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0/11/2020 사무엘상 30:1-30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0/11/2020 사무엘상 30:1-30

PastorYK 2020. 10. 12. 13:44

말씀: 삼상30:1-30                                          

제목: 또 절체절명의 다윗

 

다윗이 그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다윗 자기와 자신의 군대와 함께 머물던 집으로 돌아오자, 이럴 수가 있을까요?~ 아말렉 족속의 공격으로 재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까지 다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얼마나 심각했는지, 울 기력조차 없었고, 심지어 생사고락을 늘 같이 하던 백성들조차도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가족을 책임지던 다윗이었기에 그 책임을 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상상도 못할 절체절명의 사건이 또 생겼을까요?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런 참담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다윗의 어떤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블레셋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끝까지 바라보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게 하십니다. 숨 쉴 사이도 주지 않으시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절체절명에서 다윗은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응답하여 주시기를 가서 아말렉 족속을 쫓으면 잃었던 모든 것을 다 찾게 될 것이라고 하여, 말씀하신 대로 쫓아가서 쳐부수고 전리품까지 가지고 돌아옵니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당시에 모두가 완전 낙심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는가 하면서 승리자가 되어 얻은 전리품을 나누어 보내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은 얼마나 은혜가 충만했을까요?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승리를 함으로 사기충천한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승리로 서로 아쉬울 것이 없어야 되는데, 동료 간에 전리품으로 문제가 됩니다. 끝까지 따라와서 싸우지 못한 동료들에게는 얻은 전리품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불평을 합니다. 그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 승리로 인한 모든 전리품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이런저런 차별두지 말고, 똑같이 나누라고 선을 그어버립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너희들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임을 밝히면서 동일하게 배분하게 하여, 그때부터 다윗의 명이 이스라엘의 규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그 위기 속에서 다윗은 더욱 강해지고 있고 점점 모든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아말렉의 침공으로 다 잃었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완전하게 회수하고 자신들의 모든 가족들이 아기스 왕으로부터 얻은 시글락으로 모두가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사울 왕이 그 전쟁에서 3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삼하1:1-4입니다.

 

(삼하 1: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삼하 1:2)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삼하 1:3)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삼하 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그런데 보세요! 

 

오늘 말씀도 그냥 간단한 사건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나아집니까? 아니면, 갈수록 견딜 수 없게 하십니까? 후자입니다. 위기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다윗에게 울 기력도 없는 지경이 되게 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을 지경으로까지 가게 합니다. 왜 숨 쉴 틈도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에 시글락에서 다윗과 그의 모든 군사들과 가족들이 아무 문제가 없이 편했고 안전했고 형통하였더라면

 

누가 이스라엘로 돌아갈까요? 아무도 다시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않을 것입니다. 다윗과 다윗을 따르던 자들이 누구던가요? 삼상22:2입니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러니 누가 돌아갈까요? 당연히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군사 400명들이 얼마나 힘든 1년 4개월 동안의 망명 생활을 했습니까? 그동안에 아기스 왕에게 다윗의 그 행동들이 들키지 않으려고 모두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까? 모두가 더 이상 이런 망명 생활을 머뭇거릴 이유없이 당장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도 전사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고,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에게 묻자! 헤브론으로 돌아가라고 삼하2:1에서 확인이 됩니다. 

 

(삼하 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더 이상 블레셋지역에서 살면서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과 모든 사람들이 헤브론으로 기가 막힌 때, 돌아오게 됩니다. 망명 생활하는 내내 그렇게 험한 과정이 있었기에, 후회 없이 다 돌아오게 되었고, 그리고 그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왕으로 등극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영원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정은, 강력한 폭풍 속에서의 삶과 같았기에, 보통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역경이었습니다. 정말 숨 쉴 시간도 없었습니다. 다들 좀 쉬고 싶은데, 다들 할 일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신을 완전하게 빼놓을 정도로 힘들게 하셨습니다. 제대로 숨 쉴 여유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에 결국 승리자로 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세요~그 혹독한 훈련을 십수년간을 받고 왕이 된 다윗이, 온 천하를 다스리게 해 주십니다. 늘 승리를 주십니다

 

두 곳만 봅니다. 삼하7:1, 8:6입니다. “

 

(삼하 7: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삼하 8:6) 다윗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그리고 어느 날, 잠시 여유, 방심하는 순간에, 어떤 악행을 범하게 되던가요? 무엇보다도 삼하11:1-5입니다.

 

(삼하 11:1) 그 해가 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삼하 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삼하 11: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1: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우리아와 밧세바 사건의 주범이 됩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도망 다닐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다가, 왕이 되면서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서,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지를 않나, 그녀가 임신하게 되자, 그녀의 남편 충신 우리아를 결국 고의적으로 죽여,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던 다윗이었습니다. 

 

편하고 높아지고 안정적인 삶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현실이 살얼음판이라는 사실을 다윗처럼 ‘완전하게 싹~ 잊게’ 되면서 다윗은 간음과 살인까지도 머뭇거림도 없이 저지르더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에게도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끌고 가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우리의 실체를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그대로 노출 시켜, 타락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하시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려고 하시지만, 그 말씀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아무도 자기의 뜻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지난 주일에도 전했고 그 전에도 수없이 강력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떨어지면 바로 죽는 위험한 절벽이요 살얼음판에 선, 자신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사시대처럼 자기 뜻대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자기자리인데, 당장 아무렇지 않다고 하여, 늘 괜찮다고 여깁니다. 아니 자기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입니까?~정신 나간 그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그러나 다윗을 보세요

 

아니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세요~모두가 풍전등화입니다.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안전하다고 하고, 아무 일이 없다고 하니, 웃기지 않습니까? 혼자서 comedy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인생은 연극이요 영화 같습니다. 연극과 영화에서는 사람을 죽여도 되고 drunk drive로 경찰에게 걸려도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안 됩니다. 그런 실수는 하면 결코 안 됩니다. 인생은 연극도 영화도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한 번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순식간에 망가져 버립니다. 

 

모든 인간들은 죽음 앞에 선, 자로서 항상 정신 차려야 합니다. 너무나도 하루하루가 위험하여 한 눈 팔 사이도 없습니다. 달콤한 그 세상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우린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그 좁은 길을 항상 따라가야지만 됩니다. 그런데 전혀 아닌, 가서는 안 되는 세상의 길을 따라가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분의 가슴이 터지지 않습니까? 찢어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그런 아픔을 느끼는데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시편기자도 저하고 동일한 그 심각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 놀라운 느낌을 아십니까? 

 

3000년 전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그 느낌이 지금 자기의 느낌과 완전 같았을 때, 오는 그 감격과 감동을 아십니까? 마치 맥아더 장군으로 인한 서울 회복의 감동이요 8.15의 광복의 기쁨과 같습니다. 시119:53, 136입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왜 시편기자가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향하여 맹렬한 노에 사로잡혀 있고,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른다고 하였을까요? 

 

놀라운 뜻이 감추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을 위하여 주신 모든 피조물의 질서가 망가져서 결국 재앙을 피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다 왔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율법을 지켜야지만 모든 것이 안전할 수 있는데, 타락하여 율법을 전혀 지키려고 하지 않고 갈수록 더욱 멋대로 하니, 당연히 어떻게 됩니까?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후변화로 어떤 기후가 우리 모두들을 견딜 수 없게 합니까? 생명도 재산도 다 잃었습니다. 이젠 인간의 타락으로 코로나 19로 백만 명이상이 죽었습니다. 

 

왜요?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안전은 돈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안전이 유지가 됩니다. 시119:89-91입니다.

 

(시 119: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시 119: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기에, 모든 인류에게 안전과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존재하고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라고 합니다. 만물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순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린 많은 유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119편 기자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시119:92-96입니다. 

 

(시 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 119:93)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 119:94)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시 119:95)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시 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주의 법이 자기의 즐거움이 되지 않았더라면 고난 중에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주의 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시편119편 기자의 이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아니 수억 년이 지나도 빛을 받은 성도들은 동일한 이 고백을 하면서 세상의 돈과 즐거움과 권세가 모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의 말씀만을 의지하므로 그래서 얻는 그 안전 속에서 얻게 되는 그 기쁨을 가지고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건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다윗이 그 위기 속에서도 이겨내는 이유는 언제나 주님에게 자기의 삶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재앙을 주십니다. 이런 황당한 재앙을 다윗에게 허락하시는 그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살얼음판인 세상을 아주 안전하게 만들어 주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까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사울처럼 그 결과는 재앙이요 무너짐만이 남습니다. 이 세상은 더 안전할 수 없게 됩니다. 

 

말씀이 우선이 안 되면, 안전은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세상은, 말씀을 무시하는 세상에서의 안전은 오직 연극과 영화과 소설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의 능력과 중심은 언제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말씀 없는 현실의 안전은 거짓이요 모순입니다. 말씀 없는 안전은 없습니다. 경에서의 성도들의 시작과 끝을 안전하게 보장하시겠다는 그 뜻은 전쟁과 질병과 늙음으로 죽을지라도, 살아가는 성도들의 현실이 아무리 무시를 당하면서 핍박을 세상에서 당할지라도, 어디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눅16:19-25입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눅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눅 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아무리 은혜 충만할지라도 성도된 나사로의 현실은 지옥을 방불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왜요? 악인들이 율법을 외면한 체,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있기에, 안전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이 이 세상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의 재앙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 없이 안전을 다수가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도 전혀 안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몰라 멋대로 살면서 지구의 질서를 파괴한 악인들은 영원한 불 속으로 버려지지만, 성도들은 항상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안타까워하다가, 악인의 무지와 악행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분노하다가, 죽음을 맞게 되면, 무엇이 기다린다고요?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아픔과 죽음과 환란이 없는 천국으로 맞아 주십니다. 승리자로써, 면류관을 받으며, 큰 박수 속에서 영생하게 됩니다. 위기를 모면하고 돌아온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의 공격으로 다 잃는 사건이 터진 것은 운이 없어서도 아니고, 어쩌다가 생긴 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이미 죄 때문에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옥에서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구원이시고 하나님만이 방패시고 하나님만이 피난처시고 하나님만이 너희들의 평안과 승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보세요!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다윗 곁에는 군대장관 요압이 있는데, 그 요압이 누구이던가요? 다윗이 죽이고 싶어 하던 군대장관이요, 다윗의 천적으로 평생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요압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을 죽임,  다윗은 아마사와 요압의 동생 아비새를 지휘관으로 출전시키는데 이때 요압은 아마사도 죽임)

 

그런데 끝까지 다윗 곁에 요압을 두신 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이라고 하여,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게 하시더라, 조금만 긴장을 풀면 다윗일지라도 무너지더라~ 바로 그런 전체적인 삶 속에서의 한 사건이 오늘의 말씀이지, 믿으면 환란은 오지 않는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순간 방심으로 인한 그의 간음과 살인으로 인하여 어떤 사건들로 도배하게 되던가요? 그 시작이 아들 장남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연애하다가 간통하므로 그녀의 오빠 압살롬이 배다른 형 암논을 죽이게 되고 ~ 그리고 형을 죽인 압살롬이 그술로 도망하게 되고, 그러다가 돌아와서는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 다윗이 도망을 가야 했고 심지어 압살롬이 아버지의 남겨둔 모든 첩을 범하는 짓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늙어 죽을 때가 되면서 속 한 번, 상하게 하지 않던 아들 아도니야까지도 모의를 하여 왕이 되려고 하다가,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들인 나단과 사독, 브나야 들이 다윗 왕으로부터 확인한 후, 예정 되었던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이런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시27:11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가족과 내 힘과 지혜가 나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원수로 인한 환란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니, 그 성도는 평탄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누가 있는 것입니까? 원수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원수가 없는 삶이 되면, 우리의 주변이 안전하고 평안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아닙니다. 원수가 없으면 이 지구는 더 빠르게 멸망합니다. 왜요? 

 

비닐하우스의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없으면, 더 게을러지고, 더 이기적이 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외면하게 되고 방심하면서 인류의 멸망은 더 빠르게 올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존재하게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도움이 됩니다. 당연히 악인 때문에 성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기회가 되면서 평탄한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판을 치는 이 지구에서의 성도의 안전은 오직 원수로 인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비로써 안전과 보호가 가능할 것입니다. 영원한 안전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나라에서만 존재합니다. 

 

이 지구에게는 바라지도 구하지 마세요~이미 지구는 지옥을 방불하게 하는 곳입니다. 오직 성도가 훈련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그 나라를 향하고 있는 자들이지, 이 현실이 좋습니다, 여기서 승자로 살고 싶습니다, 여기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부자 되게 하시고, 그 사람과 혼인하게 해 주세요~도와주세요, 하나님!~’ 이건 믿음이 아니라 망상이고 착각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들은 연애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나가서 마음껏, 즐기지도 못합니다. 

 

재미있는 영화, 드라마를 볼 때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다 주의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요? 악인이 공존하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24시간 내내 위험하기에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훨씬 힘들어 질뿐입니다. 편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함 때문에 긴장하고 경계하므로 편할 수 없습니다. 늘 집요하게 공격하는 죄의 세력과 늘 싸워야 합니다. 성도에게 포기와 절망은 사전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실수와 미련함으로 심지어 육신의 연약함으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을지라도 포기가 아니라 믿음으로 다시 싸워서 이겨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고난이 성도에게 어떤 고백과 깨달음을 주시는지 시30:1-12의 말씀을 봅니다.

 

(시 30: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시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 30: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 30: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시 30: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 30: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승리로 인한 전리품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과 회복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그 신음의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의 삶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다고요?~ 외면하셨고요?~ 아닙니다. 다 들으시고 긍휼히 여겨주셨고, 보시고는 고쳐주셨습니다. 긍휼이 여겨주실 뿐만 아니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나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띠워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 고백과 찬송이 바로 우리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찬송과 고백은 세상의 형통과 즐거움과 승리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성도가 세상의 형통을 바라는 것은 신앙의 무지일 뿐입니다. 세상이 안전하다고 착각하여 돈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배반과 불신과 좌절만이 남지만, 세상이 살얼음판이기에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늘 쩔쩔매는 자녀들에게는 감사와 평안과 승리만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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