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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3/9/2025 이사야 42:1-25 본문
말씀: 사42:1-25
제목: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 첫 사랑을 버렸나요?
먼저 사42장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어떤 내용을 기록하고 계신지를 함께 살펴보고 나서 준비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4절에서는 온유하고 긍휼이 풍성하며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종, 메시야에 대한 노래입니다. 5-9절에서는 1-4절의 노래 후에 소경을 보게 하고 갇힌 자를 해방시키셔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게 하실 메시야의 구속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노래하고 있고 10-17절에서는 구원을 앞두고 공의를 행하실 하나님께서 세계 만민을 향한 초청과 함께 구원자 하나님께 찬양을 촉구하고 있고 18-25절에서는 선민으로써 수많은 이적을 보고 예언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청종하지 아니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는 우매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국 우린 사42장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42:10-13입니다.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용사같이 나가서 구원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을 쳐부수신 하나님에게 온 만민들은 그분에게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소리를 높여 찬송하고, 산꼭대기에서도 찬송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찬송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은혜를 입은 자녀들은 지옥을 방불하는 세상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타협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기적의 삶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요? 이 말씀 그대로 날마다 끊임없이 영원한 승리를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새 노래로 찬양을 드리고 있나요? 땅 끝에서부터 큰 자나 작은 자들이나 다 소리를 높여 찬송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 산꼭대기에서도 찬송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승리자로써 승리의 노래를 드리고 있던가요? ~ 그래서 드리는 질문은 우리의 자랑과 기쁨과 감동과 감격이 어디로 치우쳐 있는, 자신인지를 늘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나요? ~ 아니면 혹시 은혜에 대한 감동과 감격은 이미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보이는 세상의 힘으로 다시 돌아가, 단지 종교적인 자세로 찬양을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
지금 제가 오늘 이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수의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수년간 하다가 보면, 어떤가요? 타성에 젖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안주하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신앙의 방향을 자기가 놓쳤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현실은 어떻다고 하시던가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씀하십니다.
고전10:12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방심하는 순간 넘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세력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에 그래서 늘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빌2:11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분명히 주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는데 그 다음 말씀을 보세요!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기에 그러므로 너희들은 잔치하고 기뻐하라가 아니라 뭐라고 하십니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왜요? 성도들에게 주신 목표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즉 다 내려놓고 다 맡기고 결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아야 하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 끝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세상 세력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현실입니다. 이런 영적인 전쟁터에서 날마다 싸워 승전가를 불러야 되는데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 버리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의 군복만 걸치고서는 적군과 내통하면서 편하고 쉽게 살아보려고 다수가 고민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어떤 말씀을 경고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계2:1-7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바로 그런 문제점을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지적해 주시고 계십니다. 첫 사랑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버렸다는 그 의미는 그 사람의 신앙생활 속에서 참 감사와 믿음의 감동과 감격을 잃었기에 하시는 말씀으로 저는 이해를 합니다. 특히 사42장을 최소한 지난 저녁 시간에 다 읽어 보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이던가요?
그렇습니다. 오실 메시야, 이새의 뿌리와 줄기에서 한 싹이신,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분명 예수님에 대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자기의 마음에 어떤 느낌이 느껴지던가요? 혹시 그렇구나! 또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구나! ~ 그리고 나서 그냥 그렇게만 느끼시고 피곤하여 잠자리로 들어가셨다면, 제가 사42장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볼 때, 그렇게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어가신 그분도 역시나 군복만 입고 군인 척을 하는 전혀 싸우지 않는 구경꾼에 불과한 자가 아닐까요? 그 첫사랑을 버린 장본인이 자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이해를 위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자기가 지독하게 좋아하는 어떤 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보게 될 때마다, 어떤가요? ~ 바로 그 순간에 확! 다가오는 그 느낌, 그 감정을 우리들이 다 경험을 하지 않았나요?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쩔쩔매기도 하고, 괜히 다른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하여튼 상대방을 너무나 좋아하다가 보면, 일반적으로 다른 반응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아닌가요? ~ 심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기쁨과 또는 아쉬움과 그리움과 만나고 싶은 그 마음은 그 누구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다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사랑하니깐, 좋아하니깐, 그럴 것입니다. 그러다가 서로 잘 맞아서 자주 만나게 되면서 그래서 나중에 혼인까지 하게 되면, 입술이 어디에 붙어 있다고 하던가요? ~ 나는 이제 평생 행복할거라고, 아니 평생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나름 결심하면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미게 되지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어떤가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나중에는 다수가 원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요?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왜 변한 것입니까? 소유했다는 착각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좌우지당간에 no matter 자기의 처음의 그 마음이 점점 사라진 것입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다면 사42장을 보게 될 때, 그동안에도 매일 그분에 대하여 듣고 보고 했을지라도, 다시 또 사42장에서 만나게 되는 그분은, 역시나, 은혜로 살아가는 자에게, 여지없이 또 두근거리고, 설렘이 되는, 그런 어떤 믿음의 감동과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여전히 느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42:10-13을 다시 보세요!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악의 세력에 붙잡혀서 영원히 버려져야 될 우리들을, 그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와 평안과 행복의 삶을 만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과 복이 그 어디에 또 있을 수 있던가요? 오직 우리들에게만 주신 놀라운 구원이요 회복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힘의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이신데, 그 은혜를 입었다면, 당연히 매일 새 노래로, 땅 끝에부터 찬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와야 되고, 나를 포함하여 온 열방에서 은혜를 입은 모든 자녀들이 산꼭대기에서도 소리를 높여 즐겁게 그분에게 찬송을 드리게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사42장을 보시면서 회개도 없이 감사의 마음도 없는 어제 저녁이었다면 이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첫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첫 사랑을 놓치지 말라는 뜻은 그분과의 동행이 너무나 행복할 수 있어야 하고 감사와 감동과 감격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 그 은혜의 가치와 능력이 얼마나 큰지, 날마다 찬송하며 회개하며 감사하는 그런 자기를 보면서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 다시 또 보게 되는, 아니 수없이 이 사42장의 말씀을 보게 되더라도, 은혜를 입은 자녀들에게는, 역시나 또 감동이요 감격이요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지 아니던가요?
우리들이 사42장의 말씀을 매일 듣고 보게 되더라도 우린 매일 같은 감동이요 감격이요 기쁨과 감사가 아니라, 더 깊은 더 높은 더 충만한 감동과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되어야 그것이 정상이 아닐까요? ~ 왜요? 신앙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이가 먹어도, 아니 더 먹어도 몸은 비록 쇠하겠지만 그러나 마음만큼은 늘 푸르고 청청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시92:12-15입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는, 이 시편기자의 고백이 산돌교회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전 690년경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사42:18의 말씀을 봅니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신 예언의 말씀인데, 못 듣는데 들으라고 하시고 맹인에게는 보라고 하십니다. 말이 되나요? ~ 그러나 결국 은혜가 없어 율법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또는 보이는 기적으로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특히 그 예수께서 오실 것을 무엇으로 믿으라는 것입니까?
사42:5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시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하신 예언의 약속으로 자기 이름을 건 그 이유는 오실 구세주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걸고 자존심을 걸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특히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는 그때 오실 구세주로 말미암아 하신 예언이신데, 구세주가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존심을 거신 그 이유가 있는데 사42:7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42:7을 봅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런 기적이 오실 메시야로 인하여 일어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존심을 걸고 이런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42:6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너 즉 예수님을 불러내신 것은 오실 예수님만이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하셨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셨기에 그래서 자존심을 걸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다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까? 예수가 오시므로 보게 되었고 듣게 되었고 예수가 오셔서 백성의 언약이 되었고 즉 오실 예수만이 아브라함(창12:1-3), 이삭(창26:1-5) 야곱(창27:28-29), 모세(출19:3-6), 다윗하고 맺은 언약(삼하7:8-17)들을 다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백성의 언약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이방의 빛도 보세요! 사49:6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51:4입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눅2:32입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방인들에게도 약속하신 그대로 빛을 비추어서 구원하셔야 하셨기에 그래서 예수가 오셔야 했고 그리고 예언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뜻에서의 예언입니다. 이 완성의 주체는 사42:8-9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완성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누구에게 찬송을 드려야 할까요? 누가 찬송을 받아야 합니까? 사42:10-13에서 말씀을 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오직 성부하나님께만 영광의 찬송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걸었던 그분이 약속하신 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 영적으로 회복이 되어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즉 보게 되었고 듣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수 천 년 동안에 모두가 만나기를 원했던 그분, 그분을 만나면서 천지개벽 즉 새로운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걸 중생, 회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마13:14-17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걸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복은 이 복을 받은 자들을 항상 기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감격과 감동으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 것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되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신 말씀까지도 순종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가 받은 그 은혜의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연히 용사같이 나가서 구원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을 쳐부수신 하나님에게 온 만민들은 그분에게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소리를 높여 찬송하고, 산꼭대기에서도 찬송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찬송을 전하셔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 아니 점점 더 깊은 더 높은 더 충만한 감동과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사42:18-25의 말씀을 봅니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을 삼가 듣겠느냐,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이 무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메시야를 통하여 더 이상 세상의 정죄를 받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하셨는데, 어찌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굶든지, 편하든지 고통스럽든지 어찌 항상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항상 그분과 동행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 우리들의 남은 삶은 새로운 노래를 드리면서 더욱 주님을 닮아 가시기를, 점점 더 성숙해 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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