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0/18/2020 사무엘상 31:1-1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0/18/2020 사무엘상 31:1-13

PastorYK 2020. 10. 19. 15:27

말씀: 삼상31:1-13                                          

제목: 사울 왕도 다 함께 죽었더라

 

살면서 그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단 하나만큼은 안 됩니다. 그것은 사울의 죽음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의 결과는 힘으로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결과, 이 세상을 모든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한, 잠시의 기쁨과 승리일 뿐, 결코 영원한 승리도 감사도 행복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는 아니야! 나는 너와 달라~’ 그래서 여전히 이 악한 결과, 낳아서는 안 되는 이 참담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잘못하면, 자기만으로 끝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죽는 사건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 이 반복되는 참담한 종말을 해결하지 못하다가 보니까, 이 세상은 갈수록 나빠지게 되고, 지금 우린 혼돈과 무질서와 흑암 속에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19에 의하여 예전처럼 출입할 수도 없고, 이젠, 마스크 없이는 나갈 수 없고, 만나려고 하면, 이렇게 zoom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오늘도 우린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 속에서,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악하고, 불안전한 삶을 피할 수 없게 된, 우리들 모두는, 아직도 가서는 안 되는, 가면, 사울 왕과 그의 가족과 모든 부하들처럼, 다 죽어야 되는 그 참담한 종말을, 이렇게 말씀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아주 확실하게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돌이키지 않고 있기에 그래서 다시 한 번, 간곡하게 간절하게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오늘 말씀을 또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으로, 나는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되는지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고민하셨습니까?~ 그러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통하여 지금까지 적게는 몇 년, 수십 년, 또는 평생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늘 들어온 자기 자신이, 듣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과 지금 무엇이 다르던가요?~ 단지 말만 다르고, 생각만 다르지, 가는 방향은 다 동일하다는 것을 보면, 정말 참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냥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물론 나를 위한 말씀을 보면, 대단히 제한을 두고 있기에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모두가 한결같이 야생 당나귀나 야생마와 같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무제한의 시간과 공간을 가진 자처럼, 너무나 멋대로 입니다. 

 

다들 이기적이고 사납고 거칩니다. 그래서 훈련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내일이 없다는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편하고 좋고 즐겁고 막히는 것만 없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데, 정상일까요? 아닙니다. 이 제한된 인생 속에서 제한된 시간 속에서 제한된 공간 속에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끝이 되면 얼마나 다행일까요?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들 하는 소리가 어떤가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야! 라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 시작은 두 길로 나뉩니다. 인간의 죽음은 다시 가야 되는 새로운 한 길이 있는데, 영원한 버려짐의 길입니다. 그 버려짐의 공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불 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가야 되는 또 다른 새로운 길은 완전한 회복으로 영원한 삶, 영생이라고 하는 길입니다. 아픔도 죽음도 고통도 질병도 없는 오직 평화로운 곳에서의 삶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길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원한 두 길의 공존에 대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만으로 확인이 되고 있기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들은 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죽음의 후의 새로운 길이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막상 죽음 후에 새로운 길이 사실로 드러나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정말 큰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그 난감함을 어찌 하시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39:4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알기를 원하고 있으십니까? 부자 되고 형통하고 쉽게 편하게 사는 방법을 알기를 원하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 종말은 사울을 보세요~ 자신도 죽고 가족도 부하도 다 죽게 됩니다. 때문에 죄 덩어리인 우리 모두는 시편기자처럼 이런 기도를 간절하게 드려야 됩니다. 자기의 종말과 연한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는 자만이 현자요 복된 자가 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어떤 죽음이 기다리던가요?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그 기대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르고 있기에 하루하루를 단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정도로 살고 있는데,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아갈 때에 어떤 종말이 기다리는지 알아야 하기에 삼상31장의 오늘 말씀은 가치가 있습니다. 전혀 모르고 있기에 삼상31장의 사울왕의 종말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가진 사울 왕이었지만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된다면, 그 권세와 재물과 힘을 가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니 온 천하를 다 통일하고 최고의 최고로 살다가 마지막에 영원히 버려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눅12:16-21입니다.

 

(눅 12: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눅 12: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가서는 안 되는 사울왕의 길을 정신없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9:4의 말씀은 귀할 뿐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자신의 종말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 때, 경고망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때에, 우리의 현실은 완전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9편 기자가 어떤 고백을 합니까? 5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원하는 그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요, 그가 모든 권력과 재물을 다 갖고 그리고 최고의 인기를 평생에 누렸을지라도, 그것이 진리를 외면한 삶이었다면 진실로 허사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렇습니다. 왕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힘 있는 자였지만, 그러나 진실로 허사였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정신없이, 진리를 외면한 채, 사울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각하게 경고하시고 계십니다. 시39:6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왜 모든 인간의 삶이 그림자와 같다고 합니까? 왜 헛되고 일에 분요하며 자신의 그 재물까지도 누가 가질지도 모른다고 합니까? 

 

(시 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39:7에서 답변하고 있듯이 주께 소망을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울 왕의 종말이 그 증거입니다. 결국 자신을 포함하여 3아들과 모든 부하까지도 다 죽는 처참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모두가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요, 이 길보다 아름다운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꼭 자신이 사울처럼 살다가 죽어야지만, 거기까지 가 보고나서 그때, 아하! 내가 정말 잘못 살았구나! 하고 뒤 늦은 후회는 안 됩니다. 꼭 그렇게까지 가서 깨닫고 버려져야 속이 후련하십니까? 그런 자가 어리석은 자요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잠22:3에 보시면,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사울 왕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듣고 순종하라고 하시는데,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됩니다.  

 

이제 그만 자기 기준, 미련한 고집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동안에 저지른 바보짓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앙탈 부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을 보면, 그렇게 이야기를 수없이 해 주어도 갈 때까지 가더라는 것입니다.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어떤가요? 잠17:10입니다.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지혜로운 자들은 한 마디 권면, 권고, 충고도 건성으로 흘려듣지 않습니다

 

사울왕도 내내 말씀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했다가 이 꼴이 난 것입니다. 듣지 않는 그 미련함과 어리석음으로 그는 망했습니다. 특히 삼상31:4의 말씀을 보세요. “그가 병기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여 그 위에 엎드려지매” 멋대로 하다가 이제 부끄러운 죽음 앞에서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부탁도 뜻대로 되지 않자, 자결하고 맙니다. 이런 참담한 처지로 삶을 마감하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말씀을 의지하라"고 이리저리 기회를 주셨지만, 그때마다 멋대로 하더니, 그 끝장을 보세요! 성도는 이렇게 죽으면 안 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끝장을 보여 주시는데도 또 남의 일로 여기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린 이런 사울 왕의 마지막 죽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고 멋대로 하다가,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목까지 잘라졌고, 갑옷까지 벗김을 당하고, 뿐만 아니라 그의 목과 갑옷을 블레셋 전 지역으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게다가 목이 없는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버리는, 최악의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조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원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무도 원하는 사람은 없으시겠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그렇게 버려지고야 맙니다. 아니 우리들이 다 이렇게 사울 왕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존재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영원히 빛을 발하게 하셨는데, 지금 우린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고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계십니까? ~ 진리에 대하여 전혀 듣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우리들에게 거짓된 복음이 아닌 참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죽음을 준비하시라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종말과 연한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성도의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지금 교회의 현실이기에, 바른 말씀을 듣지 않고 들나귀처럼 멋대로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어떤 설교를 선포해야 할까요?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는 그런 교인들에게 세상 성공, 출세를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하라는 그런 설교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너희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악한 존재이었는데, 누구의 은혜로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 알기는 아는가? 너희들이 얼마나 더럽고 미련한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상속자가 되었는지 아는가!~ 이런 듣기 싫은 자존심이 상하는 설교를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복입니다. 

 

이렇게 오늘도 이 작은 교회에서 심한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오고 싶고, 말씀이 듣고 싶어서, 항상 준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 실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간섭이요 은혜가 임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더러운 존재,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는 “자존심이 확! 상하는” 그런 설교를 지금도 듣고 있으시지만 도망치지 않고 참고 인내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는 승리의 기회요 기쁨의 잔을 들고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왜요? 그렇지 않으면 방자하고 교만하게 살다가 사울 왕처럼 버림을 받고 처참한 죽음을 맞아야 되는 심판의 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사울왕의 죽음에 대한 이 설교를 통하여 연약한 우리들이 마지막 날의 심판을 준비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거친 들나귀같은 고집불통의 우리들을 알아듣게 하시려고, 상을 따라가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셨음을 믿으신다면, 이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이웃의 종으로 사는 것이 억울할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한 번의 설교로 돌에 맞아 죽은 참 신앙인 스테반 집사를 생각해 보세요! 행7장의 말씀은 스테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마치자, 설교를 들은 자들의 반응과 그의 설교 결과를 보세요! 행7:51-60입니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스데반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누가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사울 왕의 죽음을 방불케 하는 스테반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스테반의 그 죽음은 어떤 기적이 나타났던가요? 사울이 바울이 됩니다. 베드로는 한 번의 설교로 5000명이 회개를 하는 대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스테반은 설교 한 번으로 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마치 망한 설교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13권을 기록하고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제물로 드린 사도 바울을 잉태합니다. 

 

만약에 바울이 없었더라면~, 러나 스테반의 죽음을 통하여 사울을 바울 되게 하여,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스테반 한 사람의 설교로 자신은 돌아 맞아 죽었지만, 상상할 수 없는 구원의 기적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으로 돌에 맞아 죽은 스테반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죽습니다. 죽어야 되는데, 자신의 죽음이 사울의 버려진 죽음이냐~, 아니면 스테반의 살리는 죽음이냐~ 지금 우리들의 죽음은 어느 쪽입니까? 

 

그 선택은 말로 지식으로 종교행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알고 오직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스테반의 살리는 영광스러운 죽음의 복이 임합니다. 스테반처럼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영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살리는 죽음의 복을 받은 성도들의 현실은 어디까지 자기 자신을 버리게 하는지 아십니까? 고전4:9-13입니다. 

 

(고전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나 죽어 이웃을 살리는 희생까지 아끼지 않는 증인들이 되게 하십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원하는 심령과 기쁨으로 이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택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은 죽어 살리는 성도의 삶이 못난 삶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십자가의 길은, 남을 살리는 능력의 삶입니다. 사울왕은 자신도 처참하게 죽고 자식까지도 죽이는 삶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이스라엘까지도 부끄럽게 하는 죽음이었지만, 살리는 성도들의 삶과 죽음은 남에게 복과 생명을 주는 영광스런 증인으로 남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생명과 저주의 길이 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쉽게 사는 것은 저주의 삶입니다. 특히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희생하고 섬길지라도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옛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저주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옛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자기의 옛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늘 불평과 근심을 가져오기에 신앙의 발전이 없고 해가 되고 마음의 상처를 주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모든 선한 일은 당장은 지는 것 같고,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돌아 맞아 죽은 스테반을 보세요! 언제나 승리와 기쁨과 평강의 삶으로 풍성한 신앙의 결실을 영원히 맺게 되는데 자기 생각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에서 맛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천국에서의 삶을 반드시 허락하십니다. 이 기쁨으로 살아내시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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