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오늘 말씀에서도 우린 우리의 약점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특히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분들에게 오늘의 말씀은 더욱 깨달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왜냐하면 자기 기준에서의 최선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최선을 다했느냐? 이어야 하는데자기 기준에서 ‘나는 이 정도 했다’로 평가를 합니다. 혹은 ‘그래도 된다’는 자기 기준이 말씀과 일치할까요? 문제가 됩니다. 자기 기준으로 평가를 하는 성도가 오늘말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우린 오늘 말씀에서 ‘어쩔 수 없었나, 그래도 되는가’
이런 선택을 했을 때, 왜 하나님께서는 책망을 하지 않으셨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을 보세요!지난주까지만 해도 두려울 것이 전혀 없었던 믿음의 다윗은 생각하다가 결국 블레셋으로 피하고 맙니다.잘못된 선택입니다. 안 됩니다.은혜가 아무리 충만할지라도 한 순간의 자기 생각으로 인하여이렇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사울이 또 죽일 것에 대한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밀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런 분이 또 계시는데 혹시 아세요?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아브람이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창 14:23)
네 말이 내가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창 14: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아넬과에스골과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그 큰 당시 연합군 세력을 자기의 사병 318명으로 물리치고 승리한 아브라함이 전리품을 가지고 와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받쳤습니다.그 십일조는 자기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돔 왕이 전리품도 주려는 것도 받지 않고나는 오직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자라고 큰소리치더니, 나중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십니다. 창15:1입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아브라함이 승리한 후에, 큰소리를 쳤지만, 그 후 가만히 생각하고 있다가,별안간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엄습해 온 것입니다. 연합군이 다시 쳐들어오면 그때는 어떻게 감당하지?~ 그래서 오셔서 주시는 말씀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아니냐~”사병 318명으로 연합군을 쳐 부셔 놓고도 어느 날, 한 순간에 자기 생각이 확~들면서, 만약에 연합군이 지금 공격하면 이길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여기서 대부분이, ‘아니야~ 나는 나의 방패이신 하나님이 계시잖아! 하면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언제나 은혜 충만할 수 없습니다. 별안간에 무너집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2)왕상18-19장입니다.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약5:17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왕상 19:20)
그가 소를 버리고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왕상 19: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850명의 바알, 아세라 거짓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한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얼마나 은혜가 충만했던가요?마차보다 빨리 달리면서 타락한 북이스라엘을 당장, 싹~제거할 기세로 달려갔습니다.그러나 아합의 아내 이사벨의 한마디 공갈로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겁을 먹고서는 단번에, 시내산으로 숨어버리고 맙니다.항상 우리의 약점일 수 있고 인간의 한계라고 봅니다. 이렇게 힘의 세상은믿음이 약한 자가 아닌 강력했던 믿음의 자녀들을협박하여 넘어지게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늘 승리를 하다가도 한 순간에이렇게 아브라함, 다윗, 엘리야처럼 두려워하게 합니다. 결국 다윗은 이방 나라 블레셋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던 다윗, 우리도 다윗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린 주님 안에서 같은 지체로써 거룩함의 길을 가야 되는데 넘어지는 경우에, 조롱과 조소를 할 수 있기에, 이럴 때, 우린 어떤 생각과 반응을 서로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성도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편하게 살 수 없는 남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들이 영원히 머물 곳이 여기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제 도착해야 되는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주님! 여기가 좋습니다~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처럼,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그래서 늘,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나의 시간까지도 이 곳에서의 즐거움을 위한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그네 된 성도들은 예외 없이 전쟁터에 참여한 군인처럼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성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도 보세요!결국 한 순간에 자기 생각으로 인하여 블레셋으로 피하게 되는데,나그네임을 잠시 잊다 보니까, 힘의 두려움으로 세상으로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이기적인 삶을 살다가, 문제가 터져서, 숨으려고 내린, 선택하고,다윗이 늘 순종하다가 한 순간 오판으로, 내린 못난 선택하고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과정에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얼마나 지위가 높아졌는가,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평시에 책임과 역할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초점입니다.그런데 주인이 되고자, 늘 자족하지 못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더 갖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심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가, 실패하게 되면,불평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도망쳐 버리고 맙니다. 왜 도망치던가요? 세상에서 왕이요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삶이 목적이 아니기에 도망칠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가 평시에 무엇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까? 오직 사울과 나발처럼 살다가 어쩔 수 없어서 내린 타협이요 뒷걸음입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말씀 중심으로 살다가 다윗처럼 결국 지쳐서 내린 타협 아닌 타협입니까?하다가, 하다가 사울 왕이 포기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만 하니, 블레셋으로 피하게 된 것입니다.사울이 죽을 뻔한 기회를 통하여 혹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어떤 기대를 다윗도 갖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연약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도망 다니기, 하도 힘이 드니까, 잠시 앉아서 그런 생각 할 수 있습니다.이 정도로 내가 했으니, 혹시 사울이 나를 살려 주고 다시 군대 장관으로 불러주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기다려보아도 그런 소식은 없었습니다.그러니 또 쫓길 것이 당연하기에 그래서 내린 결정이 블레셋으로 타협 아닌 타협으로 피신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하셔야 되는 점은 물불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하는 성도들과 다르게 다윗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다가 내린 결정이란 점입니다.
우리들이 사울이나 나발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그리고 나중에는 실패하게 되어, 도망쳐 버리는 그런 선택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엘리야도 순종하다가 그런 연약한 점을 드러내고 있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러나 우린 어떤가요? 성도가 나그네를 잊고 세상의 주인이 되려다가,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불평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과를 보지 않으십니다. 너희들이 은혜 안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자족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나그네인 너희들이 지금 하나님의 것으로 얼마나 채우고 있는가? 에 있습니다. 지금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니? 지금 너는 권세를 갖고 큰소리를 얼마나 치고 있니?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그런데 나그네인 성도가 미련하게도 돈을 벌려고 하다가, 좋은 성적을 가지려고 하다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다가, 결국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포기하게 되고 타협하게 되고 불평하면서 시기질투로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면, 그 놈들은 내가 그 책임을 끝까지 지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하나님의 심판으로 결국 바벨론의 노예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고백을 드렸는지 아세요? 시137편입니다.
기회를 주셨을 때, 주님만을 온전히 찬양을 드리지 못하고 멋대로 함부로 우상숭배를 하다가 바벨론으로 노예가 되어 쫓겨 왔는데, 바벨론 그들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너희들의 그 찬양을 해 보라고 하니까, 기회를 주시고 부족함이 없었던 예루살렘의 시온 성에서도 온전히 부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어떻게 이곳에 불순종으로 인한 노예로 끌려와서는, 이제, 너희들이 찬양을 해 보라고 하니까, 그래서 힘에 눌려,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바에는,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 아닙니까?~불순종으로 포로된이스라엘도 이렇게 부끄러워서 이런 고백을 드리고 있는데, 우린 어떤가요?멋대로 하고도 아무 죄책감도 없이 악한 세상의 종이 된, 더럽고 더러운 몸으로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찬양을 하고, 신앙고백까지도 전혀 어색함이 없이 참여하고 있습니다.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악함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을까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다가 그래서 드리는 찬송이 되고 신앙고백과 드림이 되어야 하는데, 귀신의 종, 돈의 노예로 살다가 회개 없이, 아무렇지 않게, 주저 없이, 어떻게 찬양을 드리고 신앙고백을 하고 좀 드렸다고 안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예배 전에, 매 토요일 오후에는 최소한 이스라엘의 그런 슬픈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내가 이런 꼴로 찬양을 드리고 신앙고백을 할 바에야, 내 혀가 나의 입천장에 붙어버리는 것이 낫지! 이렇게 절절한 이런 최소한의 반응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까지도 멋대로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그냥 나와서 찬양하고 신앙고백을 하면 다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성도라면 시137편의 이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이런 거룩한 자존심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하나님이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어떤 하소연을 하시던가요? 사1:2-17, 말1:6-14입니다.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2)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 1: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사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사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 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말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 1: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말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1: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래서 더 이상 이런 하소연을 하시지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지금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하소연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시고 계십니다.그 깊이 탄식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까? 느끼지 못하니깐, 여전히 돈 돈 돈에 미친 사람처럼, 아니 돈이 아니면 안 된다고더러운 악마의 종이 되어, 돈에 완전 빠져서 사망과 저주의 길을 선택 하고도 자기 원하는 뜻만 이루어지면 만족하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바로 그때입니다.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을 때, 다윗이 분노했지만,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돌아갔을 때, 그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씀을 드리면, 믿음으로 수입이 충분히 되는 주일에,가게 문을 닫을 때,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말씀을 보고 기도를 쉬지 않을 때, 심하게 다투고 마음이 아플 때, 한 잔이 아니라기도를 드리거나말씀을 의지할 때,
바로 그때가 기회입니다.그런데 자기가 할, 세상의 일은 다 하고 나서, 남는 찌꺼기 시간에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마5:46-47입니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나 누구나 할 줄 아는 그런 역할이 아니라 아무도 못하는 역할을 할 때에 비로써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마5:39-42, 48입니다.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는 악을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악마들이 하는 짓거리만 하다가 주일에 참여하면서 찬양을 드리고 신앙고백을 하며, 신령한 복의 말씀을 거저 쉽게 받으려고 하니, 무슨 응답을 받을까요?
야~너, 누구, 누구야! 그러면 안 된다~이 소리만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고 자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다윗을 보세요! 1년 4개월간을 숨어 있을 때,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블레셋과의 전쟁을 통하여 정당하게 당당하게 돌아오게 해 주십니다. 삼상29:1-11입니다.
(삼상 29:1)
블레셋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삼상 29:2)
블레셋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삼상 29:3)
블레셋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히브리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아기스가블레셋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삼상 29:4)
블레셋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블레셋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삼상 29:5)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
(삼상 29:6)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삼상 29: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블레셋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삼상 29:8)
다윗이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삼상 29: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아나블레셋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삼상 29:10)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삼상 29:11)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블레셋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블레셋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이런 멋진 우연이 어디 있을까요? 작품입니다. 하다가 결국 이렇게 몸을 피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돌아오게 하여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해와 같고 궁창과 같아야 합니다. 시19:1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우리의 호흡과 한 걸음과 봄과 들음과 느낌과 계획까지도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하고 하신 일을 드러내야 되는데, 어떤가요? 최선을 다 하다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단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은혜만을 믿고 멋대로 살다가 결국 포기하고 내린 결정인가요?그 과정이 중요하기에 악한 과정 속에서 내린 결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신앙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한 번 은혜 충만으로 유지 되지 않기에 늘 세상과 특히 자신과 평생 피 흘리면서 싸워야 합니다.왜냐하면 다윗을 보면, 삼상26장에서 얼마나 당당한 모습이었는가? 그러나 결국 자기 판단으로 원수의 나라 블레셋에서 몸을 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런 못난 짓을 한 다윗에게하나님께서는 결국 돌아오게 하시면서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잘못에 대하여 조용히 마무리 져 주십니다.
그리고 최고의 왕으로 준비시켜 나라를 통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멋대로 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더욱 이겨내야 합니다.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로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지만 그 실패 속에서도 이방인을 구원하시듯이,하나님의 뜻과 목표는 결코 변개 되지 않으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고 하여 멋대로 해도 된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은 무엇과 같다고요?다 해주니까, 나는 하지 않아도 되겠네~해 주니까,내가 안하게 되잖아~
그러면서 하는 구차한 변명과 핑계가, ‘나를 나쁘게 만들지 마~’라고 하는데 이건 아주 악한 것입니다.심지어믿음의 다윗도 보세요~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이방인들을 잔인하게 다 죽여 자기를 숨겼고, 가서는 자기가 유다 인들과 친분이 있는 겐 족속들과 유다 족속인 여라무엘(유다의 손자 헤스론의 아들-대상2:9, 25, 26)
사람들을 죽였다고거짓말을 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시120:5과 벧후2:8입니다. 시120:5입니다.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벧후2:8입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얼마나 연약한 존재가 우리들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세상에서의 삶을 경계하면서 믿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잘못된 짓에 대하여 영원히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아픈지, 그래서 다음에는 죽어도 하지 않으리라는 강력한 결심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그 잘못한 것으로 인한 아픔의 기억으로 다음엔 크게 당하더라도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인내하면서 또 인내하면서 나의 믿음의 자리를 지켜 내리라~악을 선으로 갚으면서 순종하리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벧전4:1-11(3)입니다.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벧전 4: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죄인들은 한 번 잘못하면, 그래서 더욱 나빠질 수 있고,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으므로, 습관이 되어 가면서 얼마나 뻔뻔한 자가 되는지 모릅니다.그러나 성도는 잘못할 때마다, 더욱 경건하고 정결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근본적으로 연약한 자들이기에 아무리 은혜가 충만할지라도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여차하면 일어나게 됩니다.그럴 때마다, 이젠, 다윗처럼 이런 못난 결정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하면서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구원을 두려움으로 이루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면서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고 계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시121:3-8)
아무리 강력한 세상의 왕이 쳐들어올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가난도, 질병도, 죽음도, 패배도, 총 칼도, 재앙도, 사람의 비방과 훼방도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아멘-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시면 모든 우리들의 문제는 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다윗의 시편 시27:1-6의 말씀을 봅니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시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1)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시 27: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절-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고백입니까?
한 때는 다윗도 사울 왕이 두려워 세상 세력에게로 도망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어떤 고백을 시27편에서 하고 있습니까?아하! 다 맡겨버리시고 믿음으로 가니까 되더라! 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다 맡겨버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증인의 삶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하여여호와 하나님만을 앙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