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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4/18/2021 사무엘하 24:1-25 본문
말씀: 삼하 24:1-25
제목: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오늘 말씀을 보면, 함정 파서 생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시려는 무자비하고 야비한 하나님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삼하24장의 말씀을 3가지로 준비했습니다.
1. 1절에서 보면, 누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말씀하고는 전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전후 사정에 대한 언급도 없이 하나님이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던 자비하신 하나님이 아닌가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은 인간의 죄악 된, 성향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방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타락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고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물론 삼하24:1의 말씀을 보면,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괜히 하나님이 시비 걸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넘어뜨리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무식의 반응일 것입니다. 그런 식의 표현이 성경에 한 두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6:6입니다.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아니 창1:31에서는 심히 좋았더라, 하셨으면서도 이제는 한탄하신다고요?
이런 경우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짓는 죄를 볼 때, 본성적으로 타락한 그들을 볼 때, 얼마나 무지하고 무감각한 지, 그래서 버려지게 되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심판을 준비하라, 준비하라, 그렇게 120년간을 경고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고, 믿기는커녕 다들 방주를 만드는 노아 식구들을 비웃다가 홍수로 전멸을 당하여 다 죽습니다.
오직 노아의 8명만이 방주에 승선하는 것을 보면,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지 않을까요? 삼상9:2의 말씀을 봅니다.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사울을 아주 준수하고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 평가 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울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상15:11에 보세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제는 후회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볼 줄도 모르시는 하나님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 정말 변덕스럽고 사람도 제대로 보지 못하여 이렇게 실수하는 하나님이십니까?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지만, 아닙니다.
사울 왕에 대한 그런 평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너희들이 원하던 세상의 왕은 너희 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인간 기준에서의 왕은 결국 너희들의 생각하고는 달리 후회만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인 삼하24:1의 경우에도, 말씀 그대로 이해를 하실 것이 아니라, 다윗과 이스라엘의 죄악이 곧 드러낼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면, 군대장관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 census를 명하는 다윗의 마음 상태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싸울 수 있는 용사의 수가 130만이라는 것으로 알게 합니다. 그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은혜 충만했지만, 자기의 힘과 세력이 점점 더 충만해 지다가보니까 타락하더라! 바로 그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나라가 다윗이 통치하면서 천하를 평정하고 게다가 싸울 수 있는 막강한 군사 백만 대군을 확보하다가 보니까, 역시나 타락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미리 시사하는 차원에서의 표현이 1절입니다. 이스라엘을 미워하여 진노하사 치시는 성질이 괴팍한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의 길로 가기에 진노하셨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타락의 기미를 이미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는지를 우리는 그 다음의 말씀인 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인구조사가 죄악인가? 인구조사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인구조사는 다윗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대상21:1을 보시면 삼하24:1과 같은 상황인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러니까 삼하24:1의 진노하기 위한 인구조사를 허락하신 이유는 다윗이 교만해 지자, 사단의 사주(instigation)로 인구조사를 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교만이 사단의 빌미를 준 것입니다. 막강한 백만 대군을 갖게 되자, 다윗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윗의 교만함으로 사단의 사주를 받아 결국 인구조사로 백성 70,000명이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빌미를 주게 되면 그 기회를 놓칠 사단이 아닙니다. 곧 바로 사단의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다윗처럼 은혜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의 훼방거리를 크게 얻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인구 조사는 교만의 발상이었기에, 사단의 훼방거리가 되게 했기에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명하셨을 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민26:52-56에 보시면, 12지파 별로 인구 조사를 하여서 인구수에 비하여 땅을 나누어 주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는 출30:11-16과 38:25-26에 보시면, 성전세를 받으려고 인구의 수를 조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삼하24장의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세와 힘을 자랑하려는 차원에서 인구조사였습니다. 고대 당시 나라의 힘과 자랑은 얼마나 인구가 많으며 특히 싸울 용사, 군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평가 기준이었기에 그래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용사가 많고 적음에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인구 조사가 의미가 없었기에 그래서 요압장군까지도 삼하24:3에서
24:3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써는 죄악이기에 만류(挽留)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촉하여 이스라엘의 군사의 수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이 명했던 인구조사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깨닫고 삼하24:10에서 회개를 합니다.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 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여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회개하는 다윗을 보면서 우린 또 어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이 교만함에 대한 예방적인 진노로, 7만 명이 죽지만, 만약에 내버려두셨더라면 전염병으로 70만 명 그 이상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내버려두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그래서 의사들이 먼저 고름을 짜 내버리듯이, 그 차원으로 오늘 삼하24:1의 말씀을 이해를 하셔도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표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빛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동의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죽은 자들만이 이런 표현을 가지고 따지고 시비를 걸지,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 누가, 아무리 그 어떤 흉악한 증거로 하나님을 조롱하더라도, 부끄러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에 대하여 폄하하더라도 그들의 말과 증거를 믿을 성도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친한 친구가 어떤 인물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누가 와서 그 친구에 대하여 없는 말을 했을 때, 믿을까요? 그 친구의 진실과 진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누군가가 친구에 대하여 모함을 할 때, 흔들리지 않고 의심하지 않듯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령 하나님의 지도하심과 가르침으로 점점 깊이 알아가면서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면, 성경은 힘과 능력만을 추구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까지도 오직 성직자들만이 성경을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무조건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다수의 아빠들이 딸 바보이듯이, 성도들도 하나님 바보로 살아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하24:1의 말씀도 표현대로 이해를 하지 않고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는 다윗의 나라가 백만 대군이라는 힘의 나라가 목적이 아니라,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속죄와 화목의 제사를 드리는 소박한 제사장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시려는 교훈의 말씀은 물론 간단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교만해 지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지 인간의 힘과 방법과 원리를 결코 도입하지 말라! 라고 듣기 쉽게 말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어떻습니까? 늘 관대하십니다. 용서를 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울 왕에게는 어떤 조치를 내리셨던가요?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왕의 자리까지도 빼앗기고 사울왕의 지은 죄로 인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3아들과 함께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의 지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냉혹하고 냉정한 심판을 내리셨던 것을 삼상13:12-14과 삼상15:17-23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심지어 후손에게까지 사울 왕이 기브온 족속에게 지은 죄로 인하여 우리는 삼하21장에서 사울왕의 첩의 아들 7명이 얼마나 비참하게 나무에 수개월 간을 매달려서 말라 죽었는지 이미 살펴 본 바가 있지 않습니까? 일말(一抹)에 용서와 자비를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에게는 사울 왕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간음과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그때마다 용서와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셨을까요? 사울 왕에 대해서만큼은 가차 없는 심판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비참한 지경으로까지 인도하셨음에도 다윗에게는 아닙니다. 인간차별인가요? 공평하시고 동일한 사랑을 베푸신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던 말인가? 의심을 갖지 않을 독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노아의 홍수 사건처럼, 사울 왕도 저지른 죄악으로 가차 없이 처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기회가 없다는 것이 율법이 주는 교훈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에 의하여 심판을 피할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죄 때문에 누구든지 복된 내일을 스스로 만들어낼 실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즉 은혜가 아니면 다 저주, 버림, 냉혹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사울왕의 삶을 통하여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롬3:9-20입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다윗에게는 무엇이 적용이 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 즉 은혜가 허락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로 인하여 계속적인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생을 마감하여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하24장에서도 다시 인구조사라는 교만의 큰 죄를 짓고 말았지만 결국 번제 즉 은혜로 다시 살아납니다. 회복하여 주심을 삼하24:18-25에서 알 수 있습니다.
24:18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24:19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24: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4:21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24:22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4: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번제가 무슨 제사입니까? 다윗이 지은 그 교만의 죄의 값을 소가 대신 죽어 다윗이 지은 죄를 씻어주는 것이 번제입니다.
레1:3-4입니다.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결국 번제는 누구든지 너의 죄 값을 대신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소, 양, 염소, 비둘기가 자신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대신하여 죽게 했다는 내용이 구약 내내 특히 레위기에서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 죽은 가축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하셨던가요? 요1:29입니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결국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치러 주시려고 구약의 양이나 소나 염소처럼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까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시므로써 그래서 우리들이 그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 아닙니까? 롬3:21-26입니다.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늘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 자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엡3:12에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실력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사울 왕처럼 죄를 지을 때마다 심판을 받아야 하고 결국에는 처참하게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지은 모든 죄를 대신 받아 죽어 부활하여 주셨기에 우리는 날마다 아니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로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엡3:13에서 바울이 환난가운데 있었지만 무엇이라고 말씀을 합니까?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자신의 환난이 오히려 너희들의 영광이라고까지 오히려 위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불평하고 미워할 텐데, 차원이 다릅니다. 너희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시면, 누구든지 결국 다윗처럼 더없이 복된 인물로 이 세상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죽어서도 죽지 않고 다시 부활하여 영원토록 호강을 받는 보장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은 내가 거룩함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입니다. 그래서 삼하24장의 말씀도 실은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너희들은 다 하나님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나라가 백만 대군을 가진 그런 힘의 나라가 목적이 아니고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속죄와 화목의 제사를 드리는 소박한 제사장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삼하23장의 다윗의 마지막 말에서 알 수 있었듯이, 그렇게 은혜가 충만하던 다윗이 인구조사로 어떤 심판을 삼하24장에서 받게 되는 것을 보세요! 무슨 뜻일까요? 삼하23장만 보면, 다윗이 끝까지 은혜 충만하여 믿음으로 나라를 통치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무너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게 은혜가 충만했던 다윗이 통치하던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삼하24장 인구조사에서 보면 칼을 빼든 용사가 몇 명이라고요? 130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 용맹한 군사가 130만 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세력입니다. 백만 대군입니다. 그런데 겸손과 순종이 아니라 결국 교만해 지면서 이렇게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저주가 임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린 시편119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최악에서도 말씀으로 해결 받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던 시119편 기자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의 영혼이 잃은 양같이 유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9:176입니다.
119:176 잃은 양 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우린 다윗이나 시편119편 기자만 보더라도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합니다.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이 그렇게 말씀 중심으로 자기를 꽁꽁 묶었을지라도 또 흔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시68:19, 105:14-16입니다.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05:14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어
105: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105: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이미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허물과 약점을 통하여 더욱 믿음이 큰 자가 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다윗이, 다윗이 되었을까요? 다윗의 능력으로 다윗이, 다윗이 되었나요? 아니었습니다. 다윗 자기의 약점과 허물인 교만 때문에 다윗이, 성군 다윗이 된 것입니다. 자기의 약점과 허물이 없으면 좋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요 아주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난 자들은 주시는 은혜를 외면하므로 버려집니다. 그러나 허물 많은 자들에게 은혜는 어떤 능력의 기회가 되게 할까요? 은혜 때문에 끝까지 자기의 약점과 싸우다가보니까, 약점이 장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허물과 약점은 감추거나 부끄러운 조건이 아님을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허물과 약점 때문에 하나님하고 가까워지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허물과 약점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 의지하게 하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연약하던 119편 시편기자가 무너졌나요? 인구조사로 다윗이 버려졌나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여 빛나고 있습니다. 우린 우리의 허물과 약점이 어떤 복을 주는 기회가 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약점과 허물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자기의 문제점이 자기를 더욱 주님을 닮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우리가 간증하자는 말씀입니다. 그간 모두가 갖고 있는 자기의 약점과 허물이 주눅이 드는 조건이었지만, 부끄러운 아픔이었지만, 자기의 약점과 허물 때문에 늘 피하거나 숨었지만 이젠, 그러지 말고 무섭게 주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작은 순종을 죽기 살기로 시작해서 약점이 복이 되었다는 간증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약점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 바보가 되어 그 깊고 넓고 크고 높은 뜻을 가진 하나님에게로 쉬지 말고 노를 저어 갑시다!
쉽게 살려고도 하지 말고, 편하려고도 하지 말고, 요령도 피우려고 눈치도 보지 말고, 오직 모든 힘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 바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약점과 허물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허물과 약점이 은혜로 말미암아 끝까지 노를 저어가게 하는 힘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돕는 이웃이, 협조하고 섬기는 이웃이 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허물과 약점이 복이 되게 했다고 간증하는 자신을 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삼하24장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이 되어 더 깊은 신앙으로 자라갈 수 있다는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 못난 점, 허물과 악한 것들의 끝없는데, 말씀의 빛과 은혜로 파악이 되어 가면서, 낙심과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어떤 복을 받게 되었는지 그 반전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왜 예수님이 오셔야 되었는지, 왜 말씀을 즐거워해야 되는지, 왜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간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확실한 간증을 위하여 끝까지 폭풍 앞에서도 노를 저어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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