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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2024 이사야 32:1-20 본문
말씀: 사32:1-20
제목: 살아 있는 말씀, 나는 존귀한 자의 증인인가?
사32장의 말씀을 요약한다면, 남 유다가 타락하여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서 무너지게 될 남 유다에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하여 회복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사32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고 나서 준비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서는 오실 한 왕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3-4절에서는 그 왕으로 인한 영적인 회복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5-8절은 의로운 통치가 실현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9-14절에서는 타락한 남 유다의 남편들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너진 상류층 부녀들의 안일함과 염려 없이 사는 타락한 상류층의 부녀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슬피 울며 탄식할 날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5-20절에서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새 시대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전700년경에 예언하신 이 말씀이 어떤가요? 허풍이었고 거짓말이었나요? 아니면 이 예언된 말씀들이 사실 그대로 현실이 되었나요? 일점일획도 거짓된 적이 없었습니다. 다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나요? 말씀이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말씀이 살아 있다, 또는 말씀에 생명이 있다’라고 할 때, ‘생명의 말씀’을 단지 어떤 도처럼 지식처럼 깨달음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우리들이 듣고 배우는 정도의 지식이나 깨달음 차원의 어떤 도 정도로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 생명의 말씀이 가진 그 능력을 보면, 우리들의 상식과 지식을 훨씬 넘어선 어떤 수준인데,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초능력의 기적입니다. 죽음도 이겨 살리는 수준입니다. 다시 봅니다.
요11:38-4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 놀라운 능력의 말씀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임하였다는 것을 아시나요?
행9:36-43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죽은 자를 말씀으로 살린 사건에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도나 지식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를 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악을 선으로 바꾸어서 영원한 화목의 관계로 기적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이 놀라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무엇을 위한 말씀이 되었나요?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세상의 형통이 아니고 오직 거룩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의 말씀을 구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함에 두지 않고 세상 형통을 위한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힘의 말씀으로 믿었다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왜요? 거룩함이 말씀을 주신 목적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거룩함이 세상의 형통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기에 이스라엘의 힘의 요구에 대하여 하나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인간의 힘은 하나님을 믿는 쪽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힘으로 하나님의 뜻인 거룩함을 제압했을 때, 영원히 아무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이유가 없었고 우상을 숭배하던 힘의 나라들도 멸망시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은 자멸케 하기에 영원한 화평과 안전과 평안하고는 완전 반대이기에 그래서 세상의 헛된 힘의 가치에서 벗어나 참 승리와 화평과 화목을 이루어 주시려고, 한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32:1의 말씀입니다.
1절부터 봅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를 통하여, 장차 한 왕이 오시면, 공의로 통치하시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 그 당시는 율법이 근간이었습니다. 인과응보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기에 순종할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뜻은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구약 수천 년 내내 하나님께서 기적과 능력으로 도와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면서 가나안 땅에 살던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 주시고 이스라엘을 세워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는 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힘을 의지하다가 보니깐, 어떤가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들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나님에게 나갔던 것이 아니라 힘의 나라에 의존하면서 이스라엘은 갈수록 어떻게 되었나요? 북이스라엘도 망하고 결국 남 유다도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70년간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32장의 당시도 그 역사의 흐름 속에 있었기에 한 왕이 올 때까지는 절체절명에 놓여 있었기에 그래서 주신 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장차 임할 한 왕은 일차적으로는 히스기야를 상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어떤 환경이 허락된다는 것입니까?
2절입니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이사야 그 당시 상황은 절체절명이었지만 장차 그분이 오시면 광풍을 피할 수 있게 되고, 폭우를 가릴 수 있게 되고, 마른 땅 위에 냇물 같게 되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오시면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죄의 힘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어 거룩함을 향하여 나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힘에서 벗어나 믿음이 힘이 되려면,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은혜만으로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어떤가요? ~ 그 예수님을 믿게 되면 죄의 힘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아니 벗어나야 되기에 은혜를 입은 자녀들의 삶이 어떤가요? 처음부터 쭉쭉 뻗어서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던가요?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정말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과정입니다. 그간의 모든 것들을, 자기가 내 것이라고 했던 것들을 다 버려야 하기에 처음에는 보통 문제가 아닌데, 결코 만만하지 않는 길인데, 예수를 믿으면 형통한다고 다수의 목사들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 좁은 길이 가짜가 되었고 넓은 길이 진짜가 되었습니다.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거룩함을 위하여 싸우는 자가 없습니다. 다들 “썩을 힘을 더, 더, 더, 하느라”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혜를 입었다면, 사32:5의 말씀처럼,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말아야 되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말아야 되는데, 어리석은 자들이, 우둔한 자들이 존귀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32:6-7의 말씀처럼,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고,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고, 주린 자의 심령을 더 비게 하고,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하고,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고,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들어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32:6-7의 말씀 그대로 악한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은혜를 입으면, 늘 우둔한 힘의 자신과 싸워야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인데 문제는 그 좁은 길도 다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을 복으로 여기고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감사하기는커녕, 좁은 길을 가는 복된 자들을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하니, 지금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온갖 조롱과 조소를 다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악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죽은 자들의 모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어떤 변화가 온다고 합니까? 다 맡기고 순종하게 되면서 죄에서 오는 모든 힘의 문제들을 다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예수를 믿으면 소경이 눈을 뜬다는 이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치명적인 문제 즉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zero인데 이 무지와 우둔함에서 벗어나 보고 듣게 되어 다시는 죄의 힘에 속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장님이 눈을 뜬 그 느낌, 그 기적으로 인한 감동과 감격으로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하나로 묶이지 않을까요? 그 어떤 세상의 유혹도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공갈에도 속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주님의 뜻만을 따라갈 것입니다. 전혀 다른 자신이 될 것입니다. 아닌가요? ~ 특히 이 점에 대하여 주님께서 무섭게 책망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앞에 놓인 아주 작은 장애물은 보고 피하여 넘어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큰 위험한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여 넘어졌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마23:24입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지금 자기가 큰 죄는 삼키고 작은 죄는 걸러 내면서 자기가 믿음의 눈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까? 착각한다면 그는 맹인입니다. 신앙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기에 한 곳만 더 봅니다.
마23:25-26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속은 더럽고 겉만 깨끗한 척 하는 것도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하시면서 눈 먼 자라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신앙의 길이 쉽다고 합니까? 누가 감히 신앙의 여정이 세상의 형통이라고 합니까? ~ 오직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보게 하셨고 듣게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4절을 보세요!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조급한 자의 마음이 어떻게 된다고요? 여기서 조급함은 미련하다는 뜻입니다. 미련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지식을 얻게 되면서 지혜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가 되었는데 다시 세상을 따라간다고요? 조롱과 조소를 받던 미련했던 옛 자신이, 은혜로 인하여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는데, 다시 조롱과 조소를 받는 부끄러운 옛 자리로 돌아간다고요? 가능할까요? 늘 당하던 자가 이젠 미련한 자들을 돕고 보살피는 자로 살게 되었다면 그 누구도 예전의 저주를 방불하던 미련했던 삶이 그리워 돌아간다고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어 깨닫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기어서라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점점 더 큰 신앙인이 되려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그러니 어눌했던 자들도 혀가 민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썩은 힘에 속아서 몰라서 따라가는 일은 용납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머뭇거리지도 돌아보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보면, 행4:11-21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원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는데 별안간 그 무식했던 제자들이 이렇게 똑 소리가 나니까, 다들 이상히 여겼다는 것이 아닙니까? 공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어눌한 자로 할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다시 5-8절을 봅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면, 더 이상 세상의 헛된 힘에 당하지도 속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존귀한 자로 존귀한 일에 항상 서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떤가요? 우린 정말 은혜를 입어서 존귀한 자로써 항상 존귀한 일에 서 있나요?
이제 2024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떤 한해였나요? 한해를 돌아보시면서, 더 이상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거나,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는 부끄러운 선택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간의 행보를 숨기고 감추는 부끄러운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어리석고 간사한 자가 되면 안 됩니다. 목마른 자신에게 더 마실 것이 없게 해도 안 됩니다. 은혜를 입은 자기 자신이 예전보다는 점점 나아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의로운 행보가 이루어지도록 생명의 말씀을 마음 판에 깊이 아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왜요? 힘의 세상에서 묶이면, 참과 거짓이 뒤바뀌면서 혼돈에 빠지게 되고, 악덕과 미덕이 뒤 섞여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기준이 되면 상황은 완전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힘이 아닌 믿음으로 다스릴 때, 이스라엘의 정치는 최강이 되어 천하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나라의 근간이 되면서 어떻게 되던가요? 북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고 남 유다는 70년간의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왜요? 힘의 나라는 사32:6-7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보세요!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그러니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8절을 보세요! 존귀한 자로서, 힘이 아닌 말씀이 힘인 자신으로써, 그들은 항상 존귀한 일, 즉 롬12:14-20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대로 이젠 순종할 수 있는 복된 자, 지혜로운 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자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린 어떤가요? 어느 쪽에 있나요? 아직도 말로 믿고 실제로는 여전히 힘을 따라가는 즉 자기의 유익만 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친일파 놈들이나 일본 놈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믿기에 하나님을 말로만 믿지, 마음으로는 거리가 멀다는 말씀처럼 자기의 그 속은 아직도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요2:22의 말씀을 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믿게 되므로 인하여 주님과 제자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분과 밀접한 관계, 가까운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을까요? 말씀을 주신 그분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을까요? 당연히 아멘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선택인데, 힘을 택하므로 지금 세상은 도탄에 빠져서 도무니 내일이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과 의가 무너진 지가 너무나 오래 되어 이젠 절망 상태가 된 것을 다 알고 있기에 그래서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그분에게 매일 전심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만약에 매일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고 있다면, 이건 매국노, 일본 놈들과 손을 잡은 간사하고 간악한 자들과 다르지 않은 자신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과 의가 무너지면서 자유와 평화와 그리고 인권이 유린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성도된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면, 또는 이 문제로 날마다 하나님에게 나가서 도움을 구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사32:9-11에서 지적하는 안일한 부녀, 염려 없는 부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심과 방관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무서운 죄이기에 사32:12-14을 보세요! 그날 다 판가름 받으면서 가슴을 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차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공의로 통치하시고 방백들은 정의로 다스리기에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가 하면, 사32:15-20입니다.
15절부터 봅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렇게 놀라운 사32:3-8의 말씀이 가능했던 그 이유는, 아니 변화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는 바로 위로부터 영이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행2:1-4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임하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아름다운 밭이 숲으로 여기게 된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쓸모없는 땅이요 그래서 황무지였지만, 은혜를 입게 되면서 아름다운 밭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산하는 가치 있는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정도가 아니라 아름다운 밭이 숲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입은 자녀들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니 이보다 아름다운 거창한 숲이 있을까요? 은혜가 가득한 자녀들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점점 모이게 되면서 어떤 풍성함과 아름다운 믿음의 숲이 될까요? 아니 단지 두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아 오직 한 목표로 향해도, 어떨까요? 부족하고 연약할 수 있을까요? 그 반대일 것입니다. 막강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18:19-20를 보세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은혜를 입은 두 사람이 합심해도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꼭 많아야 맛입니까? 물론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많아지면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숲이 되면서, 그 숲으로 인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까?
16절입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정의와 공의가 그 광야와 아름다운 밭에 임한다고 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세상이 됩니다. 모두가 연합하여 한 목표로 향하니, 악의 세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17-18절을 보세요!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런데 별안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19절입니다.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복은 환란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사야서의 특징 사상으로, 이점을 주지시키면서 고난의 가치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속의 말씀으로 인하여 언제나 승리와 복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승리와 복이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20절에서 알 수 있는데 말씀을 봅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라” 광야가 아름다운 밭과 숲으로 만들어지는데 만들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입니다. 그 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비입니다.
시65:8-13입니다.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땅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그 비로 인하여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씨를 뿌리게 되고 그리고 소와 나귀를 동원하여 땀을 흘리면서 가을에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참된 복이요 가치 있는 아름다운 승리가 아닐까요? 믿음의 땀은 복이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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