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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10282018 신명기 30:1-10 본문
제목: 하나님께로 돌아와라
오늘 말씀에서도 지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 혹시 찾아낸 분이 계십니까? 찾으신 분이 계신다면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이렇게 오늘의 말씀을 연관 지어 봅니다. 지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의 말씀을 하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쏟겠다는 말씀을 하신 후에, 오늘 말씀에서는 생각이 나거든 세상에서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결국 무엇을 위한 말씀인지, 어떤 흐름의 말씀인지를 이해가 되시지요? 결국은 너희들, 회개하여 복을 받아라! 가 목적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와 포로 생활이,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써, 그 결론은 포기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회개 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런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은 포기가 아니라 단지 슬픈 차원에서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 ‘생각이 나거든 돌아오라’는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세상과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에게로,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누가 돌아올 수 있는가? 누가 돌아올 수 있을까요?
은혜를 입었어도 말씀을 모르면 자기의 삶이 죄로 인한 방황임을 알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성도일지라도 세상의 성공에 눈이 멀면 역시나 하나님에게로 못 돌아오게 됩니다.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모르면 여전히 방황하게 되고, 은혜를 모르면 방황하는 자신의 삶을 아무 문제없는 삶이라고 착각하면서 속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된 우린, 들을 수 있는 귀가 거저 생겨서 말씀을 듣고 돌이키게 되기에,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어보시고 나의 중심에서 말씀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요 복인지를 깨닫고, 더 이상 머뭇거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롯의 자손들처럼 심판 앞에서 지체하지 마시고, 의심하지 마시고, 농담으로 여기지 마시고, 말씀이 생각이 나면, 꼭 돌이키셔서, 하루 종일 감사드리는 보람된 내일을 준비하시는 오늘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을 봅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절망된 상태에서의 포로가 아닌, 포로된 것이 자신들의 타락이 그 이유였다는 것을 들었던 말씀으로 알게 되어 돌아오면 완전한 회복과 약속의 복을 그대로 또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혀 몰라서 고통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을 따라가지 말아야 되는데, 말씀의 무지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세상의 세력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비유를 맞춘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노릇이 있습니까? 성도에게 바른 말씀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알고 모르고는 그 결과가 완전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교회에 앉아 있던가요? 오직 주님만이 구원이기에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이 삶의 중심이 되라고, 타협하지 말라고 다 버리라고 하는 교회인가요? 아니면 복음이 아닌, 세상의 형통을 목적으로 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와 있던가요? 전자입니다. 그 많은 교회 중에서 가장 인간들이 싫어하는 그 복음을 오직 전하기에, 들으면 성질이 날 수밖에 없는 그런 교회, 복음 때문에 핍박을 자초(自招)하는 그런 교회에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생각 해 보세요! 얼마나 큰 다행이요 감사한 노릇입니까? 모르면 방황하게 됩니다. 방황의 고통을 아세요?
그런데 이런 복음 중심의 교회로 자신이 와 있다는 이유가 똑똑해서 일까요? 자기는 똑똑해서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지혜롭고 선하고 착한 성도이었기에 그래서 그 대가로 여기에 와 있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엉망진창의 삶, 썩어버린 세상에서 성공을 못하여 성질을 부리는, 더러운 세상에서 성공을 못하여 안달이 난, 아니 세상의 재물과 성공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린 그런 나를, 지금 오직 하나님만을 따라야 된다는 그래서 진절 넌덜머리가 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교회로 나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살아가려는 나에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벌을 주시고 있으신데, 그 와중에서도 악하기만 하고 더럽기만 한, 선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기에 그래서 현실 속에서 성공을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 많은 교회 중에 바로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산돌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그 가치를 아세요? 참 의미심장한 기이한 일이 자기 자신에게 생긴 것입니다. 그런 기적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허용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도들만이 그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가 바른 말씀을 듣고 돌이키게 된다는 것인데, 그 돌이킴은 중생, 구원차원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돌이킴은 일차 구원 차원이 아니라 성화단계에서의 회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서문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의 말씀에서 우린 하나님의 저주가 버림과 포기의 차원이 아니라 돌이킴이요 돌이키게 하여, 나가도 들어가도 약속 그대로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듯이, 그 사실을 알고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방황하지 말고 생각이 나면 돌아와서 순종하여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요? 세상 사람에게 회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그 주신 말씀이 기억이 나면, 돌아오라고 하시는 오늘본문의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의 고난은 포기가 아니다! 때문에 멋대로 살면 이런 약속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구나! 를 확인케 하시면서, 더 이상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속히 돌아와서 순종하여 복을 받으라는 것이 오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러려면, 바른 교회에 속하여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자체가 성도로서 큰 복이고 기적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말씀을 전해 보세요. 어떻게 될까요? 재앙이지요! 그래서 목회자에게 어떤 자세를 가지라고 했어요? 갈6:5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건 공치사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갈6:5에 대한 공감이 없으면 재앙입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복된 귀를 가진 성도라도 바른 말씀을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최악의 불행입니다. 그냥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고 싶은 오늘 설교의 요지는 신30:1-10에서 말씀하시듯이 회개하라, 돌아오라는 그 말씀의 대상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받은 자녀들에게만 하는 제한 된 말씀인데,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타락으로, 불순종으로 벌을 받고 있을 때, 늘 해 주시던 말씀이 생각이 나거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나거든 돌아오라는 것입니까? 자신이 이런저런 고난으로 괴로울 때, 그 고난이 바로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신호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성도된 자들에게 고난은 회개를 하고 더 성숙해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은혜를 아는 성도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더 알게 되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희생하고 섬기고 양보하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지만, 은혜를 전혀 모르는 죽은 사람들은 그 고난이 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불만이요 원망이요 실패로 치부할 뿐, 감사의 기회, 항복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는 복된 기회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나의 고난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고난이 복이라는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면, 옛사람과 행위에서 벗어나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나아가야지, 롯의 가족처럼 세상의 것으로 지체하거나,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의의 것만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서 더욱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골3:1-10에서 확인해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다른 표현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주 안에 거하라”는 뜻입니다. 믿기 전 우리의 모든 것은 100% 다 주 밖에서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복이라는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면 이젠, 싹! 뒤집어라! 조금도 자기의 것을 인정하지 말라! 그것이 아무리 선해도 그것은 죄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의 길로, 위의 것으로 돌이키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요,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돌이킴의 고통과 끝까지 나아가야 되는 십자가의 길은 피가 마르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 그 이상입니다. 고통 없는 성화, 고통 없는 승리, 고통 없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은 다 거짓말입니다. 주가 없는, 은혜를 모르는 주 밖에서의 승리, 기쁨과 감사와 평안은 다 위장된 위선에 불과합니다. 위선에 불과하기에 허사(虛事)를 즐거워하게 되고, 궤휼(詭譎)을 구하게 되기에 더욱 비겁해 지고 비참해 질 뿐 입니다. 비열(卑劣)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된 고통은 두려움이 없는 삶, 감사의 삶, 희생의 삶으로, 더욱 진실하게 되고 영적인 예배자로 살아내게 할 것입니다. 구원은 나(自我)하나님을 믿어! 나(自我)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을 드러내야지만 합니다.
시88편을 봅니다. 처절 그 자체입니다.
왜 이런 시편을 주신 것일까요? 고통 없는 성화, 고통 없는 승리, 고통 없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은 다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주가 없는, 은혜를 모르는 주 밖에서의 승리, 기쁨과 감사와 평안은 다 위장된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라면 누구든지 지나야 되는 고난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피하지 말라는 것이요 이 고난이 실패가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고난을 지나고 나면, 그 후에 어떤 고백을 드리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23편입니다. 다윗은 평생에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 모르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명을 받은 선지자 사무엘은 다윗에게 찾아가서 다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10년이 넘도록 수년간 왕 사울의 시기를 받아서 목숨을 건 도주의 삶을 살게 되고, 나중에는 살기 위하여 미친 짓을 해야 했고, 왕이 된 후, 장자 암몬은 배다른 여동생 다말의 겁탈과 그리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가야 했고, 두 아들들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충신을 죽이는 요압 군대장군으로부터의 고통, 다윗은 평생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다가 늙은 후 결국 터져 나온 시가 바로 그 유명한 23편입니다. 고통이 낳은 다윗의 위대한 고백이요 찬송입니다. 자녀들이 미워서 주시는 고통이 아니라 이런 위대한 찬송과 고백을 낳게 하시려는 뜻에서의 고난입니다. 유치하게 고난 때문에 불평하지 맙시다! 고난 속에서 핑계와 변명으로 도망치지 말고,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성도의 책임을 다 합시다! 어떤 고백을 원하시나요?
이렇게 살지 말라고 지옥 불 속에서 부끄럽게 하소연하는 눅16장의 그런 자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 결과는 곧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머뭇거릴 여유가 실은 없어요! 어느새, 다윗도 늙어 이젠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이곳에 건재할 것이라는 착각은 더 이상 하지 마세요! 인생은 순간입니다.
벌써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18년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8년이 다 지나 곧 2019년을 맞이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삶을 돌아보시고, 문제가 많았다는 그 생각이 나시면, 아니 오늘 말씀만이라도 인정하시면 지금이라도 돌아오세요! 같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떠납시다!
2. 어떤 생각이 나거든 돌아오라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신임을 느끼거든, 더 이상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말씀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조금 전에도 말씀을 잠시 드렸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어떤 교회의 지체로 와 있어요? 오직 복음만이 살길이라고 전하는 교회, 타협하지 말라고 전하는 교회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정말 특별한 존재요 복을 받은 자요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나게 하지 않던가요? 나를 다른 복음으로 자기 영혼을 죽이는 타락한 교회가 아닌, 오직 형통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죽은 교회가 아닌, 은혜로 회복된 나를, 더 이상 더러운 나를, 죽이는 세상의 헛된 것들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교회, 뒤돌아보지도 말고, 양보하고 희생하라고, 한 알의 썩은 밀알처럼 썩어서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는 철저한 자기부인만을 전하는 교회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게 우연일까요? 신앙에서의 우연은 없는 법입니다. 자기 스스로 참된 교회를 찾아 올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 은총으로 와 있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의 힘으로 실력으로 참된 교회를 찾았다고 하지 마세요! 그 사실만으로도 자기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 더 이상 세상의 것으로 방황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과 가사와 능력과 형통만으로 자기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하지 마시고, 지금 자기가 어떤 말씀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의 증세에 대하여 성경은 자세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딤후4:3-4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요즘에 아주 정확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거의가 바른 말씀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자기만 편하고, 자기만 자랑하고, 자기만 잘되기만을 바라지, 이웃과 원수를 위하여 지라고, 남을 낫게 여기라고, 용서하라는 성경의 바른 말씀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에 솔깃해서 다들 자기 사욕을 채우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자기 사욕을 채우려고 물, 불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합니다. 어떤 천둥번개의 소리보다 큰 음성으로 부르실지라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중심이 되면 시19:1-6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자기를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어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도 아무리 작은 주님의 음성도 듣게 하십니다. 아니, 소리 없는 그 소리까지도 듣게 됩니다. 소리 없는 그 소리가 온 땅에서 서로가 다 통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소리가 없는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통하고 있기에 통하는 성도 간의 관계는 심히 각별하게 됩니다. 시119:63, 74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주의 말씀을 외면하는 이웃들을 보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야 되는가?
시119:5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139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158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입니다.
우린 어떤가요? 말씀을 사랑하는 자하고 동무입니까? 여러분의 친구는 누구입니까? 단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 주면 그것이 나의 친구요 동무라고 생각합니까? 참 유치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말씀을 외면한 이웃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어 합니까? 슬퍼합니까? 고통스러워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시편기자와 같은 공감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간에는 동무로서, 친구로서, 우리를 공격하는 세상 안에 살아가고 있기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되어, 함께 위로하게 되고 함께 기뻐하고 칭찬하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면서 죽음을 함께 준비하게 되고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딤후4:4을 다시 보세요!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은혜를 모르면 은혜가 중심이 아니 되면, 허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말씀을 모르면 헛된 세상의 것에 묶여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심(私心)때문에 다투지 않을 수 없는 이기적인 세상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기에 인격의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니 결국은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의 길은 돈과 세상 즐거움을 다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내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라” 성도가 하나님을 외면하면 망하기에 버림을 받기에 그래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돌아오면 어떤 약속이 임하는가? 호14:1-9입니다. 하나님께, 주신 말씀으로 돌아오면 놀라운 일들이 주어집니다. 이 약속을 믿으세요? 아멘입니다.
우리의 복은 오직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분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과 방법은 살던 집을 바벨론으로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우리의 기준과 방법은 관계를 더럽게 할 뿐입니다. 우리의 기준과 방법은 금을 똥으로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우리의 기준과 방법은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을 뿐입니다. 인정하세요? 인정하시면, 돌아와야지, 왜 여전히 자기의 기준과 방법을 놓지 못하고 한없이 부끄러운 바벨론에서의 승리를 꿈꾸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바벨론에서 성공하려는 것만큼 더럽고 치사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게 되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데, 바벨론의 노예인 주제에, 바벨론에서 성공하려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삶을 택해야 할까요? 그 치사한 길을 가기 원하세요? 똥통 속에서 돈을 벌어 더러운 부자가 되고 싶으세요? 더러운 부자, 개도 먹지 않는 돈 때문에 그 돈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세요?
개같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성도된 자신이 부끄럽지 않으세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인 바벨론 안에서 살고 있지만 목적은 형통과 성공이 아니고 오직 경건입니다. 세상의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최소한의 삶,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딤전6:7-21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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