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1042018 신명기 30:11-20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1042018 신명기 30:11-20

PastorYK 2018. 11. 5. 15:58

제목: 하나님의 말씀이 심히 가까워 (그러나 그 말씀은 오직 진심만이 통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수없는 말을 하고 있고 한없는 말을 듣다가 죽어갑니다!

그래서 말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너도 나도 쉬지 않고 곳곳에서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말, 말, 말을 듣고 하고 있으나~ 그러나 그 모든 말이 어떤 가치를 품고 있던가요? 아니 우리들이 하는 그 말이 정말 말다운 말이었던가요? 아픈 이웃과의 회복, 외로운 이웃과의 함께하는 말로써, 그 말이 그들을 그 아픔에서 고통에서 회복이 되었고 이김이 되게 하셨던가요? 아니면 상처의 말, 또는 인사치레용, 그 정도에 불과한 아무 소용없는 그런 정도의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니었던가요?

그렇습니다. 말은 말인데 그 말이 그냥 꼬마 아이들이 하는 자기중심의 말이 아니라, 단지 웃기려는 그런 말, 장사차원의 그런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로써의 생명이 있고 책임을 다하여 가치를 생산하는 말이었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린 여전히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인가요? 자기의 말에 대하여 진지한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고, 자기의 말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생각한 적이 있나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한 말에 그 책임을 다하셨습니까? 아니면 순 인사치례용의 말로, 또는 당장 자기의 위기만을 면하려고 위기모면형의 말로, 그렇게 싸구려 인생을 살아온 그간의 자신의 말은 아니었는지요?

인간의 미련과 욕심으로 인한, 공기오염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오염보다 더 무서운 오염은 말의 오염이 아닐까요? 그동안의 자기의 말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그래서 자기가 그간의 한 대부분의 말이 하도 무가치했기에 너무나 부끄러워서 이젠, 듣는 자로 작정한 자신이 되었다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할 노릇이지만, 아무 상관없는 말, 쓸데없는 말로 말의 오염자로 살아오면서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그는 무차별 총격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들처럼, 마찬가지로 단지 당장 보이지 않을 뿐, 말의 총, 말의 칼이란 무기로 자신을 비롯하여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협박하면서 깊은 상처를 준 자신의 말이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국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말에 대하여 어떤 평가하고 있던가요?

잠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16:20-32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입니다.

말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인지를 알게 합니다. 특히 말은 마음과 생각하고 깊은 연관이 되어 있기에 말은 엄청난 가치를 갖거나 또는 죽이고 상처를 주는 불법무기가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씀으로 확인해 봅니다.

잠18:20-21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인간의 말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의 혀를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수가 그 귀한 말을 여전히 독(毒)이 되거나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그간의 자신의 말에 대하여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곳만 더 봅니다.

잠17:4,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잠17:7 “분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잠17:9-14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찌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입니다. 말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으로 다 연관이 되어 있기에 더욱 훈련이 필요한데, 상처 되는 말에 익숙한 우리들로서 어떻게 하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을까요? 단지 내 뱉는 말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때문에 하려는 말 안에는 언제나 각자의 진심(眞心)이 담겨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따뜻한 마음까지 담고 있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따뜻한 마음을 포함한 그 진심은 하나님하고도 잘 통한다는 점입니다. 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진심, 참 된, 그 마음이 우선이 되면, 된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에 중심 요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말씀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죽이던지 살리던지 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가 성도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생명과 복과 죽음과 저주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가 믿고 따르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심으로 믿고 따르면 복이지만 마음의 욕심과 미련함으로 믿지 못하면 재앙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적인 행함 이전에, 성도된 각자가 어떤 마음이냐를 가지고 그 성도들을 평가하시지, 행함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그 이유는 다 행함으로 복과 저주로 나뉘고 있기에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혼란이 올 수 있는데, 무슨 뜻인가 하면, 그 행함이 너의 진실된 진심, 즉 거룩함이 목적이면 아름답지만, 만약에 육신의 자기를 사랑하는 차원에서의 행함이거나 더러운 세상의 마음인 단지 형통을 위한 행함이라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은 말인데 다 말이 아니듯이, 행함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없는 종교행위를 말과 행동으로 너희들이 늘 하고 있지만, 그 말과 행동이 거룩함을 위한 진심이냐? 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을 보면 말씀의 표현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저주가 아닌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을 주시려는 뜻인데, 그 복된 길과 방법이 난해하거나 신비하거나 또는 무식하고 알지 못해서 찾지 못했다거나 너무 어려워서 구할 수 없는 길이 아니라, 또는 이리저리 높고 깊은 곳에서 찾아다녀야지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11-13절의 말씀처럼 그 복된 길에 대한 말씀이 바로 너하고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물론 늘 해 주시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말씀이라고요? 신10:12을 보세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수없이 들었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쉬운 말씀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값이 없는 말씀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도 듣다가 보니까,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아주 sick and tired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진심의 말씀이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함과 교만으로 진심이 없는 말씀으로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나아가도 복이 되는 능력의 말씀이 교만한 나(自我)때문에 완전 가치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참 답답합니다. 정답의 말씀이 나의 무지와 교만으로 없어도 되는 말씀처럼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진심하고는 거리가 먼 말씀이 되어 버렸으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자! 만약에 우리가 무엇을 참 좋아하면 어떤가요?


그 좋아함에 대한 표시를 꼭 실력 있는 노래로 불러서 고백해야 될까요? 아니면 기막힌 시로 마음을 전해야지만 됩니까? 또는 선물, cash로 전하면 그 마음이 전달이 될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해 주려고 애를 쓰는 마음, 또 진심과 열심과 정성을 가지고 시간을 내서 마음을 다하면 그것으로 되지 않던가요? 이젠 세상이 물질이 주인이 되어서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교육의 목적은 인간성을 갖는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성실함과 따뜻한 마음과 인내를 배우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성적은 그 다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신10:12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면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늘 듣던 생명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진지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심과 진실이 중심입니다.

그런데 그 진심과 진실함을 무엇으로 대신(代身)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큰돈으로 헌금하라고 하시던가요? 세상에서 일등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던가요?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 사랑은 진실과 진심이 우선입니다. 큰 재물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꼭 진심, 진실한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진심과 진실(眞實)된 신앙을 갖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요? 사랑하는 그 마음이 서로에게 전달되려면 서로의 긴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필요한데, 다 돈과 실력으로만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실력이 진심과 진실의 대체물로 뒤바뀌고 만 것입니다. 실제가 대체물이 되고 대체물이 실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다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물질이 우선으로 되어 있다가 보니까, 진심의 가치를 알면서도 진심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안 됩니다. 진심보다 돈이 더 빨리 전달이 됩니다. 심지어 다들 경험을 했겠지만, 당시에는 진실했고 진심이었지만 나중에 보면, 아니었음을 깨달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요?


그 정도로 인간의 진심은 확고부동하지 못합니다. 조건과 상황과 여건에 따라 진심도 수시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황금이 힘인 세상에서의 진심과 진실은 사하라 사막, 정 가운데, 수억의 사람들이 서 있는데, 오직 단 200cc 작은 물병의 마실 물만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성공에 미친 것 때문에 진실과 진심은 고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재물에 미쳐버린 우리들에게 그 진심과 진실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수많은 종교 행함과 종교적인 말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진심과 진실이 이젠 말라비틀어진, 우리들에게 진심과 진실함으로 나오라고 하시는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여러분들에게 드리던 부탁이었습니다. 그 부탁 속에 오늘의 그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마음을 가지고 형편없는 삶,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직 주신 그 은혜, 거저 받은 믿음을 가지고 늘 기다리고 계시는 그분에게 끝까지 기어서라도 들어가 보라는 것입니다.


저의 부탁과 통하는 말씀이 있는데, 욘2:4을 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차원입니다. 나를 버리실지라도 나는 그래도 끝까지 그분에게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나는 한시도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를 하나님께서 포기하실지라도 나는 이젠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어서라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교만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분에게로 매일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이요 진실한 마음이 아닐까요? 타락한 자신이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능력의 말을 가지고도 사람의 몸과 영혼을 죽이는 살인자에 불과한 그런 나를 늘 기다리고 계시기에 그분에게 그래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무지, 교만, 그 자체인 그런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그런 나를 사랑해 주시기에 그래서 그분에게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에 매일 골방으로 들어가는 그것이야 말로 은혜를 입은 자의 진심과 진실함의 고백이 아닐까요? 한 예로, 무지 가난한 학생이 피나는 고생으로 자식의 학비를 보내주시는 그 부모님을 위하여 죽기 살기로 날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진심이요 진실이 아닐까요? 학생이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면서 보내주시는 그 학비를 자기 즐거움으로 쓰는 것이 진심이요 진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저 멀리, 저 깊고 깊은 곳이 아니라 바로 나의 입에 있습니다. 진실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진실함은 내가 누구이며 그런 내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진정으로 인정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진실함은 주신 은혜와 믿음으로만 강하게 강력하게 자신이 붙들고 있지 않으면 한 순간에 ‘확!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따라가려고 그래서 그분에게 나아가서 세상 욕심과 교만과 게으름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게 해 달라고 죽기 살기로 간구를 날마다 드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바람(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들어감이 가장 어려울 수도 있지만 가장 쉬울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가까이 있는 그 길이 바로 그분에게 나아가는 것인데,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는 그 길이 나의 교만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가장 먼 길, 가장 먼 선택, 가장 어려운 길이 된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노파심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전혀 바치지 못하면서, 단지 골방의 기도와 말씀 읽기로 때우려는 위선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자세는 안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를 확인하여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서 이기기 위한 진실과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다 멋대로 해 놓고서는, 말같지 않은 말로, 행동(行動)같지 않은 행동으로 살아가다가 단지 어떤 종교적인 형태 몇 가지로 즉 성경공부 참여, 예배참여, 봉사, 전도, 기도 등 그런 것으로 나는 성도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장한 위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생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신앙의 익숙함을 당연히 갖게 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보낸 시간만큼 신앙의 깊이도 깊어져야 합니다. 즉 세상에서의 거짓된 것을 경험한 것만큼 세상의 유혹과 위협을 이기는 믿음의 실력이 쌓여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과 기다리심으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과 거룩함을 위한 끊임없는 성장에 대하여 마음의 갈급함이 늘 유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을 생각하고 연습하고 훈련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맞게 되면 불평과 원망으로 믿음을 내치지 말고, 먼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을 가지고, 왜 감사를 해야 하는지를 깊이 기도하면서 그 응답을 받아낼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데 있습니다. 더 이상 속지 마시고, 가장 큰 신앙의 방해 세력인 재물이 나를 공격하고 방해할 때에 철저하게 이겨내도록 평시에 재물의 가치와 즐거움에서 놀아나던 자신이 재물의 가치와 즐거움에서 벗어나는 그 훈련을 각자가 쉬지 말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멀지도 힘들지도 않게 구할 수 있는 늘 나와 함께하시는 그 주의 말씀은 은혜를 입은 성도된 나를 어떤 변화로 인도하는지를 아십니까?

시119:104입니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거짓 행위를 미워하니이다”

말씀은 무지한 나를 진실한 자가 되게 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그 무지와 거짓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결국 말씀이 복을 받게 할까요? 저주를 받게 할까요? 그런데 왜 다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1. 말씀이 없어도 잘 살고 있다는 잘못된 오판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이 없어도 살기는 삽니다. 잘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 없이 사는 식입니다. 사람은 일, 돈, 또는 술 담배 마약 음악 여행 도박 등으로 위안을 얻지 못합니다. 사람의 갈증 해소와 평안은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만이 가능합니다. 말씀은 순종에서 시작되어야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서부터 말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시119편을 보세요! 119편은 말씀에 대한 시입니다. 119편은 성도의 삶이 어떤지 잘 말씀하십니다. 6, 9, 11, 13, 14-16, 19-24, 44, 48, 50, 51, 54-56, 57-64, 72, 81-83, 92-96, 97-112, 123, 127, 131, 164-165, 시간이 나시면 119편을 자세히 보세요! 말씀의 그 가치와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과 바꾸어도 전혀 손해가 되지 않는 절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후회하는 삶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후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미련한 삶은 말씀을 우선으로 두지 아니하고 말씀을 가장 사랑하지 못하는 그 사람이 바로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유를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마13:44-46 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말씀을 우선으로 하는 자들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말씀은 오히려 지혜와 인격을 겸비케 하고 영원히 기억되게 하고 존귀의 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지 않는다면 하루살이가 될 것입니다. 버려질 것입니다. 말씀만을 붙들고 삽시다! 그래서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가 되게 합시다!


2. 영적 게으름과 무지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영적 게으름과 무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영적 게으름은 무지에서 오고 무지는 영적 게으름을 생산케 합니다. 때문에 성도에게 영적 게으름과 무지는 절대적으로 싸워야 될 악한 상대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넘어질 것입니다. 짐승의 삶을 방불케 할 것입니다. 특히 약속한 말씀과 기도의 시간이 되면,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말씀과 기도를 쉬자! 라고 꼬득이는데, 속으면 안 됩니다. 그 속삭임은 무지와 영적 게으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은 싸워서 기분 나빠 말씀과 기도를 못하겠다고 도망하는 것도 결국은 비열하고 부끄러운 자가 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주신 것은, 성공과 승리가 우선이 아니라 얼마나 말씀 중심의 삶이었는가! 이를 위하여 주신 것이 오늘입니다. 물론 말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원수인 저 인간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입니다.

영적 게으름과 무지의 삶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 게으름과 무지에 묶여 있다면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과 기도의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게으르고 무지하면 할수록 남의 아주 작은 실수와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수고에 대하여 박수와 격려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3. 순종하려면 세월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지 못하면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 동안에 세상의 일에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순종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하루 하루가 반드시 말씀으로 관리하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이를 위한 준비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세심한 계획을 가지고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감하는 결단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는 것과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날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날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술이 나를 먹을 것이요 세상의 즐거움이 나를 망상에 빠지게 할 것이요,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나를 배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를 얼마나 참고, 감사하고, 충성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겼는가, 여기에 따라서 그날의 보람과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4. 감정적인 신앙생활은 삼가야 해야 할 것입니다.

감정적인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과 이성과 생각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말씀으로 항복되지 않으면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 힘과 마음과 이성까지 다 항복하고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나의 이성과 의지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한 찬송을 부르고 뜨거운 기도와 봉사를 할지라도 그것은 곧 변질될 것입니다.

감정적인 신앙은 자신도 상처를 받지만 가족과 교회와 나아가서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도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감정을 유발하여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속으면 안 될 것입니다. 감정의 신앙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신앙은 전 인격과 힘과 능력까지도 동원하여 전심으로 충성하고 섬길 때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신앙은 적은 수고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길고긴 수고와 과정과 연단 속에서 건강한 신앙인이 나무가 자라듯이 아주 서서히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루라도 영적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능하면 먼저 시작하고 끝까지 감당하는 신앙인만이 신앙의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준비가 다 갖추어진 그런 교회에 출석한다고 하여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요 그런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자신이 어떤 하루의 삶을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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