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2021/12/26 왕하15:32-37, 대하27:1-9 본문

주일 설교 말씀

2021/12/26 왕하15:32-37, 대하27:1-9

PastorYK 2021. 12. 27. 07:00
말씀: 왕하15:32-37, 대하 27:1-9   
제목: 요담 왕에 대한 다른 평가
 
한 해를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1년의 마지막 52번 째,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몇 번이나 거쳐 이 시간까지 와 있는 자기 자신입니까? 그 마지막 시간은 마지막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마지막이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어떤 마음의 자세로 맞고 있는 마지막 시간 입니까?
이 질문과 함께 오늘은 열왕기서에서 거의 슬쩍 넘어 갈 수 있었던 남 유다의 11대 왕 요담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역대기서의 요담에 대한 말씀과 비교해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배워보려고 합니다. 
 
먼저 왕하15:32-38과 대하27:1-9의 말씀을 봅니다. 왕하15:32-38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 2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나이가 25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간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 문을 건축 하니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느냐, 그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요담이 그의 조상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역대하27:1-9의 말씀을 봅니다.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 2년과 제 3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25세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16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 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두 말씀에서 어떤 차이점을 보셨나요? 열왕기하에서의 요담 왕은 역대기하에서의 말씀과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평가가 그는 믿음의 어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요담도 아버지 웃시야처럼 정직하게 잘하였다는 점과 그리고 성전의 윗문 세운 것을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요담의 문제점으로는 아버지 웃시야처럼 잘하기는 하였으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므로 하여 결국 백성이 산당에서의 죄악을 저지르게 하는 그 책임을 두 말씀에서 역시나 동일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15:37에 보면, 역대기하와 다르게 하나님께서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을 보내어 공격을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역대하27:1-9의 말씀에서는 어떤 평가를 내렸나요?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주의 성전에는 성전에 들어갔다가 직권남용으로 문둥병을 얻은 아버지 웃시야를 보고서는 아마도 성전에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담이 구체적으로 어떤 왕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그가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 2년과 제 3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다릅니다. 왕하에서는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하에서는 요담 왕이 잘한 점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면서 어떤 믿음이 있는 왕이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열왕기서하와 역대기서하의 차이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그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지금 구약과 신약을 함께 볼 수 있게 된, 모든 자녀들이, 어떤 큰 복을 받은 귀한 존재들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깊고 깊은 하나님의 그 뜻을 조금 더 배울 수 있는 특별한 특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데, 마12:46-50과 마13:16-17입니다. 먼저 마12:46-50입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은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누구라고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아무나가 아니라 구약의 이스라엘도 아닌 신약의 성도들만이 주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의 완성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마13장에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누가 복된 자라고요? 나를 보고 듣는 것만큼 복된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왜 예수님을 보고 듣는 자가 복된 자일까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장님으로, 귀머거리로, 불치병에 결려 온갖 고통을 받아야 했기에, 저주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리고 문둥병자로 평생 살아가야 했고 죽음을 이길 그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므로 인하여 보세요! 마11:5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leprosy)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런데 복이 아니라고요? 우린 복덩어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동의하시기에 복을 받은 자로써 그 책임을 힘껏, 온 마음을 다하여 성도로써의 몫을 잘 감당해야 했는데 어떤가요? ~ 
 
그 귀한 복을 얼마나 진정으로 최대한 누리고 맞는 이 마지막 한 해의 자리요 시간인가요?~이 복 때문에 2021년 올 한 해가 지금 감회가 무량합니까? 아니면, 엉뚱한 복, 사라질 복,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복과 또는 아픔과 또는 어떤 손해로 이런저런 일들로 일희일비하다가 맞이한 부끄러운 이 자리와 이 시간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건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라질 것을 가지고 좋아하고 있다면, 결국은 손해요 실패요 좌절일진데, 아니 어떻게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제정신이 아닌 자가 지금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확인이 된다면, 지금 그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
 
아니면 그 반대로, 나는, “주님을 보고 듣는 것만큼 복된 자가 없다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주님의 동생이 된,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 말씀만으로도 지금 이 자리는 어떤 감동이 차고 넘쳐야 할까요? ~ 주님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성도가 된, 자기 자신이, ‘그렇구나~ 나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고 다 가진 그런 존재일진데, 그래서 지금 아니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아야 되는 이 마지막 시간과 이 마지막 자리가 새로운 시간과 자리로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이보다 귀한 것이 있을까요? 이보다 큰 승리와 자랑은 없을텐데,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의 상태인가요? ~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심히 놀라운 점은 왜 성도된 자들이, 여전히 썩어질 것과 사라질 성공과 승리만을 위하여 그렇게 수고를 합니까? 왜 우리는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못해 안달하고, 하라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안달하는 것입니까?~ 썩어질 것과 사라질 성공과 승리만을 위하여 그렇게 수고한 자신을 보면, 한 해를 보내면서 얼마나 심히 억울해 하셔야 하고, 아파하고 울어야 할까요?~ 2021년 남은 시간은 낭비하지 마시고 남은 시간을 통하여 자신을 깊이 점검하시고 그리고 다시 회개하고 기경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연말이 되면 누군가에게 그동안에 감사 카드라도 몇 자 적어서 보내는 여유만큼은 있어야 되는데, 어떤가요? 여전히 받고만 있나요? 적어도 성도된 복된 자로서 조용한 연말의 시간을 갖고 그동안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과 기적으로 충만케 하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위하여 이렇게 저렇게 해 보겠습니다! 라는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만난 복된 자의 자세가 아닙니까? ~ 복된 자로서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복된 자이기에 연말이 되면 늘 어떤 시간을 가져야 되는지, 이젠 그래야 되는데, 여전히 죽은 물고기처럼 떠내려가고 있지는 않나요? ~ 주님을 만난 성도라면, 한 해를 보내면서, 그리고 새해를 맞아야 되는 자로써, 최소한의 어떤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은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일초일전의 삶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회복과 승리로 마감할 수 있고 한 주일을, 한 달을 성도로서의 주님하고의 동행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아니 일 년을 작년보다 어떻게 더 낫게 마감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감사하다는 고백을 드리면서 다음 해를 맞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셨던 롬14:23의 말씀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드릴 말씀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그 태도가 다르듯이, 왜 두 역사서도 차이가 날까요? 열왕기서는 멸망의 중심 내용이라, 율법을, 역대기서는 회복이 그 중심이라, 은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먼저 기록연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 상하의 기록연대는 남 유다가 완전멸망을 당한 주전 561년부터 귀환 시기인 주전 538년 이전인, 절망, 실패의 시기가 기록연대라면, 역대기 상하는 주전 450년경으로서 그 시기는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주역이 되어 신정국가로써 재건과 이스라엘의 위상 회복에 박차를 가하던 그 시기가 기록연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록연대만으로도 그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열왕기서는 멸망부터 돌아오는 시기로써,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왕하의 15장에서 등장하는 요담은 그의 통치하는 동안에 대하여, 요담은 믿음의 어머니로부터 신앙교육도 잘 받은 왕으로서 성전의 윗문까지도 세우면서 통치를 곧잘 했었지만 그러나 백성들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남 유다가 받았음을 왕하15:37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면, 대하27장에서는 에스라를 중심으로 신정국가로써 재건과 이스라엘의 위상 회복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기에 요담에 대한 평가를 열왕기 상하의 말씀하고는 다르게 기록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결국은 회복되고야 만다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었던 역대기에서는 요담의 통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잘한 왕으로서의 그 공로를 중심으로 기록하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다윗과 하신 그 약속은 꼭 이루어진다. 하나님에게 실패란 없다! 실패 속에서도 승리로 이끌고 마시는 하나님이시다! 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니 ‘복된 너희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라’에 그 중심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보다 귀한 능력과 진리가 없는데, 왜 울지 않고 애통해 하지 않고 죽은 자로 와 있을 수 있나요? 
 
2. 기록동기만을 보더라도 두 역사서가 왜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서의 기록동기를 보면, (1) 과거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회고 및 반성과 (2) 여호와께 대한 순종 여부가 선민 이스라엘의 실패와 성공의 시금석이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면, 역대기서의 기록동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하여 상실해 버린 선민의 면모를 회복토록 하기 위한 교훈 제시 및 위로와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역대기 상에서는 그 전체가 긴 족보와 제사와 다윗의 승리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역대기 하의 내용은 남 유다의 왕 솔로몬부터 끝까지 칭찬 중심으로 대부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로 귀환 이후 신정국가로써의 재건에 필요한 자료들과 특히 성전 제사 회복에 관한 재료들을 남겨두도록 하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기록동기에 따라서 이렇게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도 한 각도로만 보고 주장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4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을 마태-왕으로, 마가-종으로, 누가-사람으로, 요한-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듯이)  항상 전체적으로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코끼리를 두고 두 장님이 한 사람은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밧줄 같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할 때, 맞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전체를 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빠짐없이 보고 연구하지 않으면, 두 장님처럼 같은 코끼리를 서로 다르게 묘사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율법과 은혜를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보지 아니하고 다르게 이해를 하게 되면, 어떤가요? 교회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과 은혜를 구속사적 차원에서 보지 못하게 되면, 기독교가 아닌 일반종교와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억지로 풀지 말고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강력한 경고를 왜 하셨는지, 충분한 이해가 되게 합니다.    
 
3. 두 말씀을 기록 관점에서 보면, 다른 이유에 대하여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역대기의 기록 관점은 (1) 회복과 화평인 제사장적 관점 (2) 선민의 삶의 근거가 될 성전 제사 회복 강조 (3) 신정 국가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과 성전 중심 관점 (4) 다윗 언약의 중심이 기록 관점입니다. (5) 과거 이스라엘의 찬란한 번영을 이룬 다윗의 왕국과 통치 이념 강조에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서는 (1) 율법이 우선인 선지자적인 관점 (2)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본주의적 사울 왕정과 신본주의적인 다윗 왕정과의 대조를 이루고 있고  (3)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과 실제적인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 비판하고 있고 (4) 이스라엘의 그 패역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 다윗 언약을 통하여 제시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의해 성취됨을 역대기와 다르지 않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역사를 공통점도 있지만 적지 않게 다른 관점으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는 그 이유는 한 번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두 역사서를 통하여 저는 율법과 은혜로 보고 있습니다. 이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이미 알고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지만 되는데,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고 있기에, 어떤 지경인가요? 
 
율법주의자와 은혜주의자로 서로 상충되어 복된 자로 제 책임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신앙은 결국 율법과 은혜의 조화로 건강한 신앙, 삶의 본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보세요. 거의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다가보니깐 교회까지도 끼리끼리가 되어서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적대관계가 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가야 되는데, 적으로 여기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은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늘 불평과 다툼과 미움과 세력으로 싸우고들 있으니, 초신자들과 불신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 성도 간에 맞물려서 서로간의 성장이 되어야 그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과 은혜도 서로 적대관계가 아니라 맞물려서 서로 협력하면서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되는데, 어떤가요? 은혜만을 주장하여 내용물을 담을 그릇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릇이 없으면 어떻게 음식을 담을 수 있나요? 음식이 없는 그릇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그릇이 무슨 가치가 있나요? 서로 맞물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를 위하여 부연을 하자면, 뼈대가 율법이라면 살과 피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뼈가 없는 우리의 살과 피가 어떻게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뼈만 있고 살과 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늘 항상 같이 묶여 있어야 합니다. 뼈대에 피와 살이 있어야 하듯이, 율법과 은혜는 늘 같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결국,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과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의 가르침입니다
 
율법인 뼈대만이 다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으시더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는 신앙은 아니기에 그래서 율법과 은혜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이루어내라고 주신 율법이요 은혜입니다. 서로 치우치면 무너집니다. 치우치면 깨어집니다. 치우치면 내일이 없습니다. 묶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한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버려야 될, 옛 자아가 있으면 안 됩니다. 내 것을 가지고 함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그 역할을 겸손하게 감사의 마음으로 감당해야지만 됩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 열왕기서요 역대기서입니다. 쥐고 있는 한, 서로의 조화의 승리는 없습니다.

 

마25:24-29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대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이렇게 더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으로 치우치면 이렇게 다 빼앗기고 맙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밖에 여기지 못하게 되면, 너는 나 하나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가 되면서 다 잃고 말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 안에서 이해를 하여 전심으로 따르면, 이보다 복된 삶은 없습니다. 왜요? 말씀을 의심 없이 따르면, 너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완벽하게 다 감당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같이 가라고 하십니다. 비록 거기까지 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서 가능하면, 좁은 길을 가지 않고 쉽게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이 무익한 종이 바깥 어두운 대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된다 하시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서로 다른 두 관계의 조화를 위하여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를 위하여 서로 대충 쉽게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화와 연합이 어렵다고 하여 쉬운 길을 찾아 갔다가는 있는 것까지도 다 빼앗기고, 게다가 이 무익한 종이 바깥 어두운 대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데, 아직도 이 망하고 버려지는 길을 가지 못하여 안달할 수 있나요? ~ 이제, 심판의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합니까? 아직도 자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다시 진지하게 알립니다. 지체간의 연합과 조화를 위하여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렸다가는 절단납니다. 마지막 경고라 여기시고 고귀한 자녀답게 철저하게 준비하시는 가운데, 그 복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나누는 일에 쓰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01/09 열왕기하17:1-41  (7) 2022.01.10
2022/1/2 왕하16:1~20, 대하28:1~27  (8) 2022.01.03
2021/12/19 역대하 26:1~23  (7) 2021.12.20
2021/12/12 역대하25:1-28  (8) 2021.12.14
12/05/2021 열왕기하 13:1-25  (9) 2021.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