때입니다. 그 때에 북이스라엘은 가장 부요했었다고 왕하14:23-27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 십오 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타락했었지만 단지 그렇게 약속을 해 주셨기에 그래서 부와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요함을 통하여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다 타락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방종했는가 하면, 다들 술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28:1을 통하여 망하고 말 것임을 예언 하셨지만, 결국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망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요함을 오용하면 결국 세상의 오락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요? 지금 선진국들의 현실에서도 당장 확인이 됩니다. 특히 부요한 자들이 술과 마약과 오락으로 어떤 꼴을 하고 있던가요? 특히 지금까지도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내내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가요? 부로 인하여 무너지고 있는 그들이 자기들이 어떤 종말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남의 역사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화 있을진저 하고 저주가 임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저주입니까?
사28:2-4에서 알 수 있는데 2절부터 봅니다.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싹 쓸어버리시겠다고 강력하게 확실하게 제거해 버리고 말겠다고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3절에서는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교만한 그들의 면류관을 발로 밟아버리고 말겠다고 하십니다. 힘의 명예, 승리, 자랑 그 모든 것들을 다 짓이겨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남아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협박도 공갈도 아닙니다. fact임을 역사 내내 그리고 특히 구약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런 역사를 보고 듣고 나서 확인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어떤 결정과 결단을 내려야 할까요? ~
놀랍게도 힘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자기도 부와 힘을 가지면, 가지 말아야 되는 교만의 길을 택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한 쪽을 택하고, 술 취함이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사납고 악한 더러움이 아니라 선하고 착한 경건의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거짓말만 하던 자신을 정직한 자로 세우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어떤 기묘함이신지 그리고 그 지혜가 어떤 광대하심인지를 알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복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까?
사28:5-6입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남은 자에 대한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남은 자들이 힘의 사람들과는 완전 반대로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화관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린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 즉 남은 자의 그 가치를 알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의 약속의 복을 이렇게 예언하여 주시면서 그 예언을 이루어주시는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완전 순종하라,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28:7-8을 보세요.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아무리 도와주시더라도 어떻다고 하십니까? 그들이 포도주와 독주로 인하여 선지자들은 주신 말씀 즉 환상을 잘못 해석하고 제사장들은 취하여 재판을 실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으니,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꼴을 볼 때, 은혜를 입어 순종하여 경건함을 만들어 가는 너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리고 지혜가 얼마나 광대하신 하나님이신지를 호흡하는 동안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교만한 자들에게 지적해 주시는 것이 있는데 사28:9-10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교만한 당시 나라의 정치가들이나 타락한 제사장, 선지자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하는 선지자들을 향하여, 왜 나라의 지도자요 어른인 자기들을 우습게 여기는가? 어찌 자기들의 신앙 수준을 낮게 여기는가?
마치 이제, 젖을 뗀 갓난 아이들을 대하듯이,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고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설교가 유치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불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 자기 뜻대로 힘의 설교를 하지 않는가? 왜 이스라엘이 타락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게다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설교를 듣지 않던 그들은 자기들을 풍요롭게 해 주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고 멋대로 설교를 하고, 게다가 숨어서 악한 짓거리를 계획하더라는 것입니다.
몇 군데만 찾아봅니다. 시28:5, 시64:2-6, 사29:15, 렘14:10-14, 렘26:1-9, 암5:10-13, 미3:5의 말씀입니다. 저 역시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을 무시하거나 어린아이 취급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씀을 전하자, 이를 가볍게 여겼던, 교만했던 자들의 실체를 보면, 시28:5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64:2-6입니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사29:15입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렘14:10-14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 도다”
렘26:4-9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암5:9-12입니다.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미3:5입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결국 그들의 교만함으로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사28:11-13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나라를 섬겨야 되는 지도자들이 교만함으로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고, 결국 어찌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으로 설교를 할 수 있냐고, 교만을 떨던 자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경고를 하셨지만 회개하지 않으므로 결국 예언하신 그대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을 지금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요? 설교 때마다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고 대하고 있던가요? 당시 망했던 정치인들이 그랬기에 그래서 수준을 높여 말씀을 전해도 여러분들도 그들처럼 자기의 수준에 차지 않아서 불평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이 낮아서 자기 신앙수준하고는 맞지 않아서 그래서 말씀을 잘 아는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합니까? 자기의 삶의 모습이 믿음의 빛이 나고 남의 유익을 구하고 남을 자기보다 높게 여기고 있나요? ~ 악을 선으로 갚고 있나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고 있나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전혀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도 의심도 요동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감사하고 기쁨의 찬송을 쉬지 않고 있나요? ~ 분명 쉽지 않습니다. 거의가 그 반대일 것입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요?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일한 말씀이지만,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고 있는 설교가 어떤 설교인지를 모르겠지만, 이사야가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예레미야가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에스겔이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그 내용이 어떻게 어린 아이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나요?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순종하기가 어려워서 쩔쩔매고 있는데, 특히 은혜는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다 드러내어서 죽을 때까지 고쳐가면서 점과 흠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은혜이기에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면, 어떤가요? 힘의 신앙, 인과응보가 되면, 결국 망합니다. 무너지고 맙니다. 왜요? 순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불가능하기에, 자기의 모든 죄를 감추게 되는데, 죄를 감추면 결국 스스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말씀을 율법차원으로 이해하던 구약의 교만했던 자들의 신앙수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초등학교 수준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갈4:1-3입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율법 아래의 신앙 수준은 초등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초등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늘 비교하면서 불평하게 되지, 분별도 쉽지 않기에 감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말씀을 인과응보의 차원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에, 조금 전에 여기저기서 힘의 신앙을 가진 그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힘의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그 선지자들이 미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했기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선지자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선지자요 제사장인 자기를 감히 무시할 수 있냐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 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또 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여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나요? 말씀이 자기의 소망이고 기도이고 즐거움이고 모사이고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기에 늘 감사하고 있나요? 늘 자족하고 있기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제압하고 있나요? ~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신앙을 확실하게 갖지 않으면 또는 자기 신앙이 자라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아무리 도와주시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자라가고 있다면, 무엇이든지 찾아서 여기저기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죽어 이웃을 살리는 십자가의 선택도 기쁨이요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되어 그 작은 일에 동참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자신이 남보다 넉넉하고 좀 더 안전한 삶이 유지될지라도,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또는 자라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그 힘과 달란트까지도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참 가난할지라도 약할지라도 믿음의 확신이 있으면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면, 그 약점이 강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되고, 미련함이 지혜가 되고, 부족함이 나눔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믿음으로 평가되지, 자기 기준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28:14에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만한 자들은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왜요? 사28:15입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 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오만한 자들의 이 교만이 웃기지 않나요? 소, 양, 모든 짐승까지도 아니 산천초목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힘의 그들은 거짓과 허위로 다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자신만만함이 가소롭기가 짝이 없는데, 사28장 그 당시의 오만한 자들의 이 태도와 반응과 지금 21세기의 힘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다릅니까? ~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힘의 거짓에 속고 있고 재물의 허위로 해결하겠다는 것을 보면, 이젠, 힘의 거짓, 재물의 허위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여전히 무엇이 최고입니까? 무엇이 자신의 안전이고 기쁨입니까? ~ 힘의 그들이 믿고 있는 것들이 실은 다 거짓이요 허위가 아닌가요? 어찌 자기의 목숨을 영원히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세상의 헛된 것에 자기의 영혼을 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이지만, 살길이 있는데 사28:16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을 또는 말씀을 의지하고 믿어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내내 어떤가요? 사28:1-4에서 확인 했습니다. 모두가 타락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타락의 내용은 사28:7-13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말씀을 맡았지만 그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열방과 언약을 맺는 정치인들의 타락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28:17-22에서 그 점을 다시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나니,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대상14:8-17)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수10:1-15)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다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세상의 거짓된 모든 이론과 사상까지도 다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믿던 세상의 것들로 인한 것이 재앙이 되어 그 재앙이 너희들을 밟게 되는데, 침상에서 조차도 결코 쉴 수 없고 이불이 좁아서 몸을 쌓지 못하는 것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사28:23-29를 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미나리과)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농부가 봄부터 끊임없이 땀을 흘리다가 추수 때, 많은 곡식과 열매를 거두게 되는데, 소회향이나 대회향 같은 것들의 작은 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심하게 반복해서 두드려야 되는데, 그 도리깨질과 타작이, 포기와 버림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서 좋은 결실을 이루기 위하여 하시는 연단이라는 점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농부가 곡식을 타작하는 것이 알곡을 깨뜨려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알곡을 얻기 위한 것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것도 결국은 자녀들의 죄의 껍데기를 벗겨 알곡과 같은 소중한 성도가 되기 위한 것임을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죄로 영원히 버려질 무가치했던 자녀들을 알곡으로 존귀한 자녀들로 재창조하셔서 복되고 귀한 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경영하심과 지혜가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이신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경영하심으로 재창조된 그 귀하고 복된 자녀들이 어디에 있나요? ~
바로 우리들이 바로 내가 그 증인이 아닌가요? ~그 증인들이 모인 교회가 산돌교회가 아닌가요? 25주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작지만, 귀하고 복된 나 한 사람이 지혜와 그 경영하심이 무한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 작음과 가난함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한 영혼, 한 영혼이 그 놀라우신 지혜의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고 있다면, 의지하고 있다면, 부러워 할 것이 어디에 그 한 개라도 있을 수가 있을까요? ~ 자기가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 교회의 크고 작음, 부와 가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환경을 탓하지 마시고 우리의 작은 마음이라도 합하여 어려움을 하나씩 풀어간다면, 가난하지만, 서로 나누면서 부족함을 해결하면서 행복을 주고 행복을 느끼는 교회, 행복과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는 생명이 유지되는 교회가 된다면, 많아서 불평하고 미워하고 다투는 교회, 규모가 커서 서로 관계없이, 마음의 교제 없이, 누가 누군지를 몰라서 믿음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마치 죽은 나무와 같은 교회들하고 어떻게 같을 수가 있을까요? 건강한 암수 한 쌍의 송아지가 낫지, 그 넓은 초장에서 수천, 수만 마리 송아지들이 광우병에 걸려 다 폐기 처분해야 된다면, 그 큼과 많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지혜가 광대하시고 경영하심이 기묘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난과 부와 강함과 약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문제들을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잠시의 영광과 승리에 속아 한 눈을 팔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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