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23/2022 열왕기하19:1-37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23/2022 열왕기하19:1-37

PastorYK 2022. 1. 24. 07:18
말씀: 왕하19:1-37                    
제목: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성경이 진리인지 아닌지, 성경이 생명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가요? 승리의 기준이 무엇이던가요? 우린 무엇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있나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우린 이 2700년 전의 이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을 해야 되는가? (2)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가장 궁금한 점이 무엇이어야 할까? 즉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지금 자기의 그 자리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입니다. 사실 지금은 앗수르라는 나라도 없는 상태에서 이 말씀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비록 앗수르라는 그 나라는 세상 역사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고 말았지만, 앗수르 세력과 완전 같은 그 세력은 바벨론의 이름으로, 메대바사의 이름으로, 페르시아의 이름으로, 그리고 로마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이어 언제나 동일하게 지금까지도 아니 앞으로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는 자들을 무섭게 공격하고 있는 세력이 없나요?~ 
 
그 비열함도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면서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해석을 위하여 ‘소쩍새는 7일간을 밤낮으로 그렇게 울었나~’ 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린 어떤가요? 분명히 공격을 24시간,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받고 있을텐데, 우리의 반응은 어떠하셔야 될까요? 우리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오늘 제목처럼,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묻고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지금 우리는 승자된 자로 진리의 삶을 허락 받은 자들로써, 히스기야처럼 믿음의 그 자리를 지켜내기 위하여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즉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나요? 쉽게 이야기를 한다면 우린 그 공격을 여지없이 받고 있을텐데, 그래서 지금 히스기야처럼 그렇게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자기의 삶을 믿음을 가지고 지켜내고 있나요? 아니면 큰소리를 치는 힘으로만 평가하고 힘으로만 만족하는 그래서 실패하고 마는 그 세상 세력인 앗수르처럼, 진리를 모르고 있기에 그래서 방자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망언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 악한 행보를 밟고 있나요? 아니 이미 실패하여 수없는 후회의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여전히 돌이키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의 힘의 방식과 원리가 맞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가서는 아니 되는, 망할 수밖에 없는, 그 절망의 길에서 헛수고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아닙니까? ~
 
그러나 그 잘못된 길, 실패하고 망하는 길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힘으로 사는, 힘이 모든 것인 앗수르의 산헤립의 그 세력이 어떤 결과를 반드시 가져오는지를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헛된 길로 빠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주야로 밤낮으로 쉬지 말고 말씀을 가지고 바쁘게 점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세상의 힘인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옷을 찢고 베를 입고 즉 회개를 하면서 싸웠던, 그 믿음의 왕 히스기야를 공감하시면서 그 선택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악한 세력의 공격 속에서도 약속하신 대로, 자녀들의 고난을 기억하시고 계시는 분, 자녀들의 간구를 응답하시는 분, 늘 함께 하시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산성과 피난처와 피할 바위가 되시므로, 다 맡기고,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그 자리를 지키려고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옷을 찢고 베를 입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자기의 현 자리가 최악의 형편일지라도 완전 절망의 상태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원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만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린 그 자리에 와 있나요? 지금 그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나요?~ 결국 히스기야의 그 승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자기자리를 지킨, 포기하지 않고 옷을 찢고, 베를 입고 주님에게 나오므로 얻은 그 승리를 지금도 마찬가지로 주시고 계시는데 그 승리의 삶을 누리고 있나요? ~ 당연히 아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승리하는, 승리의 목적지를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도들이, 힘으로만 살기에 망하고 마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처럼 주정뱅이가 술을 먹고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그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심지어 망각하고 힘으로 믿음을 대신하기에, 옷을 찢기는커녕, 굵은 베를 입기는커녕, 히스기야처럼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기도로 해결하고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지하고 미련한 그래서 파괴와 부패를 일삼고 있는, 악하고 미련한 앗수르를 대신하는 지금 그 세상의 힘, 재물과 권세 때문에 당하고 그래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성도들이기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마5:1-12입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세상의 세력인 앗수르의 공격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애통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 때문에 핍박과 조롱과 수모를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왜 복입니까? 히스기야를 통하여 복이라고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께서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렘2:9-13입니다
(렘 2: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렘 2: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렘 2: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만약에 힘을 원하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저지르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그래서 들통이 났다면, 어떠해야 된다고 합니까? 렘2:12입니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우린 히스기야처럼 세상 세력 때문에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 앞에서 응답을 기다려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면, 심하게 떨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합당할진데, 어떤가요?~회개를 했나요? 아니면 그 반대 입니까? 
렘2:14-21의 말씀을 봅니다.
(렘 2: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렘 2:15)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렘 2:16)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렘 2:1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렘 2: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렘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렘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돌이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애굽으로 앗수르에게 아니 현실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면 세상 승리를 위하여 돈과 힘과 권세를 가진 세상세력에게 도움을 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렘44:15-19입니다.
(렘 44:15) 그리하여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렘 44: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렘 44: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렘 44:18)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렘 44:19) 여인들은 이르되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의 형상과 같은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하는지라
이럴 수가~ 뻔뻔함의 극치입니다. 결국 어떤 심판을 받게 됩니까?
렘44:20-23입니다. 
(렘 44:20) 예레미야가 남녀 모든 무리 곧 이 말로 대답하는 모든 백성에게 일러 이르되
(렘 44:21) 너희가 너희 선조와 너희 왕들과 고관들과 유다 땅 백성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분향한 일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셨고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닌가 
(렘 44:22)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을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
(렘 44:23) 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난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일어났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성도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지 못하는 자신을 말씀을 통하여 보면서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복입니다. 말씀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보아도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재앙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악함에 대하여 용서만이 아니라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시32:1-2입니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죄에 대하여 깨끗하게 용서받는 것도 복이지만, 3-4절의 말씀을 봅니다. 
(시 32: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시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지은 죄를 감추자 그로인한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에게 자복하게 되면서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어떤 복이 임하던가요? 죄사함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재앙과 환란까지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허물과 죄악에 대하여 전혀 아파하지 못한다면 이런 고백과 이해를 조금도 얻어내지 못하고 영원히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합니다. ‘나는 어디쯤 가고 있나요?,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나요?’ 다른 곳의 말씀도 봅니다. 
시편 84:5-6입니다.
(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성도의 삶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형통과 승리와 자랑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은 눈물 골짜기라고까지 합니다. 그 점을 모르면, 나는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라는 낙심과 하소연으로 반응하게 되겠지만, 아닙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나를 향하여, 그런 꼴로 살면서, 너는 예수를 왜 믿니? 라는 손가락질을 우리가 누군가에게 꼭, 받아야 되는데, 조롱과 수모를 받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린 지금 잘못된 길에 서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받는 것에 대하여 당연하게 아니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자라면 그 수모와 조롱에 대하여 기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다가 이스라엘처럼 망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수모와 조롱을 받게 될 때, 어떤 고백을 하게 될까요? 시137:1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불순종으로 결국 망하고 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왜 울어야 했을까요?
시137:3입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를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이방신을 믿는 죽은 자들로부터 당하는 그 조롱이 속상했던 것입니다. 이방 그들에게, 죽어 있는 그들에게, 살리는 복된 하나님의 뜻과 길을 전해야 되는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생 노릇을 해야 했던 것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했던 그 조롱과 수모가 통곡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세상의 악의 세력에 둘러싸여, 싸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죄짓기를 밥 먹듯이, 물마시듯이 하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들이면서, 세상으로 향해 놓고서는 울기는커녕, 오늘의 수입과 받은 성적의 결과로 일희일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는 것입니까?,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그 성도된 자와 그의 가족과 그 나라의 내일이 어떨까요? ~실패한 앗수르를 보시면 됩니다. 실패한 그 결과는 이 두꺼운 구약의 말씀이 분명하게 수없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히스기야를 보세요! 왜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왕하18:17-37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점을 왕하19:3-5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왕하 19:3)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왕하 19:4)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왕하 19:5)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힘인 앗수르에게 온갖 조롱과 수모와 능욕을 당하게 되자, 히스기야가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에게 나아간 이유입니다. 
 
자~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는 세상의 힘으로부터 어떤 조롱과 수모와 능욕을 받았나요? 아니면 받은 적이 없나요?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힘에 당하게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당하는 것입니까? 같이 놀던 세상 사람들하고 이젠 놀 수 없는 자가 되었기에, 같이 놀던 세상 사람들의 그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빛인 성도들을 통하여 그들의 치부가 여지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다가보니깐, 예수님이 그래서 당하셨듯이 우리들도 죽을 때까지 당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 지난 설교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지 못한 지체가 있기에 다시 그 말씀을 봅니다. 요15:18-20, 요17:14입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악의 세력의 공격과 핍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미움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당했나요? 당하지 않았다면 무슨 뜻인가요? 세상과 같이 놀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가 세상과 같이 놀았기에 조롱과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보다 기막힌 노릇은 없는 것인데,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오히려 세상에서의 헛된 것들을 얻어 그래서 즐거워한다면, 이런 망령된 자가 어디 있을까요? 성도가, 망하는 세상과 같이 동행하면서 즐거워한다면 그것이 어떤 악함인지를 모를 수 없어야 하는데, 그래서 히스기야가 세상의 조롱과 수모와 능욕으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했던 것인데, 우린 히스기야와 전혀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심한 세상의 공격과 조롱과 수모와 능욕을 받고 있기에그래서 우리들도 히스기야처럼 해야 되는데, 옷을 찢기는커녕, 죄진 그 느낌마저도 없다면, 망하는 망한 세상 세력인 앗수르와 무엇이 다릅니까? ~ 문제는 어디에 있나요? 그 앗수르는 그날 185,000명이 다 죽어, 송장이 되어 철수를 했지만, 돌아간 산헤립은 하나님을 조롱한 대가로 대하32:21입니다.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이미 예언하신 그대로 자신의 아들들에 의하여 결국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누가 승자요 누가 패자입니까? ~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면, 나오는 대답이 어떤가요? 꼭 찍어 먹어 봐야 알겠다는 식의 반응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끝까지 가보고 나서, 그리고 믿을 작정입니까? ~
렘2:19의 말씀을 봅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도의 고통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믿는 성도는 어떤 선택을 하셔야 될까요? 찍어서 먹어 본 다음에 선택하겠다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성도라면 무엇이 악이요 고통인지를 이런 말씀을 통하여 보거나 듣게 되었다면, 곧바로 마음을 그리스도의 푯대로 향하지 않을 수 없어야 되는 것인데, 어떤가요? 물론 늘 아멘하십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 십 년인가요?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망하기에 그래서 꼭 기억하고 그 심각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죄악 3가지를 말씀드립니다. 
 
(1) 렘2:34-35입니다.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본인은 분명히 가난한 자를 죽여 피를 묻혔지만, 나는 담 구멍을 뚫다가 묻은 피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무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진노가 오지 않는다는 식입니다. 누구와 같나요? 전형적인 우리 자신들이 아닙니까? 성도가 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말씀의 빈곤으로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있기에 어떤 진노가 임할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그런 자기 자신을 보면, 무엇이 다릅니까? 히스기야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우리들일진데, 그래서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즉 회개하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악한 세상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떤가요? 히스기야처럼 세상의 세력과 싸우려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고 앗수르의 산헤립의 그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를 정결케 하고 살리고 회복을 주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2) 렘3:3-5입니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지금 상황이 그때와 다르지 않은데, 죄악으로 코로나 19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살길까지도 막막한데, 다들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회개를 우선으로 해야 되는데, 단지 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이시여,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습니까? 라고만 한다면, 말이 될까요? 지금 교회들이 회개 없이 단지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히스기야처럼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당하여 흘린 바벨론의 강가에서 흘린 그 눈물을 우리들도 쏟아내야 할 것입니다. 
 
(3) 렘3:9입니다.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자기가 짓는 죄는 다 가볍게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산헤립이나 북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고 남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 70년의 삶을 당하게 됩니다. 가볍게 여기고 있기에 히스기야의 그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경고의 말씀을 듣고서도 아무 두려움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의 헛된 것들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그 심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받은 심판보다 더 무서울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렘3:11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북이스라엘의 망한 그 이유를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쁘다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가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보다 신앙이 더 바른가요? 아니면 북이스라엘보다 더 나쁘다고 하시는 남유다보다 더 나쁜가요? 두 가지를 가지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1)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도움을 간절하게 청하고 있는데, 우린 어떤가요? 우린 어떤 악의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나요? 앗수르보다 더 막강한 세력의 공격을 더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요? 지금이야 말로 최악의 상태가 아닐까요? 왜요? 나를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하셨다가 부활하신 그 막강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악의 세력이 대적하려면, 특히 심판의 날이 다 되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악의 세력은 모든 힘을 다 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히스기야처럼 옷을 찢고 굵은 베 즉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에게  더 많이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험한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으면서도 어떤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나요?~ 옷을 찢기는커녕, 굵은 베를 입기는커녕, 세상의 세력처럼 힘을 갖지 못해 안달하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우린 남유다보다 더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렘4:30-31입니다.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내가 소리를 들은 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로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세상 세력인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망하게 되었는데 바벨론의 공격을 회개와 믿음으로 막지 아니하고 화장, 즉 인간의 방법으로 세상 세력을 싸우려고 하니 그것이 얼마나 헛된 짓거리인지를 알겠느냐? 하시면서 너희들은 바벨론의 멸시를 당하고야 만다고 하시자, 그 당시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렘4:31에 보면, “크게 두려워하면서내게 화로다 이제 망하게 되었구나~”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당시보다 수천 배, 수억 배의 악한 세상세력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는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던가요?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을 하고 화장을 하여 그 당시보다 수천 배, 수억 배의 악한 세상 세력을 대적하고 막아내려고 하니, 우리가 어찌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요? 개털만큼도 나은 것이 없는 완전 절망의 상태가 지금인데, 옷을 찢을 생각도 굵은 베 즉 회개를 할 생각도 아니 하고, 오히려 악하고 악한 세상 세력과 더 가까이 지내면서 부자가 되지 못해, 썩을 명품을 더 갖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데, 어찌 남유다보다 나을 수 있던가요? 
 
그렇다면 만약에 회개를 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그 심판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심판을 받아야 할까요? 남유다가 망한 후에 어떤 지경이었는지를 보면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그 짐작의 정도는 특히 예레미야 애가에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몇 군데만 찾아봅니다. 애2:11-12, 20-21, 3:4, 11-16, 45, 4:8-10입니다.
(애 2:11 )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애 2:12 )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애 2:20 )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애 2:21 )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애 3: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애 3:11 )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애 3:12 )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애 3:13 )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애 3:14 )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애 3:15 )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애 3:16 )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애 3:45 )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애 4: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애 4: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애 4:10 )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하나님을 외면한 남유다의 심판이 이 정도라면, 우린 이 상황보다 얼마나 더 심할 수밖에 없을까요?
 
우린 지금 자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자기의 자리와 위치를 정확하게 말씀으로 확인하셔야 하고 만약에 세상의 방법과 힘으로 앗수르처럼 살고 있다면 히스기야가 보여준 그 신앙,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에게로 속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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