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3/10/2024 스가랴 8:1-24 본문

주일 설교 말씀

3/10/2024 스가랴 8:1-24

PastorYK 2024. 3. 11. 08:48

말씀: 슥8:1-24                                              

제목: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금식을 해도 금식이 되지 않는 즉 더 이상 돌이킬 기회가 전혀 없는 망해야지만 되었던 이스라엘에게 왜 하나님께서 슥8장에서 놀라운 복 즉 회복의 말씀을 주시는 것일까요? 우상숭배로 인하여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었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그곳에서 회개하면서 70년 내내 금식을 했어도 그러나 너희들이 나에게 한 금식은 금식이 될 수 없었다는 그런 망가진 이스라엘에게 즉 힘의 신앙이었기에, 그래서 이런 무서운 금식을 해도 금식이 될 수 없었다는 책망을 받았던 절망의 이스라엘에게 슥8장에서는 회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에서 누가 이 회복의 말씀을 믿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해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주시는 그 내용 자체가 대단하지 않나요?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십여 차례에 걸쳐서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벅찬 놀라운 복에 대하여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슥7장에서도 보았지만, 결국 믿음이 아닌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힘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을 자연스럽게 돌리게 되었고, 그런 미련한 선택이 자신의 마음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굳게 하면서, 진실한 재판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지 못하게 되면서, 주변의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들을 압제했고, 남을 해치려는 간악한 생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미련한 자기중심적인 독의 선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회오리바람처럼 알지 못하던 열국으로부터 해침을 받게 되고, 그 후로는 땅까지도 황무하게 되어 왕래하는 사람도 없는 저주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7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완전히 그 자세가 역전이 되어 엄청난 복의 말씀을 약속하십니다. 먼저 슥8장의 내용을 간추려 드리면, 1-2절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크게 질투하며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신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3-8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한 영원한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9-13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회개한 자들이 누릴 복에 대하여, 14-17절의 말씀에서는 회개한 자들이 실생활에서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삶에 대하여, 18-23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으로 인하여 (1) 슬픈 금식이 변하여 기쁨의 절기가 되고 (2) 열방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찾게 되고 (3) 수많은 열방의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붙잡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5단락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1-2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주전 518년경에 임했는데, 시온을 위하여 즉 교회를 위하여 크게 질투하시면서 그것도 부족하여 그 즉 택함 받은 자녀들을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할 수 있어서 설명을 드린다면, 여기서의 질투는 우리들이 하는 그런 질투가 아니라, 히브리어를 보면, 여기서 질투는 ‘카나’라는 말로 ‘열정을 발휘하다, 열심을 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열정과 열심을 다하여 자녀들을 지키고 보살피고 계신다는 뜻이기에 이 말씀만으로도 은혜를 입은 자녀들은 비록 늑대 속에서의 양과 같은 존재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아니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근거의 말씀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열정과 열심 속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방해하거나 공격을 누가 한다면자녀들을 위하여 그 세력을 크게 분노함으로 소멸시켜 버리고 말겠다는 것이 2절의 말씀입니다. 믿으십니까? 물론 믿게 하시려고 주시는 실제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우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몇 군데만 봅니다.

 

사17:12-14입니다.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물의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 

 

암1:3-15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귈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오바댜1:10입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슥2:8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특히 사14:17과 렘25:12의 말씀을 봅니다. 

 

사14:17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렘25: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망하게 되는 그 이유는 렘50:33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학대를 받는도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는 다 그들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아니하리라 돌아갈 약속의 때가 되어서, 포로였던 이스라엘을 예루살렘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되는데그렇지 않았기에 바벨론(주전539년)은 메대 바사의 공격을 받고 점령을 당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에도 보세요! 사27:7-8, 사48:9-10 암7:1-6입니다.

 

사27:7-8입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치셨은들 그의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사48:9-10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암7:1-6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물며 구약의 이스라엘을 이렇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다면, 만군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어 살리신 신약의 우리들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은 미국의 엄청난 포드급 또는 에드워드급 그런 항공모함 정도가 아닙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들의 보호와 안전을 위하여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고백합니다.

 

시27:1-6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7편의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넓혀져야 합니다. 

 

3-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루살렘의 영원한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3절의 믿는 자들이 사는 예루살렘은 교회와 더 나아가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제 너희들은 3-8절의 말씀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절의 진리의 성읍과 성산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와 천국을 상징하시기에 이제 교회와 천국에서의 삶이 어떠할지 4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데,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 모두가 영생한다는 뜻으로 평화와 번영의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보호를 상징하는 것으로 지팡이를 잡는다는 것은 안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세력들로부터 늘 위협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원수로부터 그 어떤 공격이 불가하기에, 영원한 안전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5절은 길거리에서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서 뛰놀 것이라는 말씀인데 전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이 함께 영원토록 웃고 뛰놀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보면, 어떤가요? 실감이 나십니까? ~ 실감이 나신다면, 이곳에서 우린 무엇을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할까요? ~ 이런 놀라운 약속을 받은 자들일진대, 어떻게 썩어질 이 현실에서의 부를 위하여, 좀 더 잘 살아보려고 미워하고 다투고 거짓될 수 있을까요? ~ 

 

특히 슥8장을 보시면 그 영광스러운 복의 약속을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단한 그 큰 복을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셨는데 무려 본 스가랴서에서만 53회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학개-53회, 말라기-24회, 전 소선지서-247회) 특히 8장에서는 23절로 된 내용 중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를 무려 15번씩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꼭 어떤 천재지변이 있어도, 심지어 하늘이 두 쪽으로 나뉠지라도 성취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또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믿지 않기에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셨는지도 느끼게 하시지만, 그보다는 얼마나 고집불통인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그리고 그 복들이 너무나 크기에 하나님께서 질투까지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점은 그 천국의 약속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입니다. 이것이 확인이 된다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그 약속은 이스라엘 자손을 통하여 창3:15의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께서 오셨고 그리고 그의 피 값으로 교회들을 세상 곳곳에 세워 주시면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록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하신 약속이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연약하고 유한한 그 생명의 한계를 가진 우리 사람들에게는 수천 년간의 유구한 세월 속에서의 이 목표를 향한 성경의 흐름은 거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경을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그 약속의 성취과정이 얼마나 아주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주 잘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유지되고 있다면, 그 성경의 흐름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성경의 흐름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믿습니까? 믿으시기에 하루의 삶이 어떤가요? 믿기 전과 후의 그 차이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던가요? 무엇이 달라지고 있나요? 믿기 전과 후에 대한 그 차이점이 시간이 갈수록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말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셔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도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설령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다 빼앗길지라도 끝까지 주님만 바라볼 것을 다짐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excuse할 때가 많다면, 심지어 작은 세상의 힘 때문에 자기 마음 안에서 심하게 요동하면서도 이를 제압하려는 영적인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이건 정말 위험하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피나는 싸움이 없이는 갈 수 없는 좁은 길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록 좁은 길이지만, 그 하루하루는 낭비할 수 없는 영원한 승리와 화목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 인류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남은 시간을 세상의 즐거움과 편함을 위하여 애를 쓴다면, 그 결과는 슥8장의 말씀과 정반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슥 8장에서는 아주 심각하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를 무려 15번씩이나 강조하시고 또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말씀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까? 말씀을 믿고 내일을 준비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 약속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마치 두 눈으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실감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빠져서 작은 세상의 힘도 통제가 되지 않아서 쩔쩔매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그 약속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기에,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고집대로 살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원리와 동일한 규모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몰라 내일을 준비를 하지 못합니다. 내일의 죽음, 심판을 전혀 준비하지 못합니다. 단지 지나가는 세월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만 간주하면서 더 놀지 못해 더 갖지 못해 안달할 것입니다. 

 

늙지 않으려고 젊어 보이려고 별의별 짓을 다하는데, 곁에서 보면 물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밖으로 건져 올렸을 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물고기처럼, 세상 사람들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몸부림을 친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던가요? 몸부림을 친다고 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던가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다들 그렇게 아무 대안 없이 막무가내로 삽니다. 세월의 흐름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기에 정신없이 썩어질 세상의 것만을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데, 그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얼마나 두려워할까요

 

그 소중한 인생을 쓸쓸하게 외롭게 무가치하게 마감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왜요? 준비한 자들의 죽음은 슥8장에서 어떨지 확실하게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 의하여 그 결과는 극명하게 나뉘면서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이 갈 곳과 머물 곳이 이렇게 분명하고 그리고 정확한 목표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믿고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나 한사람 신통치 않게 이 세상에 왔다가 그냥 늙어서 혹은 병 들어서 또는 사고로 죽어가게 하시려고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호흡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하심과 간섭 속에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왜요? 교회를 통한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3-8절의 회복과 12절의 풍성함의 복을 주시려는 것이요 16-17절의 말씀처럼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2500년 전에 하신 말씀인데, 지금은 그때부터 2500년이 지난 너희들은 4월(렘39:2-3,함락한 달), 5월(성전, 성읍 불탄 날-렘52:12-13,왕하25장),  7월 (그달리야 죽음-렘41:1-2,왕하25장),  10월 (공격 시작한 588년10월,렘39:1왕하25장)의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라고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떤가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자들은 믿음의 증인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찾고 은혜를 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똑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사건이 생겨야 할 것입니다.

 

20-23절을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나요? 나를 보고 하나님을 찾고 있나요? 

 

그래야 되는데 불행하게도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자랑을 더 채우지 못해 안달하다가보니깐, 온갖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슥8:20-23에서 알 수 있듯이,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교회에 와서 은혜를 구하게 되고, 성도들과 함께 동행하려고 한다는데, 물론 이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그래서 이렇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어떻습니까?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까? 나를 보면서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까? 

 

결론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슥8장의 회복의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당시의 성전재건축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늘 마지막 작업에서 더욱 긴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성전 건축은 무사히 끝을 내야 했기에 그 사명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엄청난 소망을 불어 넣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누구를 위한 말씀일까요?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주신 말씀입니다. 결국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516년에 4년 만에 완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서 예수님까지 오셨고 그리고 200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우리들까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세월이 지금까지 아무 의미 없이 흘러온 것이 아닙니다. 일초 일초의 흐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도 일초 일초가 흘러 택함을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 자녀들은 천국으로 다 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르심을 받은 자녀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 놓고 마실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 지혜요 복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적해 보셔야 아무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신다면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은 욕심과 이기심과 거짓과 고집을 깨끗하게 버리시고 오직 천국을 향한 믿음으로 거룩함을 위하여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Bonus: 슥8장의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점을 알게 합니다. 슥8장의 이 말씀은 ‘자신이 진정 참 성도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회복의 말씀, 놀라운 승리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든 지를 뜻하고 있고,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따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성도들만이, 자기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순종하려고 날마다 자신과 싸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도들만이 바로 이 회복과 승리의 이 말씀으로 마치 사막에서 시원한 생수를 만난 것처럼,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어 방황하던 사람이 이정표를 보게 될 때, 바로 느낄 수 있는 그 기쁨과 감동과 위로가 되듯이, 슥8장이 그런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을 따라가려고 땀을 흘리는 성도들에게 이 슥8장의 말씀은 그 힘든 현실을 이겨낼 수가 있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 슥8장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던가요? 

 

바벨론에서 70년 만에 돌아왔지만 돌아온 이스라엘의 처지는 참으로 열약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조건이었기에 그래서 성전완성을 위하여 환상 8가지도 필요 했고 그리고 너희들이 성전을 짓고 나면 어떤 복이 임하게 되는지에 이에 대한 분명하고도 강력한 그런 말씀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슥8장은 그 당시 성도들만이 아니라 지금도 거룩함을 위하여 순종하려고 자신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위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와 회복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순종 없이, 편하게 또는 쉽게 아니면 자기가 살던 대로 살면서 그것이 자기의 신앙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래서 신앙 때문에 믿음 때문에 피나는 과정을 지나지 않고 있는 교인들에게는 슥8장은 단지 말씀으로만 느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슥8장의 이 말씀은 바로 자기 자신이 건강한 성도인지, 병든 성도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한단 말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지난밤에 슥8장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영감을 느끼게 했나요? 

 

가장 아파하는 사람에게 의사가 얼마나 필요할까요? 슥8장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가장 배고픈 사람에게 한 끼의 양식이 얼마나 소중할까요? 바로 슥8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배부른 사람들은 의사도 한 끼의 양식도 결코 필요하지 않듯이,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하고 넉넉하고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슥8장의 이 능력의 말씀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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