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0/13/2024 이사야 21:1-17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0/13/2024 이사야 21:1-17

PastorYK 2024. 10. 14. 09:08

말씀: 사21:1-17                                           

제목: 바벨론, 두마(에돔), 드단을 통한 예언-결국 가장 소중한 것, 가장 부러운 것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끝은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결국 멸망입니다. 이건 만고불변인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소망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무엇을 가장 바라보아야 하고, 부러워해야 할까요? 여전히 역시나 돈, 재물인 부입니까? 아마도 아니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 거의가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부를 원하지 않을 사람은 전 역사를 통하여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부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부자들은 부에 만족하지 못하여 어떤 선택을 하던가요? 명예를 가지려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나름 무엇인가를 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목사가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에서도 보면 알 수 있는데, 잠22:1입니다. “많은 재물보다는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부한 그 세상 사람들이 그 명예로 만족하던가요? 만약에 어떤 부자가 정치로 세상에서 명예를 얻게 되면, 그들이 그것으로 만족하여 더 바라지 않던가요? 거의가 더 큰 정치인이 되고자 합니다. 큰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려고 욕심을 부리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큰 부자가 병에 걸려 약이 없어서 죽게 되었다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건강한 몸일 것입니다. 장수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렴치한 부자들은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심지어 건강한 어린아이의 피까지도 수혈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이 죽을병에 걸리면, 어떨까요?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최고의 의사가 아무리 많은 돈을 요구하더라도 아니 주더라도 자기 몸을 그 의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심지어 부자들이 오래 살고 싶어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나중에 치료약이 나올 수 있기에, 어떤 부자는 냉동전문회사에 수십만 불의 돈을 주고 자신을 냉동 보관해 두는 경우도 지금 있습니다. 나중에 과학이 발달이 되면 당연히 치료할 수 있는 대안이 나올 수 있기에 그래서 자신을 냉동시켜서 보관하고 있는 것만을 보더라도, 어떤가요? 얼마나 인간이 미련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들 어디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까? 부, 명예, 건강인 장수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everything입니다. 

 

그러나 사21장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다 멸망한다’입니다. 다 죽습니다. 다 버림을 받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운명에 놓인 인간으로써 무엇이 가장 큰 소망과 부러움이 되어야 할까요? 여전히 부자가 되는 것이요, 최고의 큰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백 년 또는 수천 년간을 큰 부와 건강함으로 장수하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자기가 만약에 그렇게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은 그 다음의 소망과 부러움이 사라질까요? 없어질까요? ~ 분명할진데, 그렇게 되어도 그렇게 된 다음에 역시나 또 다른 어떤 욕망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족하는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구원입니다. 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일까요? 그 종말이 불쌍하기 때문인데, 불쌍도 불쌍이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신 믿음이요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현실 안에서는 영원한 만족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성경을 통하여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 순종으로 부, 명예, 장수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를 확보하여 영광스런 내일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신비한 나라,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사11:6-9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기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세상말로 무릉도원입니다. 지금 제가 이런 말씀을 왜 합니까? 교회가, 성도들이 멸망을 당하는 그 힘의 삶, 현실의 부와 명예와 장수를 위하여 여전히 all in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힘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한심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가치관이 달라도 아주 다릅니다. 완전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던가요? 모두가 원하던 그 재물, 세상의 권력인 힘, 건강한 장수의 틀에서 벗어나서 오직 거룩함이 삶의 목표입니다. 그 거룩함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기심, 자랑, 힘, 욕심, 장수의 삶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멸망의 길, 힘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어느 길로 간다고요? 

 

현실의 자랑과 부를 다 포기하고 오직 내일을 준비합니다. 사라질 현실의 기쁨, 자랑, 힘을 포기하고, 다 버리고 그 대신 영원한 기쁨, 자랑, 승리를 약속한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성도들은 영원한 행복과 승리를 위하여 곧 사라질 현실의 기쁨과 자랑과 힘을 포기합니다.

 

왜요? 눅16:19-25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현실의 기쁨, 자랑, 힘에 속아 내일을 준비할 수 없었던 그래서 현실을 즐기던 부자 청년은 영원한 저주로 버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했을까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거지 나사로는 현실의 기쁨, 자랑, 힘에 속으면 어떤 심판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현실의 기쁨과 자랑과 힘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진리를 모르던 부자 청년은 저주의 절망에 영원히 갇혔지만, 나사로는 지금도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리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요? ~ 여전히 세상에서의 부자가 되고 싶나요? 그렇다면 그는 저주의 boundary에 영원히 속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해서 그 거짓됨을 막아주시려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힘의 인간의 만족은 영원히 헛되기에 그래서 영원한 만족을 거머쥐게 하시려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히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은 더욱 타락하게 되기에 아니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더 괴로움이 생기기 마련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다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19:16-26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 청년에게 세상의 재물을 포기하라고 하셨지만, 그는 믿음이 없어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하시면 어떤 선택을 하실 것입니까? ~ 아직도 여러분들은 참 행복이 현실의 부와 힘과 건강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속지 마세요! 진정한 행복은 순종할 때, 주십니다. 어떤 순종입니까? 세상 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썩어질 현실의 부와 명예와 장수에서 묶이지 않고 벗어나, 자족할 수 있게 되는데,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 만약에 무엇인가 더 가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신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미워하고 불평하면서 다툼과 근심이 있다면 아직 그 복된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복과 승리는 거지 나사로처럼 다 내려놓았을 때, 이사야 선지자처럼 다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섰을 때에만 얻게 됩니다. 우린 이제 살펴 볼, 사21장의 말씀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사21장의 해변 광야인 바벨론과 두마와 아라비아 드단에 대한 말씀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살펴보면서 더 큰 믿음과 큰 사랑을 확보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바벨론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벨론이 메대 바사의 침공으로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47:5-8입니다.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교만입니다. 최강이었던 바벨론이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사21장에서 바벨론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교만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리적 여건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줄기로 둘러 쌓여 있었기에 사21:1에서 해변광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깐, 큰 두 강의 둘러 쌓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바벨론의 조건은 천연적 요새가 되었기에 다른 나라들의 침략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고 그리고 두 강을 끼고 수운을 통한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바벨론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조건이 더 나은 나라로 발전,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어떤가요? 무엇이 복인지 아시겠습니까? ~ 여러분들이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순종할 때까지는 이 이사야 21장의 말씀으로 간섭하시면서 왜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고 또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21장을 통하여 바벨론이 멸망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전혀 다루지 않으면서, 멸망시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침략군의 위용만을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요? 그 이유는 1. 바벨론의 멸망이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2. 그렇게 강했던 바벨론 제국조차도 순식간에 멸망시키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키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3.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 적대적인 세상 나라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결국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게 된 성도들이라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21장 그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세력에 대적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은 신흥국가로써 눈에 띨 만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앗수르의 그 사악한 모습하고는 비교되는 아주 신사적인 나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39:1-2를 봅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 대하여 이런 예를 갖추고 있었던 신흥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예언을 하셨는가 하면, 무시무시한 심판을 바벨론에게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악했던 앗수르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결국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책망을 하던가요?

 

왕하20:12-18입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믿을만한 신사적인 바벨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예언대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믿지 말아야 되는데 믿고 다 보여주었지만, 나중에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말처럼 교만한 바벨론의 침공을 남 유다는 주전 605년, 주전 597년 그리고 주전 586년에 걸쳐서 3차례의 공격을 받고 예언한 대로 남 유다는 결국 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은 사21장에서의 바벨론 멸망입니다. 사21장에서 바벨론은 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전700년경의 사21장에서 주전 539년에 바사의 공격으로 망할 바벨론을 예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요? 당장 앗수르의 공격으로도 정신이 전혀 없는데, 160년 후에 있을,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바벨론의 멸망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장의 앗수르의 침공도 막지 못해 두려워 떨고 있는데, 그래서 애굽의 도움을 받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전700년경에 주전 539년에 메대 바사의 침공으로 바벨론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환상, 160년 후의 있을 환상을 보여주시니, 이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그리고 더군다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나서는 왜? 이렇게 괴로워했던 것일까요? 앞으로 세워질 강국 메대와 엘람인 바사에 의하여 교만했던 바벨론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참담하게 멸망을 당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160년 후의 있을 사건이었지만, 사21:3-4에서 이사야 자신이 임산부처럼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특히 이 바벨론이 100년 후에 있을 바벨론의 남 유다 침공, 그것은 남 유다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힘을 따라가므로 인한 바벨론의 심판을 격하게 받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 사실을 왕하25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심하게 고통스러워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지금 우린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까? 늘 당장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100년, 160년 후의 예언 말씀을 보고서는 얼마나 괴로워했던가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사야의 괴로움을 이렇게 성경에 영원히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그 예언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 심판을 받을 바벨론은 어떠했던가요?

 

사21:5입니다. “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면,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곧 망하게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 바벨론의 힘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정신없이 파티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뒤늦은 깨달음을 받고 놀라, 자신들의 방패에 기름을 칠 하면서 전쟁 준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만했던 바벨론, 교만함으로 곧 망할지경인데, 환란과 쾌락에 빠져 있던 그 바벨론을 밝히면서 이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며 조롱하고 있는 말씀이 사21:5입니다. 이 교만한 바벨론이 누구의 모습인가요? ~ 

 

지금 우리도, 망하기 직전인데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나요?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던가요? 교만함으로 조롱과 조소를 당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만, 바벨론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만하고 미련한 이 바벨론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더 이상 늦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힘을 따라가지 마시고, 무엇을 위한 시간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 땀이어야 하는지, 점검하시고, 내일의 영원한 승리를 준비하는 복된 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21:6-10의 말씀을 봅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낙타 떼를 보거든 귀를 귀울여 자세히 들으라 하셨더니, 파수꾼이 사자 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보소서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이 말씀은 묵시의 예언이기에 당장 파수꾼을 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준비를 하라는 뜻에서 파수꾼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있을 심판에 대한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일도 다 준비를 해야 됩니다. 준비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준비는 승리와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내일의 승리를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 믿음이요 구원인데, 지금 우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

 

만약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이 주야로 말씀 묵상과 기도의 삶을 유지하지 않고 있다면, 사21장의 말씀에서 조롱과 조소를 당하다가 멸망을 당했던 힘의 바벨론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파수꾼을 세우는 이유는 불시에 공격하는 적군의 공격을 막아, 나라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파수꾼을 통하여 힘의 나라는 결국 바벨론처럼 망하고 만다는 것을 사21:6-10의 말씀처럼 알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되면 세상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에 그래서 자신이 늘 깨어 있는 파수꾼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눈을 팔거나 졸거나 자기 자리를 굳게 지켜내지 않으면결국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영적인 악의 세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오직 믿음의 눈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린 육의 싸움을 하는 자들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도 싸울 수도 없습니다. 아니 일초, 일전도 자기 것의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오늘도 망한 바벨론을 통하여 교훈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셔야 사랑하는 가족도, 좋아하는 친구도, 즐기는 오락까지도 다 지켜낼 수 있습니다.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다 잃게 됩니다.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망하게 된 힘의 바벨론을, 사21:6-10처럼 세운 파수꾼이 보고나서 그 사실을 알려 주므로 하나님의 예언은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말씀만큼 완벽한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나의 산성이요 방패요 큰 바위요 피난처가 되지만, 세상의 재물과 지식과 명예로는 일초일전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말씀을 봅니다. 사21:11-12입니다.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 

 

두마는 에돔을 대표하는 성읍입니다. 이 에돔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단지 에돔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에돔을 통하여 세상 전체에 대한 경고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저지른 죄로 멸망하게 되겠지만, 파수꾼을 통하여 에돔이 즉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즉 이들의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있는데, 그 뜻의 이해를 위하여 미3:6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납이 캄캄할 것이라” 

 

죄악으로 인한 어두움이나 심판을 상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선지자여! 언제나 이 고통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의 날이 오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12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일시적인 평안도 잠시 있겠지만, 결국 바벨론에 의하여 다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참 평안의 아침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파수꾼을 통하여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린 어떤가요? 자신이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말씀을 모르면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안 됩니다. 말씀을 모르면, 눈으로 보지만, 볼 수 없고 귀로 듣지만, 들을 수가 없기에 안 됩니다. 성도에게 말씀은 기업이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21:13-15의 말씀을 봅니다.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데마 땅의 주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드단과 데마는 아라비아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 작은 도시인 데마를 한 때 바벨론이 점령 했었고,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가 이곳에 수도를 세우기도 했는데, 그런데 이 도시가 망할 것이라고 사21:13-15에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왜요? 그곳에 살던 데마 사람들이 바벨론을 상대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시나 그들이 큰 돈을 벌게 되니깐, 겸손해 진 것이 아니라 힘의 도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강자 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데마 주변에 살던 드단 사람들이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도망 쳐야 했는데, 데마 사람들이 도망치던 드단 사람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바댜1:10-14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이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도망갈 때 도와주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데마가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부는 행복과 승리를 만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교만하면 그 교만이 작은 도시에서 일어났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알게 하십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21:10을 또 보세요! 내가 짓밝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듣고 순종할 때까지 듣고 보고 돌아올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마지막 말씀입니다. 사21:16-17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게달도 아라비아의 지명입니다. 그들도 주로 바벨론을 상대로 하여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게달도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게달의 장수들이 침략자를 막기 위해 싸우다가 많이 죽어 그 수가 적게 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부가, 돈이 힘이 되면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왜요? 돈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돈을 가지고 돈으로 즐기다가, 돈의 노예로 살다가 죽어 지옥을 가더라도 돈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가감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이 풀지 아니하고 억지로도 풀지 아니하고 듣고 본 그대로 전하는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듣고 본 그대로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말씀으로 더 큰 믿음을 갖게 되고 더 큰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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