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2021/12/19 역대하 26:1~2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2021/12/19 역대하 26:1~23

PastorYK 2021. 12. 20. 07:31
말씀: 대하 26:1-23                                    
제목: 그가 강성하여지매
 
오늘은 아기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리는 성탄절입니다. 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을까요? 인간 모든 역사의 풀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점, 특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치고 모르는 분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된 자들의 삶을 보면, 다르지 않은 것일까요? 언제나 그렇게 미련하고 이기적이고 거짓될 뿐, 경건하고 정결한 참된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는 자들과 알았지만 대성공과 승리로 그 현실의 실체를 까맣게 잊어버리면서, 그 대신 자기의 내일은 탄탄대로만이 보장될 것이라는 그 망각이 결국 죽음의 길로 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은 결국 손으로 쥘 수 없는 물이요 바람과 같은 것들이기에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될 수 없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함으로 우리의 현실은 더욱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상과 기준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이젠 신뢰라는 말이 오히려 불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불신이 정상이고 신뢰가 비정상이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선의 소통은 불가하고 악의 소통만이 가능한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님의 오심은 더욱 큰 능력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아니 큰 능력일 수 밖에 없는데, 어떤가요? 우리들의 힘과 능력은 예수님인가요? 
 
이 질문을 드리면서 오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이 질문의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왕하15:1-7의 말씀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된 대하26장의 말씀에 등장하는 유대 왕 아사랴 (다른 이름-웃시야), 그를 통하여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늘 말씀을 드렸지만, 대하26:16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늘 하나님께서 이 점에 대하여 주의를 주시고 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겨내지 못하고 이렇게 웃시야처럼 책망을 받고 다들 부끄럽게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보면, 역시나 웃시야를 통하여 우리의 그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 주시려고, 웃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이 말씀이, 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창12:1-3의 약속을 하셨는지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왜 성육신을 하셔야 되었는지를 절실하게 알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하26장의 웃시야를 통하여 지난 시간 아마샤의 문제점, 허물에 이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어떤가요? 대리만족을 위하여 영웅을 찾거나 영웅이 되어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영웅을 찾고 영웅이 되어보려고 노력을 합니까?~ 특히 성도들이 은혜를 입으면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참 열심히 나름대로 수고를 합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땀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사랴(웃시야)왕처럼 말입니다. 그의 업적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하26:4-15입니다. 

26: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26:6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26:7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26:8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26:9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26:10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 

26:11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님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26:12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26:13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 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26:14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26:15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대단한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나중에는 어떤가요? 대하26:16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교만하여 결국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신앙은 봉사도 수고도 노력도 확신도 자신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다윗을 볼까요? 그가 누구입니까? 골리앗을 물리친 믿음의 용사요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누구든지 늘 다윗을 원하고 있고 다윗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가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에 영웅이 되었지만, 왕이 된 후에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말던가요? 천하가 다 알고 있듯이, 다윗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삼하11:2-5, 14-21입니다. 
 
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11: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11: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1: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11: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1: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1: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1:17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11:18 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1:19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11: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11: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을 하더니 그 동침으로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중에는 수습을 하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신 우리아에게 수작을 부렸지만, 흔들리지 않자, 결국 군대장관 요압을 통하여 치열한 전쟁터에서 죽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와 동침을 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맙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우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그렇구나~ 신앙은 확신과 자신감으로 열심과 봉사를 한다고 하여, 진정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함은 확신과 자신감으로 때려 부수고 전과를 올리고 승리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자신의 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부패했는지를 알고, 심히 괴로워하면서 그래서 죄의 문제로 어떤 고된 고난의 훈련을 받아야 되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훈련입니까? 훈련 과정 속에서 이웃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예전을 돌아보면서 믿음이 없는 이웃들이 회복이 되고 또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 큰 믿음을 가질 때까지, 돕고 나누고 섬기는 자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삶과 그 역할이 진정한 기독교의 영웅이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을 스스로 만족해도 안 되고,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그래서 싸워서 얻는 다윗과 같은 그 승리를 보고 그는 은혜가 충만하다! 라고 평가하고 인정하여 칭찬하고 있는데, 그러나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을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인정해서도, 허용도 공감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승리가 다가 아니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힘의 승리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그 승리는 성숙함이 아닙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지만 제 2의 웃시야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아닌데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다윗의 그 승리를 얼마나 바라고 있던가요? ~그 욕망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 다윗의 다윗 됨은, 행13:22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로써,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는 최고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 승리에서가 아니라 밧세바 사건이후에 다윗이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긴 그 승리는 모든 승리가 될 수 없었기에, 그 승리 후 다윗은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위기 속에서 십여 년 간을 풍전등화의 삶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왜 이 거친 긴 시간을 지나가야 했을까요? 제 2의 웃시야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그 후에 왕이 됩니다. 그리고 승승장구합니다. 천하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윗은 삼하11장에서 보았듯이, 간음과 살인을 합니다. 제 2의 웃시야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차이점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웃시야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끝내 회복이 되지 못하고 나병환자로 마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가요? 천하를 다스리던 다윗이 제 2의 웃시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써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자로 끝납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나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선지자 나단의 직언에 완전 항복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마1:6의 말씀을 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삼하12:15도 봅니다.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밧세바가 아닌 우리아로 끝까지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윗의 아내가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라는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영원히 남겼다는 이 말씀은 결코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밧세바가 아닌 우리아의 아내라는 뜻은 영원히 간음자요 살인자라는 불명예가 황제 다윗에게 영원히 남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놀랍게도 전혀 감추지 아니하고 다윗이 완전 평생을 인정했기에, 그는 위대한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치욕과 최악의 불명예를 다윗이 결코 숨기지 않았다는 것에 칭찬을 영원히 받고 있습니다. 이런 역설이 있을까요? 어떤 종교에서 어떤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 역설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오셨는지를 그 다윗을 통하여 알게 하십니다. 
 
황제로서, 자기가 얼마나 악한 죄악을 저지른, 다르지 않은 다윗이었는지를 인정했다는데,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성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성경에서 밝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끝까지 나병환자로 끝났기에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다들 100% 웃시야처럼 끝장이 날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반전이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셔야 되었는지를, 왜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되는지를 알게 합니다. 특히 다윗의 반전은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역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고 평생을 황제가 아닌 성도로 자리를 지켜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라면 선지자의 그런 직언을 용납할까요? ~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면, 그 권세와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은 나부랭이 정도도 안 되는 법이 아닙니까? 그렇게 여기고도 남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지 않았나요? 대하25:14-16입니다. 
 
25:14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25: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저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25:16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
 
아마샤처럼 힘과 승리를 거머쥐게 되면, 누구든지 아마샤의 이런 반응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아닌가요? 자기 자신과 우리 주변을 생각해 보세요~ 천하를 거머쥐게 되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도 전혀 보이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삼하12:7-15입니다.
 

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2: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2: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그리고 그 후에 다윗의 그 만행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터지는 사건 속에서 다윗은 황제로서도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자신을 공격하는 적의 세력들을 향하여, 힘으로 제압하는 황제 다윗이 아니라, 천하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면서, 정죄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던 황제 다윗의 그 힘과 권세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다윗의 거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제나 자신이 저지른 그 죄로 인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에게 도움만을 구한 그 다윗을, 성경에서 위대한 자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 식의 영웅을 영웅으로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지 못하다가보니깐, 어떤 실수를 합니까?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용기에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는지를 아무도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단지 골리앗과 싸움에서 보여준 그 승리로 다윗을 믿음의 용사요 영웅으로 평가하는데, 그건 아니라는 것이 성경에서의 경고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다윗은 어린 신앙에 불과 했었더라면, 밧세바 사건의 이후의 다윗의 신앙은 깊어집니다. 점점 깊어지면서 노년에 이르면서 아무 힘도 권세도 없는 자처럼 실제로 살아가다가, 어떤 찬양시를 노년에 드리던가요? 시23, 51편의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공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51: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승리와 힘의 찬양이 아니라 죄를 짓고 난, 그래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라는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얻고 난 후에, 위대한 23편과 51편의 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위대한 것이라고요? 우리들은 잘 나갈 때, 뜨거운 찬양을 드리고들 있지만, 그 찬양은 결국 제2의 웃시야가 되고 마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제2의 다윗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던, 예의상, 이름은 빼고 성만 밝히면, 부끄러운 죽음으로 떠난 조 목사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굉장했나요? 인기와 명성이 세계적으로 엄청났었지요?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정말 웃시야 왕처럼 문둥병으로 죽고 맙니다.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와 권세까지도 가득했었지만, 회개가 없이, 온갖 추악한 만행을 다 저지르고 말았지만, 그 추악함이 세상에 다 밝혀졌는데도, 아무 회개도 없이 저지른 죄를 다 감춘 채, 부끄럽게 죽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권세와 명예와 영광을 누리던 황제 다윗은 나부랭이 정도도 안 될 수 있는 선지자 나단의 직언에 즉각적인 회개를 한 후에 다윗은 용서를 받았지만, 그러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최악의 불명예인 우리아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두말없이 그대로 인정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악을 인정하므로 그는 영원한 성군이 되어 지금도 우리의 악하고 더럽고 부끄럽고 더러운 못난 수많은 허물들을 하나도 감추지 말라고 다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밧세바 사건이후에 발언권이 없는 황제로 삽니다. 반론을 피지 못하고, 적대세력들을 다윗이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 용서도 내가 황제이기에 그래서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를 받았기에 그래서 용서를 해야 된다는 것을 조용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눈감아주는 것이 용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에 골리앗의 용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한 그 시작이 되면서,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귀감이 되는 남은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 자신도 사망을 넘어설 수 없는 그런 자신인 것을 밧세바 사건 이후에 알게 되면서 품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까지의 다윗은 자기부인과 참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쉬운 생각을 했던 다윗이, 자신이 간음과 살인을 하게 되면서 죄의 세력이 어떻게 자신을 공포로 몰아가게 되는지 알게 됩니다. 자폭케 하는 죄의 세력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떤가요? 죄의 세력과 늘 싸우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그 무서운 죄의 세력을 밝히기를 전혀 원하지 않고 있나요? 그러나 끝까지 감추면, 결국 문둥병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죄악을 인정하므로, 아무도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참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죄인인 것을 알았기에 저주의 말을, 심판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랬기에 심판의 말, 저주의 말을 하지 않았던 그 다윗이 신앙의 진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과 수고로 인한 업적을 신앙의 열매로 착각하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신약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눅15:12-32입니다.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큰 아들은 착실하게 열심히 아버지를 돕는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그 타락한 동생에 대하여 후대하는 아버지를 향하여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주신 것일까요? 작은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큰 아들의 반응에 우린 좀 더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입고 나면, 다들 작은 아들이 큰 아들이 되어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작은 아들과 같은 이웃이나 지체들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눅15장의 큰 아들처럼 불평하고 원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성숙한 신앙이 밧세바 사건 이후에 나타났던 것처럼, 그래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에 대하여서 죽이려고 했나요? 특히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칠 때, 베냐민 사람인 시므이가 저주할 때에도,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이려고 신하들이 그럴 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삼하16:5-14입니다.
 
16: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16: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16: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16: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6: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6: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6: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자기가 저지른 죄를 알고 천하를 다스리던 황제이었지만 힘으로 제압하지 아니하고 다윗은 조용히 넘어갑니다. 자숙하고 침묵하고 품고 정죄하지 아니하고 나도 그랬지 하면서 자기부인을 합니다. 신앙은 힘과 열심과 확신에 찬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다윗처럼 존재론적인 자신의 그 한계를 보고 끝까지 부족하고 실수하고 시행착오 속에서 방황하는 이웃들이 깨닫고 두 손 들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16:15의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미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정성과 마음을 다하고 있던가요? 하나님이 아닌 이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래서 수고하고 노력하고 땀을 흘리지 않는 한, 그것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혐오스러운 자신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기준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한, 웃시야의 그 종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제 2의 웃시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눅16:19-31입니다.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힘의 신앙, 즉 형통한 자들은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씀만을 믿고 순종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믿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원하였던가요? 천하를 다스리는 다윗과 같은 힘의 구세주를 바라고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오신 구세주를 결국 죽이고 맙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요? 
 
힘의 신앙으로 죽인 살인자들을 보복했던 주님이 아니라 오히려 배신자, 배반자들을 품어 새롭게 재창조해 주십니다. 이것이 영웅입니다. 힘보다 더 큰, 인간의 죄악보다 더 큰 그 은혜로, 주님의 마음으로, 배신자, 배반자들을 용서하여 같이 화목과 화평을 이루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이것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현실은 현실의 영웅이 아니라 다 품고 내일을 준비하여 함께 승리의 삶을 이루어갈 때, 그것이 진정한 영웅이기에, 영웅의 현실은 눈물 없이, 갈 수 없고, 쉽게 안락한 삶을 원해서도, 바라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제 2의 웃시야만이 무엇을 원하다고요? 힘과 부를 원합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려 현실의 승리만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초보신앙에 불과하기에, 우린 웃시야 왕의 그 행보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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