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1/05/2025 이사야 33:1-24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1/05/2025 이사야 33:1-24

PastorYK 2025. 1. 6. 14:14

말씀: 사33:1-24                                           

제목: 하나님은 영원한 나의 편 

 

 

예수님께서 오시고 2024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2025년을 시작하는 새해의 첫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측량할 수 없도록 약속하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 이 점에 대하여 일일이 다 보여주시면서 차곡차곡 쌓아두신 그간 모든 은혜가, 수많은 하나님의 복된 손길들이, 성경 말씀과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들의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그 사실들을 두 귀로 들으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2025년을 이 복된 길을 놔두고 망하고만, 이름 없는 부자의 전철을 또 밟으려고 한다면 한해의 시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쉽지 않은 거친 신앙의 여정이지만, 그럴지라도 우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 기회는 언제나 있지 않기에, 하루하루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올 한 해도 우린 주님과 함께 ‘2025년 이 한 해를’ 비록 힘들고 거칠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내 편이기에’ 성도된 우리들은 믿음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도 후회 없는 부끄러움 없는 2025년, 칭찬을 받고 기쁨이 가득한 풍성한 믿음의 수확을, 거두시는 2025년이 되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드립니다. 그간 이미 살펴보았지만 구약 내내 이스라엘이 잘한 짓이 얼마나 되던가요?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을 잘 했던가요? 특별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온 백성들이 심지어 제사장까지도 다 멋대로 행하였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구약 내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했었지만, 하나님께서 사33장을 통하여 어떤 말씀을 또 다시 하시던가요?

 

먼저 간단하게 사33장의 내용을 간추려 봅니다. 1-6절에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을 대적하는 세상 세력에 대한 저주와 남 유다 구원에 대한 간구 및 구원을 예언하고 있고, 7-16절에서는 택한 자들을 대적하는 세상세력에 대한 멸망과 택함 받은 자들에 대한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21절에서는 구원의 결과로써 예루살렘의 모든 불의가 사라지고 견고한 평화와 안정을 이룰 것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24절에서는 남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난파 직전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회복이 이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 편임을 또 확인하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요? ~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남은 자들의 편입니다. 아니 한 몸이고 한 마음이 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이 필요했고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결국 이방인이었던 우리들까지도 하나님과 한 몸과 한 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하여 세우신 이스라엘을 보면 그 과정이 어떤가요? 이미 망하고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는 어떤가요? 실제로 남 유다의 그 꼴을 보면, 망해야 되는데 남 유다가 망하지 않고 남 유다에게는 계속해서 회복의 말씀을 유지하시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남 유다 편입니다. 즉 남은 자들의 편임을 알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고 나의 편이라는 말씀입니다. 나하고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포기를 할 수 없으셨고, 결국 회복의 복, 구원과 승리의 복을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내셨습니다. 이건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요 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만세전의 비밀이었던 그 구원 계획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건 정말 거짓말 같은데 사실이었습니다. 무명한 것들을 유명하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욕을 먹어야 되는 우리들을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악하기에 끝이 없었는데,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 아닙니까? ~ 

 

우린 사33장의 예언된 이 약속의 말씀만 보아도 허풍과 허위가 아닌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 실은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사33:2에서 알 수 있는데,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린의 구원이 되소서” 이 말씀 이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남 유다를 공격한 앗수르가 어떻게 되었나요?

 

사33:3-4입니다.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만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황충이 떼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이 말씀 그대로 하루 밤 사이에 연합국이었던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남 유다를 공격했다가 몰살을 당하면서 패하고 만 것을 우린 왕하19:34-35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과 허풍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승리와 패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한 남 유다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배한 앗수르에 대한 이 말씀은 이 두 나라에게만 제한 된 사건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패배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33:1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봅니다.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인과응보입니다. 결국 망합니다. 당시 초강대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주전 605년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망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을 보면, 왕하19:20-28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같이 되었느니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앗수르에 대한 말씀을 한 곳만 더 봅니다. 사10:5-14입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앗수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잘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결국 그 교만으로 인하여 완전하게 망했는데, 그러나 남 유다는 어떤가요? 남 유다도 망한 앗수르 하고 전혀 다르지 않았지요! 아니 더했습니다. 남 유다의 그간의 행보를 보면 거의 다수의 왕들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까지 하고 특히 므낫세 왕은 아들들을 불에 태우기도 했기에 당연히 멸망 받아야 했지만, 언약 때문에 바벨론의 3차 공격을 받고서도 망하지 않고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약속대로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를 향하여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늘 하나님께서 피난처와 요새와 반석과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남 유다를 하나님의 편으로 항상 여기고 계셨습니다. 왜요? 만세 전에 약속하신, 약속된 그분이 유다 지파에서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는 멸망을 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돌아온 남 유다를 통하여, 약속의 그날, 유다 지파에 속한 그분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게 됩니다. 

 

먼저 창3:15에서 예언되었던 여자의 후손이 바로 그분을 의미합니다. 

 

창49:10에서도 지팡이인 규(홀-scepter)가 바로 그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7:14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9:6-7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11:1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한 것이요” 

 

사32:1입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다 유다 지파에서 오실 그분인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고 그리고 약속대로 그날, 그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몸인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으로 오시면서,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완전한 긍휼을 남은 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 긍휼하심에 대하여 사도 바울을 통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롬11:25-32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롬11:33-36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다메섹으로 성도들을 잡으러 가는 도중에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난 바울 그는 어떤 인물이 되게 하시던가요?

 

딤전1:12-17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 

 

신앙의 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을 알게 된 바울은 결국 all in 합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자그만치 로마서를 비롯하여 13권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최고의 주님의 제자로써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행보도 보면, 결국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행9:15-16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자! 그렇다면 이 은혜를 바울도 입었고 우리들도 입었고 나도 입었는데, 하나님께서 늘 우리 편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아닌가요? ~ 사33장의 이 약속을 이루어주시려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늘 우리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편을 들어주신 그 은혜로 힘의 사울도 믿음의 바울이 되어 all in를 하면서 지금까지 우리 모두에게 무엇이 신앙인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눅16:19-26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두 사람의 결과를 보세요! 이름 없는 이 부자하고 거지 나사로는 게임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결국 이 이름 없는 부자의 완전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 없는 그 미련한 눅16장의 부자가 되고 싶어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던가요? 부자가 되게 해 주시면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합니다. 가난하면 주님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찌 천지를 주관하시고 흑암도 가릴 수 없는 천지를 밝히시는 빛의 하나님을 조롱할 수 있나요? 이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어떤 고백과 찬송이 터져 나와야 될까요? 

 

시145편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1절과 21절만 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로 시작해서 마지막인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이렇게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을 송축하기에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나요? 아니면 그렇지 못하여 무서운 책망을 받고 있나요? 그러면 안 되기에 사32:6-7을 또 봅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여기에서의 그 미련하고 우둔한 인물이 바로 자기인 것은 아닙니까? 지금 이 못난 짓을 하면서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욕보이고 있는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은 아닙니까아직도 무엇이 복인지 몰라 이름 없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몇 년 째 듣고 계십니까? 얼마나 들어야 힘의 자기를 포기하고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 긍휼하심이 끝이 없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려고 합니까? 진정한 승리자는 어떤 고백을 합니까?

 

시146편입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면서 나타나는 나의 신앙고백이 146편이 되어야 하는데, 어떤가요? ~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지혜를 고백하고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인지상정이기에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서는 아무 관심도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처지가 거지일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거지 나사로가 현실의 손가락질과 조소와 조롱까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만이 자기의 소망이요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시기에 그러는가?

 

사33:5-6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우리들에게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대로 충만하게 하시고 평안을 주시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을 넘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성도의 찬양은 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146편의 시편기자처럼 하나님만을 평생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그들은 그 어떤 귀인들도, 도울 수 없는 그 어떤 인생들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소망과 도움이 하나님이었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이 간증을 이렇게 영원히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린 무엇을 남겼나요? 자기의 그간의 행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 

 

성도라면,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되는 성도라면, 이런 고백이 자기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시84:9-12입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성도라면 사모할 곳이 이 세상의 아름다운 궁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를 더 사모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기쁨은 주님이 없는 이 세상에서의 멋진 곳, 즐거운 곳, 아름다운 어떤 곳, 또는 화려한 크루즈 여행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면 그곳이 최고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아프리카나 남미나 인도처럼 최악의 가난하고 열악한 곳에서의 삶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놀라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매일 듣고 있고, 그분에 대한 성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몰라, 늘 쩔쩔매고 있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누구는 하나님께서 화평과 영원한 평안과 안전을 누리라고 주신 구원인 것을 알기에 그래서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영원한 승리의 복을 열심히 쌓아가고 있고, 그에 반하여, 누구는 스스로를 저주하고 스스로를 포기하면서 불평과 원망과 뜻을 거역하며 재물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못난 자들의 그 행보를 보면, 정말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깊은 탄식을 하게 됩니다. 왜요? 어리석음을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기에, 우둔한 자를 존귀한 자라고 하는 자들이기에, 어리석기에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서슴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속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불의를 품고 간사하고 패역한 말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배고픈 자를 더 베고프게 하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이 없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사33:1을 다시 보세요!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악인들이 저지른 그 모든 죄악에 대하여 하나도 눈감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자기가 저지른 그대로 고스란히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어떤 내일이 기다리던가요? ~ 은혜를 입은 자들은 존귀한 자로써 존귀한 계획을 하고 존귀한 일에 관심이 있기에 위험한 처지에 놓일지라도 즉 앗수르가 공격할지라도 사33:2에서 알 수 있듯이, 큰 위기에 놓였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간절하게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할 때, 외면하던가요?

 

아니요!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됨을 사33:3-4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되었나요? 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최강국이 남 유다의 도움이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약속된 존귀한 자들에게는 완전한 승리를 주시기에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사33:6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나의 편이 되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보배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배가 되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런 어리석음은 없습니다. 어찌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는데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기의 편이라는 것에 대하여 오해하면 안 됩니다. 

 

2025년에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시므로 나의 보배, 우리의 보배, 산돌교회의 보배가 되시기를 바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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