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2/8/20204 이사야 29:1-24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2/8/20204 이사야 29:1-24

PastorYK 2024. 12. 9. 13:03

말씀: 사29:1-24                                            

제목: 쉬지 않고 주시는 반복된 말씀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자기 가족과 자기의 죄를 덮으면서 천하를 힘으로 거머쥐려고 하다가, 이를 막으려는 방어세력으로 인하여 어떤 짓을 하던가요? 나중에는 계엄까지 명하여 입법부와 사법부를 장악하려고 했지만 국민의 반항으로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한 통치자의 어리석은 계엄으로 온 나라는 혼돈과 혼란 속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지, 어떻게 이 힘의 세력들을 잡아 문제를 해결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조차도 이번 계엄은 위법이라고 했습니다. 각 나라에서도 이번 계엄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결국 탄핵까지 이르면서 대통령이 감옥에 가야 되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만을 보더라도,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또 한번 파악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경고하던 힘의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다시 또 확실하게 확인이 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힘의 삶은 그 결과가 상처와 불화와 깨어짐 그리고 혼돈과 혼란으로 이어지면서 수습이 아니 되면 나라도 망하고 만다는 것이 아닙니까? ~ 물론 이런 한심스러운 사건은 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한, 계속적으로 반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한, 똑같이 망하는 그 꼴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고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 반대로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더욱 하나님에게 더 깊은 감사를 드리는 기회가 된다는 점을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설교를 이어 가고자 합니다. 오늘 사29장의 말씀의 내용이 어떤가요? 무엇을 느끼셨나요? 저는 느낀 점이 여러 가지였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자기 성적, 기록, 또는 실력을 늘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오직 반복, 끝없는 반복, 될 때까지, 그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반복 외에는 없다는 것을 사29장에서도 또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속되는 불순종에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회복의 말씀을 여전히 반복적으로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단번에 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가요? 거의가 단번에 해결하려는 아주 교만하고 간교한 마음을 갖고 있기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힘의 사람들은 모두가 갈수록 쉽게 간단하게 성공하는 길을 찾느라고 모든 시간과 힘을 쏟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후회와 실망만이 남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어떤가요? ~ ‘이 돌대가리야, 좀 남의 이야기를 듣지, 고집을 피우다 결국 이 꼴이 됐니?’ 하면서 ‘오히려 그 시간과 힘을 서두르지 말고 반복하더라도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했더라면 이 꼴, 이 실패는 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를 하면서 나름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의 새벽 기도로 또는 40일간의 금식으로 또는 어떤 집회에 가서 은혜를 입었다는 것으로 신앙이 해결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신학교에 가서 졸업을 하여 목사가 되어도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반복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 실은 바른 선택이고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자기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어떤 말씀들을 계속해서 구약에서 하고 있던가요? 왜 망하는지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같은 말씀이 수천 년을 통하여 계속해서 이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3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약의 역사는 진리의 말씀으로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대마다 그 사건과 인물들이 다 다르지 그러나 구약의 그 내용은 늘 동일합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내용이 타락과 실패로 가득 차 있지만, 실패로 가득 찬 구약에서의 목적과 목표도 실은 거룩함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 삶의 본이 되어 화목과 화평을 이루어라! 그래서 주시는 모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29장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내용을 간추려보면, 사29장을 통하여 하시려는 말씀은 사28:23-29에서 보여준 바,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범죄한 백성에 대해 징계하시되 그 징계의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연단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보내드렸는데, 이 교훈을 보다 실증적으로 사29장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사29:1-4에서는 죄의 값으로 죽임을 당한 가축들이 번제단에서 타는 것을 의미하는 ‘아리엘’로 불리우는 예루살렘이 이방 군대에 포위되어 타는 번제단인 아리엘처럼, 멸망의 위기를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면서 그리고 5-8절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인 구원을 갑자기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왕하19:35-37에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봅니다.

 

왕하19:35-37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예언을 하신 그대로 현실이 되게 하신 것입니까? 당시 히스기야 왕을 비롯하여 남 유다 백성들이 왕하18:21에서 알 수 있는데, 말씀을 봅니다.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한 갈대와 같은 애굽을 의지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였는지를 뼈가 부스러지는 심한 고통을 앗수르를 통하여 잠시 주시면서 다시는 힘으로 해결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결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앗수르의 공격을 허락하신 것이 연단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연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세상의 힘인 앗수르를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패 속에서 주시는 승리의 메시지는 사막에서의 생수와 다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러나 주시는 승리의 메시지가 현실이 되는 것을 볼 때, 소망이 되어야 하는데, 어떤가요? ~ 

 

그날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자로서, 승리의 말씀이 힘과 위로와 기쁨과 감사를 드리게 하시던가요? 그래서 구약에서의 그 소망의 승리의 메시지를 보시면서 은혜를 입은 성도된 자기 자신은 고통스러운 현실까지도 인내하게 하던가요? 게다가 그 소망이 자기가 죽기 전도 아니고 죽어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백골이 진토가 된 후에 이루어질 회복이요 승리라면, 어떤가요? 다들 아연실색하지 않을까요? 왜요? 자기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하시고 있는 전체 약속을, 계획을 모르고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어떤 계획과 약속인가요? 그날 심판과 함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알아야 되는 것은 그날이 되면, 모든 인류는 다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날의 심판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과 계획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은, 순종하게 되면서 자기의 기준과 가치를 말씀에 두려고 몸부림을 치던 그들은 그 믿음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획된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외면하고, 당장의 승리와 부를 위하여 살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으로 예외 없이 약속된 불 속으로, 영원히 갇히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히11:6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신 은혜요 믿음인데 그 믿음과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던가요

 

이삭을 얻기 위한 은혜요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믿음과 상관이 없는 일반 종교와 다르지 않기에 기독교에서 말씀하는 믿음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녀들은 주신 그날의 약속이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후에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날을 믿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에녹처럼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서 자기의 백골이 진토가 될 때에 이루어지는 약속일지라도 조금도 문제로 여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날이 되면, 만 년 전의 사람들이나 만 년 후의 사람들 모두가 만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심판하시는 그날, 다 살려,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하루하루가 만년 전의 성도나 만년 후의 성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시간 차이로 평가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을 향한 하루하루이기에 자기가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믿음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힘으로 살았는가로 나뉘기에 성도들의 하루하루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그 하루가 내일의 승부를 결정하는 그 과정 속에서의 하루요 시간이기에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죽을 때까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다가 만 년 전에 살다가 죽더라도, 그 사람의 시작과 끝이 다 남아 있기에, 다 기록, 녹음이 되었기에 만 년 전 성도라고 하여도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히11:7-10, 13-16입니다.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수천, 수만 년 전의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지금까지도 완전 회복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요셉도 어떤 유언을 하던가요? 창47:28-31, 창50:24-25입니다. “창47:28-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창50: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날을 기다리면서 그날을 준비하다가 천국을 소망하면서 임종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시간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서 반복을 계속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기에 불변하기에 성도들은 완전 회복에 대한 약속의 그날이 수 만 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일지라도 소망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들의 하루는 우리들의 현실은 실은 영원하고 연관되어 있기에 사라지는 시간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만 년 후의 있을 심판이라고 해도 그날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히11:1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의 하신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이 다 이루어가도록 하시기에 은혜를 입은 자녀들은 심판의 그날만을 준비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들이지, 사라질 현실의 부와 승리가 삶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이해 수준이 다릅니다.

 

사29:22-24의 말씀을 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라” 이런 약속들의 예언들이 100번, 1000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왜요? 모든 예언들이 그대로 다 그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성공으로, 사망을 영생으로 회복을 시키시는 하나님 때문에 보기에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고 창백해 질, 처지에서도 창백해질 이유가 없게 됨을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에 세상의 힘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하시고 창백해 질 처지에서도 창백해질 이유가 없게 하므로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날 마음이 혼미했던 자들이 총명하게 되었고 원망하던 자들이 교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이렇게 된다고요? 그날 때문에 지금, 우리들이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가요? 현실의 힘과 자랑에서 이겨내고 있나요? 늘 깨어 기도드리고 있나요? 새 노래로 시작하고 있나요? 구약의 모든 말씀에서도 알 수 있고 지금까지의 이사야서를 보더라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린 오직 말씀으로 그 확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총명하려면, 어떤 죄를 지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29:1-4, 9-14의 처지가 죄의 결과인데, 9-14절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죄악인지를 봅니다. 9절입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죄로 인하여 맹인이 된 즉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목표 없이 방황하던 남 유다의 영적 무감각과 타락에 대하여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기에, 결국 바벨론의 공격으로 망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성도가 만약에 말씀을 주시지만 듣지 않고 보여주시지만 보지 않으므로 인하여 세상을 따라간다면, 어떤 책망을 하실까요? 이건 망한 남 유다보다 더 악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요? 북이스라엘이 망하는 꼴을 보면서도 남 유다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순종했기에 남유다가 북이스라엘보다 더 나쁘다고 겔23:11에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가 자기 멋대로 산다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눅12:47-48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히2:1-3, 10:29, 12:25입니다. “히2:1-3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리에게 확증한 바니,10:29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2:25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지금은 단지 경고성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이 경고는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는 단지 경고로 여기지 않고, 그날을 준비하는 회개의 말씀,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말씀으로 여겨, 더욱 경각심을 갖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29:9의 남 유다의 영적 무감각과 타락에 대하여 지적하시는 이 말씀도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는 가벼운 말씀이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회개케 하는 말씀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가요? ~ 10절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남 유다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 상태를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건 창2:17에서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에 해당된다고 보면 됩니다. 영적으로 죽으면 11절과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그러나 말씀을 모른다고 하여 눈감아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통하여 믿음의 귀와 눈을 열어 주셨는데, 그래서 말씀을 듣게 하셨고 보게 해 주셨는데 왜 여전히 말씀을 마음 판에 심지 않고 있나요? 왜 여전히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고 늘 이런 저런 핑계로 말씀을 외면할 수 있나요? 은혜를 입지 못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구약 백성도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은혜를 입어 말씀을 듣고 보고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성도가 힘으로 살려고 한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13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말로만 믿고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가만히 놔두실까요? 14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큰 트렉터로 막아야 되는 상황이 온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더 크게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멸망을 당하면서 70년간의 노예,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에서 확인이 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사29장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 그렇다면, 지금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다음과 같은 태도는 철저하게 제거해야 됩니다.

 

사29:15-16입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1)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읽고 계십니다. 모를 수가 없는데, 다 읽고 계시는데, 숨기면 모르실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멋대로 하려는 태도는 일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힘의 강대국을 믿고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들켜 책망을 받았던 남 유다였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더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더 크게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시26:1입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판단받기를 원할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미워한다는 뜻이요 늘 거짓과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성도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가 되면 안 됩니다. 주는 주이고 객은 객이어야 합니다. 뭐가 잠시 된다고 하여 교만을 떨면 그건 저주를 부를 뿐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낼 때, 어떻게 된다고요? 

 

사29:17-19입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리의 부패, 타락으로 무너져야 했지만, 언약 때문에 회복이 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그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남은 자들은 이제는 보게 되었고 듣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창백해 질 필요도 없게 해 주셨습니다.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이 임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고백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혼미한 마음이 사라지게 하셨기에, 원망하며 살던 자들이 교훈을 받을 수 있게 즉 들을 수 있고 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어떤가요? 

 

다시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로써 사29:22-24의 말씀처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창백해 질 필요도 없게 해 주셨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시고, 말씀을 받을 수 있게 즉 들을 수 있고 보게 되어 자신이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의 기준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다 내려놓고 다 맡기고 자기를 다 부인하면서 오직 주님의 뜻만을 따라야 그것이 임하실 신랑, 예수님의 신부임을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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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024 이사야 28:1-29  (13) 2024.12.02
11/24/2024 이사야 27:1-13  (12) 2024.11.24
11/17/2024 이사야 26:1-21  (16) 202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