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2022/01/09 열왕기하17:1-41 본문

주일 설교 말씀

2022/01/09 열왕기하17:1-41

PastorYK 2022. 1. 10. 07:41
말씀: 왕하17:1-41                      
제목: 확대되고 있는 멸망
 
사람들은 모두가 지금보다는 점점 더 나아지기를 늘 원하는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전 인류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겠는데, 어느 차원에서의 나아짐입니까? 제가 볼 때에는 도덕과 윤리보다도 경제적인 차원에서 나아짐만을 최우선 조건으로 보고 있다고 저는 여지없이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여러분들은 경제적인 면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적인 면을 더 우선으로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제가 더 우선입니까?~ 그 답은 성경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가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성경을 통하여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아니 세상 종말까지의 세상의 그 흐름을 보면, 인류의 역사는 에덴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생긴 작은 죄 하나로 인하여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의 첫 부분의 그 내용도 보시면,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이 되면서, 완벽하게 창조된 지구에서의 문제의 발단은 결국 에덴이라는 아주 작은 동산에서 아담의 아내인 하와가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악의 세력인 뱀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선악과를 따 먹고 먹이므로 인한, 불순종으로 인류의 타락과 부패가 시작됩니다. 특히 최초의 살인사건도 보면 아담의 형제인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제사문제로 인한 시기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러면서 어떤가요? 그 죄는 점점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자랍니다. 죄의 세력이 모든 사람에게 권세가 되어 특히 힘이 있는 자들을 보면, 얼마나 뻔뻔해 지던가요? 점점 더 인간의 부패와 타락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4:8-9, 13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3절입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뭐라고 한다고요? 동생을 죽인 살인자 가인이 하는 소리가 자기의 죄 값이 너무 크다는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창4:14절에 보시면,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자기가 남의 손에 죽는 것은 용납할 수 없고 두렵고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좀 지난 후에 창4:23-24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서는 벌이 7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서는 벌이 77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세월이 가면서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과 악랄함의 정도가 점점 더 심화(deepening)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결국 창6:5, 12, 창7:10-12, 19-24입니다. 먼저 창6:5의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12-13입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그리고 창7:9-12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600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17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결국 창7:19-22입니다.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꼳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노아의 식구 8명과 바다의 생물 외에는 다 죽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멋대로 살아보려고 하다가 결국 심판을 받고 깨끗한 멸절을 온 인류가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부부의 불순종으로 형이 동생을 죽이게 되면서 세상은, 이 사회는 점점 어떻게 되어가고 말았다고 합니까? 성경 안에, 좋은 이야기들로 더 많이 기록되어 가고 있던가요? 아니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던가요? ~ 한 사람, 한 부부의 죄로 인하여 부부간의 신뢰도 금이 가면서 회복이 되지 않으면,  관계도 깨어지면서 가정이 무너지게 되고, 그러더니 회복되는 가정들보다는 무너지는 가정들이 점점 더 확대가 되어가면서 결국 이젠, 나라까지도 망하더라는 것을 우린 오늘의 본문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나와 나의 가족과 나의 교회는 어떤가? 점점 부패하고 타락하면서 점점 죄의 양과 질의 수위가 높아지는 곳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상상할 수 없는 죄악들이 세상 곳곳에 창궐(rage)하고 있는데, 멸망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나와 자기의 가족과 교회는 여전히 경제적인 면만을 우선으로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인 신앙을 우선으로 두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보다는 자기 우선의 삶으로 종말의 심판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점에 대하여 솔직하게 거짓 없이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보이지 않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덴에서 쫓기는 아담과 하와에게 창3:21에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즉 짐승을 죽여 인간의 부끄러운 허물과 죄를 가려주시고 계신다는 뜻의 가죽옷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심을 믿음의 눈을 가진 성도는 알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를 짓게 하신 것도 은혜요 홍수의 저주 속에서도 노아의 가족 8명이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새 역사를 노아의 가족을 통하여 또 다시 허락하시는 창9:1을 보시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창12:1-3의 말씀인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람하고 하신 이 약속도 하나님의 크신 기적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갈수록 부패하고 타락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늘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주신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 속에서도 그 결과는 어떤가요? 나빠지고 있는가요? 좋아지고 있는가요? 이 점을 우린 세심하게 점검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왕하17장의 말씀만을 보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인 북이스라엘도 어떤가요? 
 
망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왜 망합니까? 잘했는데 망했나요? 그건 결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니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오늘 말씀을 살펴봅니다. 앗시리아에 의하여 주전 722년에 결국 북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합니다. 왜요? 왕하17:1-18입니다
 
(왕하 17:1) 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왕하 17:2)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왕하 17:3)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왕하 17:4)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왕하 17:5)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왕하 17: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 하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왕하 17:7)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왕하 17: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왕하 17:9)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왕하 17:10)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왕하 17:11)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왕하 17:12)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왕하 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왕하 17:14)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왕하 17: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왕하 17:16)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왕하 17:17)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왕하 17: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북이스라엘의 왕 호세아가 앗시리아를 배반해서가 아니라, 불순종이 그 이유입니다.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계획하고 선택한 그 결과가 멸망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세상의 이방 나라와 섞이고 맙니다. 정체성을 잃은 그들에게는 최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은 하지 아니하고 해서는 안 되는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까지도 망합니다. 그리고 유다지파만 남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보는 여러분들은 지난 밤에 또는 지금 이 말씀을 읽고 난 후에 어떤 생각이 납니까? 
 
아마도 그냥 읽었을 뿐이지, 이 말씀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 이런 멸망에 대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어야 할까요? ~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인다’라는 반응이 아니면, ‘아무 반응이 없더라’는 것인데~ 이 둘 중에 어느 쪽인가요? ~ 이런 참담한 역사를 보면서 완전 남의 일로 여기는,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하게 되는데, 어디에서 보고 들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마13:13-14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러시면서 마13:16에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렇다면 지금 우린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런데 아니 어떻게 보는 자와 들을 수 있는 자들이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나요? ~ 은혜가 완전하게 드러난 교회에 출석하는 다수의 교인들이, 여전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듣지만 듣지 못하고, 보지만 보지 못하는 그런 죽은 자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 결국 가짜가 아닌가요? ~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여러분들의 그 죽은 자의 모습, 문둥병에 걸린 참담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 이유를 아십니까? “듣지만 듣지 못하고, 보지만 보지 못하는 그런 죽은 자의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는다고 버려진다고 그래서 순종하라고 하시지만, 지금까지도 수없이 수백 년 동안에 주의 종들을 보내주셔서 말씀을 하시면서 경고의 경고를 해 주시고 계시지만, 다들, 듣지만 듣지 못하고, 보지만 보지 못하는 그런 죽은 자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은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고 무너진 북이스라엘을 보라는 것입니다. 별안간의 나타난 멸망이 아니라 모세로부터 지금까지 살 길과 죽음의 길, 저주와 복의 길을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지적하고 책망하고 간섭을 해 주셨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끝장을 내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작은 나의 죄들이 쌓여 결국 나라까지도 멸망을 당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소망 없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교인들이 여전히, “듣지만 듣지 못하고, 보지만 보지 못하는 그런 죽은 자의 반응을 보이고 있기에, 이 세상은 갈수록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부패와 타락과 살인과 거짓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도덕과 윤리의 그 이상인 믿음의 삶을 열어주셨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젠 도덕도 윤리까지도 무시하면서, 능력의 믿음을, 회복과 승리를 주는 믿음을, 두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 믿음을 완전 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이 이렇게 갈수록 썩어서 무너지므로 그래서 불신과 갈등과 더러움으로 드러낼지라도, 성도된 나는 그 반대로 믿음의 능력을 드러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역시나 동일한 방법으로 주의 종들을 통하여 경고의 말씀, 책망의 말씀을 지금까지 주시고 계시는데, 왜 아직도 말씀이 우선이 아니라 자기가 우선일 수 있나요? ~ 자기를 부인하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위의 것만을 바라보아야 된다고 수없이 전하여 주시고 계시지만, 거의 아무도 따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는 어떤 무서운 반응을 보이고 있던가요? ~ 교인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기의 악함을 인정하고 있지만, 회개 역시도 단지 말로만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고백은 하면서도 종교행위는 하면서도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망한 북이스라엘과 완전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본문 말씀을 보세요! 왕하17:27-33, 40-41입니다.
 
(왕하 17:27)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왕하 17:28)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왕하 17: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왕하 17: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왕하 17: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왕하 17:32)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왕하 17:3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40)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왕하 17:41) 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 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
 
당시에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 인하여 버려진 북이스라엘과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는 여러분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이 지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던가요? ~ 성도된 내가,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는데 이 지구가 별안간 궤도를 뛰어나갔나요? 아닙니다. 우리들이 말씀의 궤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
 
북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지금 내가, 교회가 정신 나간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망하는 전철을 밟아도 너무나 똑같이 밟고 있는데, 어찌 괜찮다고 할 수 있나요? 괜찮다고 한다면, 그건 원수가 달콤한 말로 속이려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으면 안 되기에 결국 나라까지도 망하고 만 것인데, 그러나 지금은 이젠, 그 범위가, 한 나라 정도가 아니기에 더욱 심각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의 심각함은, 한 나라의 멸망이 정도가 아니라 이젠 지구의 멸망을 향한 처지이기에, 지금 지구의 일련의 사태를 보면 어떤가요? 어떤 증세가 세상 곳곳 도처에서 예상할 수 없이 터지고 있던가요? 남극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나타나는 기후이상 현상은 여기저기에서 홍수와 가뭄으로, 이 가뭄으로 인한 산불로 상상할 수 없는 손실과 아니 사람들까지도 죽어갑니다. 그리고 벼락과 태풍역시 무섭게 곳곳을 쓸어버리고 있고 지진도 역시 점점 더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젠 그것도 부족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그 위험수위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이유는 다 인간의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자기 욕심과 자기 승리를 포기하지 못하므로 인한 그 배반이 어떤 결과로 드러날지를 말씀으로 확인하고자, 신명기 말씀을 함께 봅니다. 신2:14-15입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신 2: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불순종으로 603,548명이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믿는 자들을 향한 무서운 일차적인 경고이기에 실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도 명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신4:25-28입니다. 
 
(신 4: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신 4:26)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신 4: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신 4: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우상을 믿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오직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버려지고 싶으면 우상을 따르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복된 삶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순종하라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듣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신28장에 가서는 구체적으로 아주 긴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 다 읽어드릴 수 있는 분량이 아니기에 여러분들이 각자가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꼼꼼하게 읽어보세요! 복의 내용은 1-14절까지라면 저주의 말씀은 15-68절까지가 저주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북이스라엘의 멸망도 신28장에서의 저주가 그대로 임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왕하17장의 시기는 주전 722년의 말씀이니깐, 지금부터 계산을 하면 2,744년 전의 사건입니다. 그동안에 수많은 나라들이 우상으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는 그 반복을 역사 내내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라가 망하는 수준의 사건이 아니라 지구가 망하는 지경으로까지 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가정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더니 그 후로는, 노아 때, 인류의 타락으로 지구의 인류가 8명만을 남기고 다 죽습니다. 망한 것입니다. 무서운 경고와 함께 그리고 다시 시작된 우리의 인류는 각각 곳곳에 나라들을 세웠지만, 역시나 타락으로 망하고 망하다가 이젠 또 다시 지구의 모든 인류가 망하게 되는 그런 징조를 또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징조는 노아 때의 홍수처럼 마찬가지로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제 임할 징조는 노아 때처럼 죄인들의 세계로 다시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이제 심판 이후의 세상은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세계가 임하게 되는데, 어떤 곳인가 하면, 계21:1-4, 22:1-5입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사실일진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삶을 준비해야 할까요? ~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망했지만, 성도로써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점은 (1)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고 한다는 점 (2)상식을 떠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는 것이 신앙의 성장을 방해하는 원인입니다. 멸망을 당한 북이스라엘도 보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쉽게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다가 망했습니다. 상식을 떠난 우상숭배로 왕 노릇하려다가 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최선을 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더디지만 성공을 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어떻게 성도라는 신분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지 않고 대충, 눈감고 하는 식으로 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빤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거짓과 게으름이 한 두 번은 통할지는 몰라도, 성도가 대충 눈감고 하는 식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무소부재하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까요? 먼지만큼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거짓된 세상의 마음으로 성도가 그럭저럭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징계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성도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 성도의 기도와 삶 자체를 결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아갈지라도, 상식을 벗어나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한다면,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만을 섬기는 길은 거짓된 더러운 세상의 마음을 버리고 오늘 하루 주어진 일에 공평과 정직과 진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진실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양(量)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를 하시더라도 제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입니다. 지금 놓치면 다음은 없습니다. 끊어집니다.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진실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내일은 보장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이 세상에 살아가시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방법이 있다면 진실된, 마음으로 맡은 일에 많이 하려는 양(quantity)의 기준에서 벗어나, 가난한 마음으로 바르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른 신앙인으로서의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예배자의 삶입니다.
롬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주일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자세로 주신 하루를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이것이 관건(關鍵-point)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여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멸망의 주원인은 우상숭배이었지만, 우상숭배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기준이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와닿지 않았었기에, 그리고 주신 하루의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써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상식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더 이상 속지 마시고 더딜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일을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참, 잘했다, 수고했다! 칭찬받으시는 복되고 영광스런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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