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3/3/2024 스가랴 7:1-14 본문

주일 설교 말씀

3/3/2024 스가랴 7:1-14

PastorYK 2024. 3. 4. 11:17

말씀: 슥7:1-14                                             

제목: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나님께서 왜 복잡한 제사의 형식들과 온갖 율법들을 주셨는지 아십니까? 그 안에 그 내용, 즉 신앙의 인격을 담아 신앙의 가치를 드러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현실이 어떠했던가요? 구약의 이스라엘도 결국은 실패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왜요? 자기의 속의 더러움은 감춘 채로, 즉 우상숭배를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면서 신앙의 형식만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형식만으로 자족했으니 그들의 신앙의 인격은 두 눈을 씻고 찾아보았지만,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결국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나라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맙니다. 

 

물론 그 역사가 구약이라면 지금 신약의 교회들은 어떤가요? 순종하고 있기에, 영적 전쟁으로 날마다 좁은 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나요? 아니면 별 생각 없이 따라만 가고 있나요? ~ 지금 우린 율법 중심, 성전 중심의 구약하고는 다르게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 중심의 교회이기에 그 차원이 다릅니다. 은혜를 입은 우린 구약의 성도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여 망한 이스라엘하고 다르던가요? ~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자이기에, 말씀을 볼 수 있는 성도가 되었기에 그래서 분명히 달라야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어떤 타령을 하고 있나요? 세상의 승리와 자랑을 위한 힘의 신앙을 구하고 있지 않나요? ~ 아니 물어 볼 것도 없이 거의 다 힘의 신앙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힘의 신앙은 슥7장에서도 말씀을 하시지만, 무가치한 것입니다. 힘의 신앙은 하나님하고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의 신앙은 교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될, 고질적인 심각한 문제인데, 이겨내지 못하고 있기에 다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자기의 삶의 조건이 부하면, 가난한 이웃들하고 비교해 보았을 때, 무엇이 더 낫던가요? 부하면 무엇이 좋은지, 깊이 생각해 보셨나요? 

 

다들 이구동성으로 저의 이 질문이 어리석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부하면 가난보다는 더 좋을 것이라는 평가는 죽은 인간들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입니다. 힘의 그들은 안타깝게도 부하면 부할수록 더 좋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죄성의 실체를 보면, 삶의 조건이 부해지면 부해질수록,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인성과 인격이 일반적으로 더 나빠지더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실생활도 보세요! 그렇게 못 살던 그 옛날과 지금의 삶을 비교해 보세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천양지차입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얼마나 부유하던가요? 부한 자들의 갑질을 생각해 보세요! 아니 이젠 갑질 정도가 아니라, 훤한 대낮에도 강도들이 짝을 지어서 약탈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고, 아니 약탈 정도로 끝나지 않고 마약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가요? 타락한 자들이 돈을 벌려고 돈을 벌어서 힘을 가지려고 마약을 생산하는데 그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게다가 마약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유린을 당하여 물건처럼 매매가 되고 있고 심지어 힘없는 사람들을 잡아 와, 그들의 장기를 팔고 있습니다. 힘이 가져온 현실은 참담합니다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떨까요? 부하면 부할수록 신앙의 질도 수준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닙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들의 다수를 보시면, 거의가 1800년도가 아니면 1900년도 초에 만들어진 곡들이 많습니다. 백년에서 이백년 정도 된 찬송가들을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새로운 곡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는 요즘 곡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어떤 목표를 내세우고 있나요? 2000년 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까? 왜요? 왜 돌아가자고 합니까? 지금 교회들이 특히 대형교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담임목사 자리를 아들에게로 세습을 하고 있고 대형교회 직분자가 되려면 수만불의 헌금을 드려야 하고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대기업을 방불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깐, 교회 안에 다툼이 얼마나 많나요? 당연히 교인 관계까지도 깨지고 있습니다. 조건이 나아지면 자기의 삶의 인격이 좋아질 것 같은데도 오히려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들었던 가난이 현실이었을 땐, 이렇게 지금처럼 막장 드라마와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하고 비교하면 가난했을 때가 오히려 천국이지요! 가난 속에서 서로 간의 이해가 있었고, 그래서 친구도 있었고, 서로 가난하지만 나눔이 있었고, 서로 힘든 상태였지만, 인내하면서 가족 간의 웃음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넘치고 넘쳐서 버리고 있는 지금은 가난했을 때보다 더 많이 미워하고 불평하고 다투고 깨지고 있습니다. 

 

특히 재산이 많은 가족들은 서로 간의 신뢰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가족들은, 가족을 이용하여 자기만 배 부르려고 하다가보니깐, 가족 간의 소송으로 원수가 되고 있고, 심지어 어떤 배우자는 생명보험을 타려고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힘이 가져온 저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이 좋으면 신앙생활도 잘 할 테니, 하나님 아버지! 저의 이 연약하고 가난한 이 조건들에서 좀 나아지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지 마시고, 그래서 주일성수하고 성경공부에도 참여하려고 하지 마세요! 기도를 하시려면, “오직 이 가난이, 이 어려움이, 부족함이, 나를 더욱, 아니 나의 가족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승리를 준비할 수 있게 하옵소서”를 위하여 새벽기도를 하시고 이를 위하여 금식도 하게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어떤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나요?

 

마9:13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구약에서도 보세요. 미:6:6-8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종교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종교행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전심으로 따르면서 서로 돕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슥7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슥7장의 말씀을 한절, 한절 살펴보면서 자신의 잘못된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 심판의 날에 망연자실하는 최악의 사태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자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8가지 환상들을 보고 난, 2년이 지난 다리오 왕 4년 아홉째 이니깐, 주전 518년 기슬래 월 사일이니깐 9월 4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날짜가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때 벧엘 사람이, 사레셀, 레겜멜렉 그리고 그의 부하들을 보내서 묻습니다. 그 내용이 슥7:3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슥7:4-8:23에 걸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특히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여 주시는 슥7:4-8:23에는 그 특징이 있습니다. 슥7:4, 8, 8:1, 18에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라는 양식으로 하여 4번에 걸쳐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슥7:4-7과 8-14절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슥7:2-3부터 봅니다.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벧엘에서 살던 어떤 사람이 사레셀과 레검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성전을 짓고 있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보내서, 묻기를 여러 해 동안 즉 바벨론에서 70년간 늘 드렸던 오월의 금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왜 5월의 금식인가? 왕하25:8-9에 보시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이스라엘의 성전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멸망된 날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이니깐, 그때가 주전 586년 5월 7일입니다. 때문에 자신들의 5월 금식은 바벨론에서 회개 차원에서의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이 부끄러운 그날을 기리면서 하나님만을 경외하고자 5월의 금식을 그간 쭉 해 왔었는데, 이젠 돌아와서 제 2 성전도 세운지도 2년이 지났고 그리고 신앙의 회복의 과정에 있기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되는 것은 시기가 아닌가? 하여, 그래서 벧엘에 살던 어떤 사람이 그 점에 대하여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슥7:5-7입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무슨 뜻인지 이 점에 대하여 말씀을 늘 드렸기에 이해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책망에서 우리 다수가 결코 자유롭지 않기에 이 말씀을 skip할 수 없어서 듣던 그 말씀을 또 준비하게 되었는데, 안다고 가볍게 말씀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여튼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의 5월과 7월의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한 금식이었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기 전에, 조금 전에 5월의 금식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고 7월의 금식도 알아야 하기에 설명을 먼저 하겠습니다. 

 

7월의 금식은 왕하25:21-25입니다.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더 알고 싶으시면 렘41장의 말씀을 보시면 됩니다. 하여튼 예루살렘 멸망 시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 되었던 그달리야가 암살당한 사건을 상기하고자 시도된 금식이 7월의 금식입니다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예루살렘과 주변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살게 하시려고 지도자로 세웠던 그달리야 총독까지도 죽이는 그 악한 짓에 대한 회개 차원에서 나름 정한 7월의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식에 대하여 물으러 온 자들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책망을 하시던가요?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그래 그래서 금식하고 애통을 한 자들이 먹고 마심 즉 일상적인 삶에서는 진정으로 회개한 자로써의 역할은 다 했느냐? ~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진심과 사랑이 없는 단지 형식과 위선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7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너희들이 망하기 전, 남방과 평원에 너희들 조상들이 거주 할 때에 여호와 내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을 모르느냐?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요엘,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경외하라! 회개하라! 순종하라! 고 하셨던 그 당시의 말씀을 하십니다. 위선과 형식의 신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가난한 이웃, 힘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돕고 보살피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불순종으로 망했고 그래서 부끄러워 금식을 하면서 애통하던 너희들이 아니 어떻게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유익만 구하고 있고 가난한 이웃들을 전혀 돕지 않으면서 금식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 그런 형식적이고 위선과 외식된 너희들이 5월과 7월의 금식을 해야 되는지, 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묻고 있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어리석은 자들아! ~ 

 

그래서 다시 슥7:8-14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 내용을 보셨지만, 같이 다시 봅니다. 슥7:9-13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결국 너희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14절을 보세요!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들의 불순종, 위선과 외식 때문에 모든 열국에 해침을 받고 이 아름다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말씀 하십니다.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요? ~ 성도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준비하고 힘을 다하여 봉사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구원의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몸과 마음과 물질을 기꺼이 드리고 섬기고 있습니까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목사님들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기 전에, 기존 교회들의 전통에 그대로 따르기 전에, 성경에서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성령의 도움으로 확인하고, 그 다음에 순종할 것은 순종하고 아닌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다들 속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속아도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만큼은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됩니다. 속았다고 하나님께서 봐 주지 않으십니다. 물론 기회는 주시지만, 올바른 선택은 자기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편한 길, 쉬운 길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가야지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목숨을 걸고 따라야 합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 맡겨야 합니다. 인생은 딱 한번입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이 한 번뿐인 인생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했다가는 다 잃게 됩니다. 다 잃지 않으시려면 믿음으로 힘을 제압하셔야 합니다. 

 

제압케 하시려고 주신 은혜임을 아시고 더 이상 척! 하지 마시고, 어중간한 태도를 싹~ 다 버리고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개분자들이 되지 맙시다. 자신과 가족과 온 인류의 남은 장래를 위하여 오직 주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이번이 여러분들에게 몇 번째로 하시는 주님의  경고이십니까? 마지막 경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7/2024 스가랴 9:1-17  (14) 2024.03.18
3/10/2024 스가랴 8:1-24  (13) 2024.03.11
2/25/2024 스가랴 6:1-15  (14) 2024.02.26
2/18/2024 스가랴5:1-11  (18) 2024.02.19
2/11/2024 스가랴 5:1-11  (11) 2024.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