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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2/18/2024 스가랴5:1-11 본문
말씀: 슥5:1-11
제목: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과 에바 환상(2)
지난 시간에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에 적힌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에 특히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도둑질하는 놈들과 망령된 맹세를 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정된 이 심판은 어느 누구에게만 임하는 심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그래서 피할 수 없다는 심판임을 말씀하셨던 환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제 2 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인데 어찌 성전을 규모와 크기로 평가하려고 하는가? 하시면서 성전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된다는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 환상을 통하여 드릴 세 번째 말씀은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통하여 임할 심판은 그 대상이 모든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전에 소속된, 교회에 소속된 자들에게도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럴진대,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 없이 심판을 받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주전722년에 망하였고, 남 유다도 바벨론의 3차 공격을 받고 주전586년에 나라가 망한 후, 포로로 살아가다가 70년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는, 하나님의 감동과 도움으로 스룹바벨 성전을 짓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성전을 세우는 그 기쁨보다는 제 2 성전이 솔로몬 성전보다 작다고 하여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성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말씀을 해 주셨고, 그리고 6번째 환상인 날아가는 두루마리 즉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다시 세우는 이 성전은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이스라엘은 너희 이방인들과 차별이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이스라엘의 종으로 살아가야 된다’가 아니라, 이방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너희들은, 제사장 나라로써의 본이 되라고 그래서 성전을 세워주신 것이었지만. 그러나 결국 이 두루마리 환상마저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제사장 나라로써의 역할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약속된 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진리의 빛인 은혜를 주시는 성전이신 예수님까지도 보내주셨지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결국 십자가에서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스라엘은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오히려 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면서 다시 AD 70년에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하여 또 다시 멸망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남의 역사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교회가 이스라엘의 망한 그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그 부끄러운 역사를 두 눈으로 보았고 두 귀로도 생생하게 들었지만, 단지 유월절만으로 만족하고 세상의 힘과 싸우려고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로서 세상세력들과 싸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되는데, 다들 애굽, 세상에서의 힘의 생활, 종 된 저주의 세상에서 즐기려는 더러운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저주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2500년 전의 이 스가랴서에서 보여주시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이 얼마나 귀한 말씀이 됩니까?
세상에서의 실패도 어떤가요? 실패한 본인은 거의 지옥입니다. 그 실패는 너무 고통스럽고, 두렵고, 부끄러워서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깊이 맛보게 됩니다. 자기 가족까지 있으면 그건 더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의 실패도 그 고통이 심히 괴로울 수밖에 없는데,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그 날은 어떨까요? 상상 해 보셨나요?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루마리와 에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민감하게 여기면서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인데, 다들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이건 저주입니다. 편함을 즐기면 안 됩니다. 주의 뜻 행하기를 크게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것 만이 살 길입니다.
네 번째 말씀은 세상의 탐욕으로 거짓말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망령된 맹세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인 두루마리는 무엇을 책망하고 금하시려고 하시는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슥5:3-4의 말씀처럼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탐욕에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물질의 탐욕은 도적질과 거짓 맹세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는 드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결국 외식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신앙 태도 중의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여주신 이유는 외식 신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모두들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며 시간과 물질을 드리며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언행과 행동의 선택과 판단을 보면, 어떤가요? 겉만 그럴듯하지만, 속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선행이 천국 가는 비결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믿음만이 가능한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지금 물론 선행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맡은 모든 일을 힘껏 감당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 BS시간에 드린 말씀이 믿음은 행함의 시작이라면 행함은 믿음의 완성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나뉠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과 은혜도 살아 있는 과일나무와 같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나서 인내하면서 내내 관심을 가지고 1년 내내 열심히 수고하는 것만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듯이, 똑같습니다. 은혜라고 하여 믿음이라고 하여, ‘단지 믿습니다!’ 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땀 흘리는 그 모든 과정이 없이는 은혜일지라도 결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의 은혜는 ‘거저먹게 해 줄 께,’ 가 아니라, ‘거저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도 아닙니다. 은혜란, 자람도 수확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죽은 나무에서 생명을 거저 주시므로, ‘자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나무가 되게 해 주셨다’는 뜻에서의 은혜입니다. ‘죽은 너가 산 너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목표인 거룩함을 향하여 농부들이 수확을 위하여 수고하듯이, 은혜를 입어 산 자가 된 너희들도 전심으로 열심히 수고를 해 보라’ 즉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데, 교회 다니는 교인들의 신앙의 현실을 보면 어떤가요? 디즈니에서 제작한 TV 프로인데, 기억나시나요? 어떤 여자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기기만 하면, 바로 자기 생각대로 해결이 되던, 뭐 그런 내용인데, 기억나시나요? 한국에서는 “열려라! 참께~”하면 보화가 가득 담긴 창고의 문이 열리듯이, 교인들이 믿음을 그런 식으로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동전으로 음료자판기에서 원하는 것을 쉽게 꺼내 마실 수 있듯이, 그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주일도 열심히 지키려고 하는데,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무속신앙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은혜 안에서의 순종이지, 쉽게 거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6:7-9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신앙은 음료자판기 식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중생이 되었다면, 믿음을 가지고 땀을 죽도록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선택을 하던가요? 자기 고집으로, 자기 방법으로, 자신의 식으로 해도 믿음은 응답한다는 식인데,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은혜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을 알고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속으면 안 됩니다. 아예 처음부터 거짓 맹세와 도적질을 하면 바로 알 수 있기에 그 수습이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믿음 안에서 자기의 자랑과 승리를 위하여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 열심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고질적인 신앙에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하여 이미 구약 내내 수없이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40:6입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사1:11-13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58:1-5입니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도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암5:21-24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미6:6-8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말라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 말씀은 보기로 하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7:21-23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내용이 다 무엇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요 외식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까 나는 천국백성이다! 나는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니까 나는 틀림없는 천국백성이다! 이런 생각은 금물입니다. 성장하셔야 합니다. 믿음의 결실을 이루어내셔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시간 속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특히 돈의 종이 되면 안 됩니다. 늘 복된 자로써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해 하시면서 성도의 책임과 역할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구약을 통달했다는 자들이 결국 외식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합니다. 그러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마23:24-28입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렇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마23:33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얼마나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까? 잘못된 믿음은 결국 하나님께 거짓 맹세를 하게 되고 도적질도 하게 됩니다.
마23:16-22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하여 거짓 맹세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경우입니다. 재물에 미친 부패한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이 기록된 두루마리는 이 점을 지적합니다. 외식하지 말라!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끼리는 얼마든지 당장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그 마음을 샅샅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어느 누구든지 속일 수 없습니다. 속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지은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화: 독일에는 차들 안에 어떤 software를 법적으로 설치해야 된다고 하는데, 그 software는 구역, 구역마다 그 차의 주행 속도를 다 기억하는 software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찰이 세워서 그 software를 꺼내보면 그 software가 그 차의 주행 속도를 그대로 나타내기에 그것으로 ticket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각자들의 전혀 보이지 않는 생각, 판단, 소망까지도 아닌, 그 이상의 모든 것들까지도 다 기록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계20:12을 보세요!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심판은 한 치의 실수가 없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십니다. 바로 두루마리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슥5:3-4의 말씀도 보세요! 정확하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재물과 권력이라는 세상의 힘으로 당장의 죄 값을 피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러나 개미 한 마리까지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힘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그날 피한 불법까지 복리로 계산하여 더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힘을 가지고 잠시 즐기다가는 그날의 그 대가는 너무나 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특히 재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눅12:16-21입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상의 재물과 세상의 즐거움은 잠시입니다. 잠시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저주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증인들을 보세요! 어떤 선택을 했는지 봅니다. 먼저 히브리 산파를 봅니다.
출1:15-21입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보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하나님 때문에 목숨까지도 버렸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히11:24-26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기생 라합도 보세요! 수2:2-4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은혜와 믿음은 늘 하나님의 편을 들게 됩니다.
은혜는 세상의 힘과 능력을 자기의 밥으로 여기기에, 두려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안전한 출입을 원하십니까? 자신의 가정의 기쁨과 평안과 감사의 삶을 원하십니까? 원하신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판에 기록하시면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기업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기도가 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원리가 자신의 원리가 되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닮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셨던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인 두루마리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런 시간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셔야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지를 말씀을 통하여 버릴 것은 버리시고, 고칠 점은 과감하게 고치셔야 할 것입니다. water down하지 마시고 변명하지 마시고, 죄가 밝혀지면 인정하시고 도움을 청하셔야 합니다. 아닌 척 해 보셔야 하나님을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슥5:2에서 스가랴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재미있는 세상의 것만이 잘 보이십니까?
아니면 세상 안에 감춰진 나를 죽이는 그 더러운 죄가 보이십니까? 율법을 통하여 세상과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이 감춰진 자신의 죄들을 율법인 두루마리를 통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기록한 두루마리는 감춰진 부끄러운 자신의 모든 죄, 허물들을 낱낱이 밝힐 때,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예수의 은혜를 입지 못하게 되면서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결국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죄를 깨닫게 되면서, 복된 길, 승리의 길을 따르는 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율법 없는 은혜가 가당할까요? ~ 율법이 기록된 두루마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신실하심을 깨닫는 복된 자들이 되었기에 율법은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 예수님 다음으로 귀중한 선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실은 죄를 밝히는 율법 때문에 구원받은 모든 자녀로부터 영원한 영광의 주로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되셨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과 지혜와 사랑까지도 율법 때문에 드러나시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을 보면, 율법은 역시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 됨을 알게 합니다.
7번째 환상인 ‘에바’에 대한 말씀입니다. 5절부터 나오는 ‘에바’는 사람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큰 ‘measuring basket’으로 두루마리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내용상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두루마리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는 것이라면 에바는 좀 더 구체적인 말씀으로서 어떻게 저주를 받게 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한절, 한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6절입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에바 환상입니다. 왜 에바인가? 그 당시에도 다들 장사하여 돈을 벌었는데, 그 그릇 크기를 작게 만들어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5gallon의 부피를 4.5gallon을 만들어서 속인 것입니다. 곡식을 적게 주고 돈은 더 많이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바의 부피를 속여 도둑질을 한 에바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6절후반의 말씀을 보시면,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그들의 모양 즉 그 도둑질을 이스라엘 온 땅에서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슥5:7입니다.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도둑질을 상징하는 한 여인이 에바에 앉아 있었고 그리고 그때 둥근 납 조각이 들리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슥5:8을 보세요!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도둑질을 한 그들을 상징하는 한, 여인이 에바 속에 앉아 있었는데, 다시 그 여자를 에바 속으로 던져 넣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 에바 뚜껑이 열리자 도망치려고 했던 그 여인을 잡아 에바 속으로 쳐 넣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납 조각인 뚜껑을 서둘러 닫았다, 덮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빼도 박지도 못하게 완전 봉해버린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의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죄의 값이 어떤지 감이 잡히시나요?
결국 슥5:9을 보세요!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죄가 가득하게 담긴 에바를 두 여인이 천지 사이로 즉 공중으로 들어 올립니다. 여기서 두 여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천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슥5:10-11을 보시면,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니이까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그것을 시날 땅으로 그 시날 땅은 창10:10과 11:2와 사11:11에서 알 수 있는데, 성경에서의 바벨탑을 쌓던 시날 땅은 죄가 가득한 타락한 세상, 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창10:10 처음에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 갈레에서 시작되었다.
창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11: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기서 왜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다시 바벨론으로, 즉 세상으로 내던지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서는 버려진 타락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집을 지어서 머물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먼저 그들이 다시 바벨론으로 보내지는 것은 다시 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성취는 스가랴 당시 예언하셨던 때부터 약 600년 후인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성취가 됩니다. AD 70년에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죽여 놓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자 결국 심판을 받고 세상으로 다시 내쫓김을 당했던 것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된 것입니다. 그 후 1948년까지 온 세상에서 퍼져 자리를 잡고 온갖 고행과 고통의 삶을 타국에서 살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194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지만 심판의 날이 되면 성도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영원히 머물게 될 것이라는 것이 슥5:10-11입니다.
결국 슥5장 본문이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1) 벧후3:8-10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죄가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역할과 책임은 회개를 통한 성숙함이요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2) 벧후3:11-14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2) 렘4:14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성도에게 있어서 선과 악은 공존하며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3) 죄악은 완전 봉합이 되므로 종국에는 지옥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합니다.
계20:10을 보세요!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5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그러나 계21:2-5를 보세요!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지금 선택하세요! 복과 저주 어느 쪽입니다. 지옥입니까? 천국입니까? 영원한 승리와 영원한 실패입니다.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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