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4/25/2021 열왕기상 1:1-28 본문

주일 설교 말씀

4/25/2021 열왕기상 1:1-28

PastorYK 2021. 4. 26. 14:54

말씀: 왕상 1:1-53                                        

제목: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우리들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지정의 중에서 어느 부분이 자기의 문제점입니까? 누구든지 지식의 약점, 감정의 약점, 또는 의지의 약점이 있지 않습니까?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아도니야의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할진대 그에게도 문제점이 있어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무너진 아도니야를 통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었을텐데, 왕이 되겠다고 나셨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나중에는 아버지 몸 종 아비삭까지 자기 아내로 구했다가 결국 동생 솔로몬의 명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 그런데 아도니야를 보면 어떤 인물입니까?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책망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외모까지도 준수한 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준비된 자 같습니다. 그러나 버려집니다. 여기서도 또 확인이 되고 있지만, 우리의 부족함이 얼마나 귀한 조건인지를 알자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결국은 이렇게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의 조건이 남이 볼 때, 부러움이 되면 될수록, 거기에는 어떤 자기 책임이 따르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버려진 아도니야가 될 것입니다.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책임이 없는 자가 되면 스스로를 높이려는 행보가 되면서 결국 다 잃고 말더라는게 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요즘 최근에 생긴 사건이 바로 LH 한국토지공사 직원의 정보남용사건입니다. 그 남용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총동원하여 땅을 투기한 것이 들통이 나면서 국민의 어떤 분노를 샀던가요? 토지공사에서 일을 한다면 국민의 공무원으로써 종된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공무원으로서의 공적 권리를 악용하므로 결국 구속 되었습니다. 게다가 땅 투기로 번 수입까지도 다 압수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망한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지정의가 통제가 되지 않아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딤후3:1-5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나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어떻게 하면 다 잃고 망하는지를, 어떻게 하면 칭찬을 받고 영원히 빛을 밝히게 되는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정의가 통제가 되지 않아 파멸의 길을 가다가보니까, 정답을 정답인지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경고의 소리까지도 듣지도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살길을 버리고 가서는 아니 되는 죽음의 길을 가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봐야 될 것은 보지 않고, 먹지 말아야 되는 것은 먹지 못해 안달하고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은 기를 쓰고 갑니다. 그런 사람들의 다수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지정의의 노예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지정의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 안 된 자기의 지정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믿으면 안 되는데, 죽은 지정의로 선택하고 결정하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묶이지 않는 지정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지정의는 언제나 자기와 이웃을 죽이고 모든 것을 다 잃게 하고야, 말더라, 이것이, 또 아도니야를 통하여 확인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건은 단순한 한 개인적인 사건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우리들의 현실 사건입니다. 그리고 전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은혜의 가치를 모르는 개인의 지정의는 시간과 장소와 재물과 능력까지도 다 황폐케 합니다. 참! 무지막지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될 존재로 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들이 여전히 현실을 주관하게 되면서 계속적으로 우리 주변은 점점 더 공포와 황폐로 전혀 안전할 수 없게 된 것을 보세요! 심지어 은혜를 찬양까지 하면서도 지정의가 통제가 되지 않기에 영광된 삶입니까? 아니면 사단의 훼방거리로 크게 농락을 당하고 있던가요? 후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따르다보니, 심하게 주변이 사시나무가 바람에 떨듯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터지니까, 마켓마다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만 살아보겠다고 사다가 쌓다보니, 가난한 자들은 기회가 없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명품들은 다 팔렸고, 없어서 못 팔았다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지정의가 어떤 인간쓰레기가 되게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코로나 19로 우린 혼돈 그 자체인 우리 사회를 보았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지정의를 가진 사람들의 행세를 보세요! 정부에서 믿음을 가지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믿음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라 코로나 19 감염을 막아서 최소한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조치로 모이지 말라고 명했지만, 정부의 조치에 순종한 교회가 얼마나 되던가요? 모이라고 할 땐, 멋대로 하더니, 모이지 말라고 하니까, 모이지 못해 안달하여, 교회가 코로나 19의 감염집단으로 사회로부터 어떤 지탄을 받았나요? 이런 혼돈이 없습니다. 이런 요동이 없습니다. 이 작은 바람에도 거의가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동하는 자신과 주변을 보면서 무엇이 필요함을 알아야 할까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사시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시려면, 복된 안정적인 삶을 보장 받으시려면, 시93편을 보세요!

 

93: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3: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93:3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93:4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93:5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어떤 해답을 제시합니까? 시119:77입니다.

 

119: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라

 

살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 즉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막강한 능력인 은혜가 나를 주장하도록 하여, 자기 지정의 우선주의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은혜의 줄로 자기 지정의가 휘둘러 대지 못하도록 자신을 날마다 아니 매초 꽁꽁 묶어야 합니다. 은혜로 인한 지정의가 주장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결국 무너집니다. 은혜만이 나를 보호할 수 있고 안전이 보장이 되는데,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어떤 선택을 합니까? 아도니야처럼 스스로 높이다가 결국 떨어지게 되고 무너지고 맙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동일하기에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면서 다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자기의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바위가 되시면,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를 무너뜨리는 지정의가 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제되어야 할 자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특히 감정을 통제하려면 할수록 어떤가요? 항복하던가요? 감정이 통제가 되던가요? 처음부터 확~ 잡아 버리지 않으면 감정통제는 정말 어렵습니다. 감정통제의 그 순간을 놓쳐 자기감정을 어설피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덧이나 깊이 곪아버리듯이 더욱 심하게 요동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나요? 그냥 간단하게 자기감정이나 의지와 지식이 마음만 먹으면 통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확~ 잡는 훈련을 하지 못하면, 자기의 지정의는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난리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곧 죽어 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짓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까? 거의 상상이 안 됩니다. 지금 미국은 곳곳에서 아시아인들을 무차별 폭행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총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살다가 낳게 된, 자기 어린 자식들까지도 굶겨 죽이고 때려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통제가 안 되는 자기 지정의로 인한 파괴가 끝없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미얀마 군부 세력도 보세요! 나라의 주인인 백성을 무차별 사격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자기 지정의는 오직 은혜만으로 통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로 자기의 지정의를 꺾기 위해서는, 지정의를 은혜로 지배하려면, 평생 걸립니다. 은혜는 새로운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지정의는 자기의 근본 뿌리이기에 새로운 은혜에 지배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걸립니다.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은혜로 쉽게 저절로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마24:13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마24:42에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은혜 없는 지정의를 보세요! 무섭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핵폭탄, GMO, 코로나 19를 만들어 버립니다. computer를 만들어 놓고 사람의 피와 양심을 말려버립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기에 실은 참 무섭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자기의 지정의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습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나요

 

은혜를 모르는 그들은 돈이 최고이고 이 현실의 성공이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두려움으로 점점 채워지면서 외출까지도 어려워지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해답입니까? 준수하고 능력이 있는 왕의 아들 아도니야가 아닙니다. 오지랖 넓은 행보는 삼가 주시고, 은혜를 입은 자로써, 견디면서 서로 함께 같이 살아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아시고, 스스로 자족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감정과 의지를 이겨내지 못하여 더 이상 사단의 빌미를 주어 하나님의 일에 훼방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을 주는 복중의 복입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사랑, 정의, 상식의 명확한 규칙에 따라 살면서 섭리 문제만큼은 완전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아도니야를 보면 역시나 어떤 인물입니까? 오늘 등장하는 인물인 아도니야를 보세요! 대단히 지혜로운 자, 왕이 될 만한 자로 등장합니다. 크게 문제가 될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 그는 전후 모든 상황을 다 살핀 후에 왕이 되겠다고 선수를 친 자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정은 정말 그럴듯했습니다. 5-10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5절부터 봅니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전배의 의미는 왕보다 앞서 달려가면서 길을 정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man to run before him입니다. 아도니야의 준비는 대단히 철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까지 포섭했던가요? 7절입니다.

 

1: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모르는 아도니야로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는 군대의 우두머리 요압과 무엇보다도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확보를 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시작된 과업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를 나름대로 했습니다. 게다가 9절에 보시면,

 

1: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들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왕위 즉위식을 위한 장소와 초대할 모든 인물까지 물색하여 이미 초대를 해 두었고, 행사에 필요한 모든 물풀까지고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는 6절에서 어떻게 칭찬을 하고 있습니까?

 

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압살롬 다음으로 자격이 있던 아들이었고 게다가 그의 외모나 품행에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자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적이 출생이후로 한 번도 없다고 할 정도로 여러모로 준비가 된 아도니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아도니야가 왕이 되겠다고 감히 선수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장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첫째 형인 암몬은 누이 다말을 겁탈하고 나서 내치므로써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죽였고, 둘째인 길르압은 일찍 죽었기에 왕상1장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신학자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인 압살롬은 반란으로 싸우다가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군대장관 요압의 손에 죽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렇게 형들은 이미 다 죽었고 이제 4째 아들이었던 자신이 자동으로 다윗 왕의 장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아도니야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내게 준 기회로구나! 하면서 이스라엘의 3대왕으로서의 준비를 하게 되었던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우리가 아도니야 같은 조건이었더라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하게 그랬을 것입니다. 왕이 될 준비를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당연한 조치였는지 다윗을 평생 모셨던 다윗까지도 견제할 정도로 자기의 자리를 굳게 했던 군대장관 요압도 아도니야의 뜻에 의심 없이 합세를 했다면 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기회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 왕을 볼 때에,

 

1: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1: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1: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1: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왕상1:1-4의 말씀을 보더라도 이제는 예전처럼 기운도 힘도 없는 왕, 이제는 늙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런 늙은 아비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빨이 다 빠진 호랑이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 왕까지도 인정을 했던 그래서 다음의 왕이 될 완벽한 인물이었다는 판단 때문에 아도니야는 왕의 준비를 철저하게 했고, 자신의 때가 되었다고 여기면서,  계획된 자들과 준비된 곳에 모여서 아도니야를 향하여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다고 왕상1:25에서 말씀합니다. 

 

1:25 그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사령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그들이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였나이다

 

하지만, 왕이 되었던가요? 그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요 다윗까지도 살아 있었지만, 다음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문제에서도 결코 순탄치가 않았음을 오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악의 세력이 집요하게 기회를 타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를 하고 있던가요? ~ 보기에 그럴듯한 인물을 세워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세력이 아주 막강해서 하나님의 편이 꼭 질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인정을 받았던 아도니야가 왕이 다 된 것 같았지만, 막강한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연합하여 아도니야의 등극을 돕지만, 안 됩니다. 우리들은 아도니야와 그를 도운 요압과 아비아달처럼 늘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지 못하고 막강해 보이는 세상 쪽으로 향하게 되지 않습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내 기준이 맞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 아도니야를 통하여 정신이 확~ 들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만이 이루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원칙만이 살길이요 승리요 자랑이요 아름다움이요 넉넉함이요 회복입니다나의 생각이 아무리 맞다하여 그것이 은혜없는 내 생각이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목숨을 걸고 확신을 할지라도 그것이 내 생각이면 그것은 아도니야의 생각이 될 뿐입니다.

 

내 생각과 기준이 너무나 정확하여 모두가 다 인정을 해 줄지라도 그래서 모두가 나의 편이 되어도 그것이 내 생각과 기준이라면 그것은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도니야가 다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내 기준과 생각은 늘 좌절과 고통과 낙심과 두려움과 심한 절망과 함께 무너짐과 파괴로 자신의 뜻에 동의를 했던 모두에게, 그리고 상관이 없어 보이는 주변 이웃들까지도 처절한 고통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사기 사건을 봅니다. 삿9:1-6입니다.

 

9: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9: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9: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9: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스스로 또 왕이 되겠다고 한, 기드온의 첩의 아들 아비멜렉의 기막힌 사건이야기입니다. 왕이 되겠다고 하여 배다른 형제 70명을 가차 없이 쳐 죽인 사건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어떤 또 다른 참상을 맞게 되던가요? 삿9:20에서 요담이 예언합니다.

 

9: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9: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9: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9:24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이 요담의 예언이 때가 되어서 삿9:22-24에서 하나님이 다시 분명하게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삿9:22-24의 말씀그대로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삿9:46-5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9:46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9:47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9:48 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9:49 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업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

9:50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9:51 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9:52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9:53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9: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9:55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9:56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9:57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은혜 없이 내가 왕이 되겠다고 즉 내 기준, 내 판단이 옳다고 하므로 인한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국 암논과 압살롬도 그 종말이 참담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은혜 없이 나는 왕이 되리라’라는 뜻은 결국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미련한 자라는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자신이 왕인 사람들의 그 특징을 보면, 작은 죄, 실수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작은 죄, 실수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큰 damage를 주게 된다는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크게 터지고 나서야, 막심한 손해와 아픔 속에서 때늦은 후회를 하는 못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각 개인들은 남의 죄를 볼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의 죄만을 보아도 그 죄의 수가 머리털보다 더 많고, 얼마나 죄의 힘이 큰지 제대로 파악(把握)하려면 한이 없는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아무 것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죄가 어미 뱃속에서부터 죄 덩어리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은 제 2의 아도니야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복된 성도들은 자신이 지은 아주 작은 죄, 사소한 실수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이웃들을 힘들게 하는지, 본인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방심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기준대로 순종하기가 쉽지 않기에 얼마나 심한 자책까지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도움을 간절하게, 아니 그것보다도 더 간절하게, 참으로 심각하여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와 그 깨달음이 on time에 허락하십니다. 대충 싸워서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자신은 자신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힘들어 함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자신의 맥이 다 빠지고,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될지, 그래서 더러운 자신의 그 죄들을 어떻게 해결할꼬! 하고 완전하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만~해도 해도 안 되고, 안 되서 낙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극한 지경까지도 오지만, 그래서 심지어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할 때, 그 생각까지도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은혜만이 해답이라는 놀라운 이해가 들 때, 드디어 하나님의 세심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됩니다. 왜 그런 지경까지 와야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렇게 아름답고 넉넉하게 느껴지게 되던가? 그때 비로써 왜 그 복된 십자가의 길을 가리라! 그 확신과 결단이 서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 부인이 왜 중요한 지, 철저하게 확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못나고 어리석고 미련하기에 그래서 ‘진심으로 나는 은혜가 아니면 안 돼’ 또는 남들이 자기를 말도 안 되는 일로 힘들게 해도, 그들로 인한 그 괴로움이 그래 너희들, 두고 보자가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저들이 바로 나였구나~로 이해가 될 때에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할 때, 그때가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자기의 연약함으로 하루에 말씀 몇 장을 보고, 말씀을 듣고, 기도를 무시로 드리는 가운데 들리는 그 음성, 특히 아주 위급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여 겨우 버틸 때, 그때 기다리시던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힘을 내라! 내가 한없이 지키고 있고 돕고 있단다!’ 그때 그 순간의 그 느낌과 그 음성으로 답을 얻었을 때, 큰 기쁨과 위로로 감사 찬양이 터집니다. 천하를 거머쥔 느낌을 주십니다. 이거로구나! 할렐루야~하면서 더욱 충성하게 됩니다. 위기 때,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왜 고난이 복이 되는지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 영적인 체험이 자기의 신앙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물론 그런 경험은 단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지속함은, 아무 응답이 없을지라도 의심하지 않게 되고, 어려움 속에서도 아무 음성과 느낌이 없을지라도 말씀으로 위기를 해결케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충만한 은혜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늘 자기 약점과 허물과 죄악과 끝없이 싸워야 합니다. 방심하여 나태해지면서 죽지 않는 자기 옛 세력과 싸우지 않는 한, 도움보다는 하나님의 책망만 남습니다. 

 

죽지 않는 자기의 옛 자아와 싸우지 않으면 오셔서 도와주셔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옛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실망하고 믿음으로 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말에 불과할 뿐, 무의미하게 여겨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누가 나를 철저하게 실망을 주고 있던가요?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이웃이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오직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나를 철저하게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웃이 나의 복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경험이 결국 원수였던 이웃과 연합하게 되고 화평을 갖게 되고 원수가 은혜로 친구가 되면서 자유와 기쁨과 감사를 확보하게 할 것입니다. 은혜가 원수를 친구로 회복이 되면서 놀랍게도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요? 남에게 고통과 실망을 주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더 이상 남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면서 두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허물로 이웃에게 늘 실망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그 이웃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끝까지 보살피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아니 잠자는 시간에도 긴장하고 경계하고 근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연약한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신을 위해서라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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