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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2024 이사야 19:1-25 본문
말씀: 사19:1-25
제목: 애굽의 심판과 회복에 대한 예언
지금 우린 어떤가요? 여전히 망하는 길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습니까? 내일이 없는 절망을 향하면서도 나는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거짓된 확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애굽은 아브라함 때부터 그리고 애굽에서 세워진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그 역사와 유다가 바벨론에 공격을 받고 주전586년에 망할 때까지 이스라엘을 보면, 애굽은 이스라엘하고는 여러 가지로 깊은 관계를 맺으며 내내 이어졌던 나라였습니다. 특히 애굽을 많이 의존하기도 했었기에, 예루살렘이 망한 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들어가 회당을 세우기도 했었고, 주전 3세기경에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초대 교회 때 가장 중요한 성경 역본이 70인역인데, 바로 이 70인역을 애굽에서 유대인 학자 70명이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당시 세계 공통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했던 곳입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애굽과 유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때에는 기독교가 가장 번창했던 곳도 애굽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 나라는 긴 역사를 가지고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사19장에서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유다가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심히 어렵게 된 처지였을 때, 왜 이사야가 애굽의 멸망을 그때 예언하는 것일까요? ~ 물론 그 당시 온 세계가 사납고 악했던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하여, 다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남 유다 역시도 그간 믿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나라는 애굽 외에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가 애굽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애굽의 멸망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망할 애굽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기에 사납고 악한 앗수르를 멸망시킬 만군의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신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는 어떤 선택을 했던가요?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는데, 사30:1-2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망할 애굽으로 사신을 보냈던 것입니다. 애굽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을 그렇게 해 주시는데도 믿지 않고서는 애굽의 도움을 청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대책 없었던 남 유다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그들은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했던 남 유다였습니다. 죄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을 미련의 극치로, 어리석음을 최대로 끌고 가게 합니다. 이런 남 유다였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다윗하고의 약속 때문에 끝까지 보살펴 주셨던 것입니다.
하여튼 오늘은 남 유다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서 여기까지만 하고, 애굽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사19장의 본문을 보셔서 알겠지만, 사19:1-17의 말씀에서는, 애굽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받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쇠퇴 예언과 18-22절에서는 그 고통으로 인한 두려움과 회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23-24절에서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그날 하나님의 구원자의 도움으로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고 세계 중에 복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회복과 반전의 말씀을 또 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일한 패턴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마찬가지로.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고 온 인간 역사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 만군의 하나님에게 항복하고 순종하고 경외하라! 이것이 복이고 승리고 지혜라는 것을 다시 또 밝혀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을 하신 다음에 나중에 보니깐, 정말 약속하신대로 최강의 앗수르를 망하게 하시더니 구스도 애굽도 남 유다도 다 회복시켜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복되는 말씀이 구약인데, 이 반복되는 예언이 단지 반복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들이 일이년 후에 이루어지면 그 확인이 되겠지만 700년 후에, 1800년 후에 이루어지는 예언은 사실 어떤가요? 그 약속의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보고 확인이 되지 않기에 이미 죽어 흙이 되어 있는 자신이기에 하나님을 현실적으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약속의 하나님, 신실하신 그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순종할 수가 있을까요? 확인이 된 자들에게만 가능할 것인데, 그럼 누가 자기의 두 눈으로 보고 그 약속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그날이 되면 하나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약속의 하나님이 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던 그날, 다 이루어졌어도,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만 알 수 있어요?
요5:25, 28입니다.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성령이 임하시는 그날, 오직 듣는 자가 듣고 살아납니다. 그럼 누가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요? 야곱의 자손들만이 듣고 살아나게 되고 그 약속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인데 그 남은 자들을 성경에서 어떤 자라고 하십니까?
고전2:6-16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 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날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듣고 보게 된 그들이 바로 새롭게 된 자, 중생된 자,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죽어서 몸이 썩어 없어졌을지라도 영은 영원히 존재하기에, 또는 살아 있지만 영이 죽어 있어서 그래서 진리를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그날, 몸이 썩어 있던 자들의 영들이 듣게 되어 살아나게 되면서 낙원에 이르게 되고, 몸은 살아 있지만 영이 죽어 듣지 못하던 자들은 그날, 듣게 되어 중생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약속들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확인이 되는데, 그 확인이 될 수밖에 없어야 되는데, 그 확인이 된 성도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어떤 목표를 가질까요? ~ 분명 순종하게 되고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동행할 텐데, 보았고 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코 헛되고 거짓된 세상의 힘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에게 항복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세상의 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19장에서도 알 수 있지만, 지금 현실도 보세요! 안전합니까? 절망입니까?
사19장에서의 말씀하시고 계시는 애굽의 그 참담한 처지가 1-17절에서 확인이 되지만, 힘을 위한 우상숭배로 애굽은 절망이었습니다. 그 절망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절망상태가 되는 것은 애굽, 앗수르, 남 유다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 길도 큰 고통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가 다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망의 애굽에게 어떤 회복을 약속하고 계십니까?
18-2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날, 하나님에 의하여 남은 자에 대한 회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서로 교통하며 연합하는 날이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700년 후에 약속하신 그대로 그 회복은 그날부터 곳곳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144,000명이 확보되는 날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 간의 연합과 화목도 이루어가다가 예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시는 그 날에 각 나라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11-22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고 고전12:12-20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이젠 한 몸이 되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어떤가요?
고전12:26-27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에 같이 움직이고 같이 느끼고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돈? 능력? 실력? 권력? 아니지요! 고전13장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들이 알고 있던, 남녀 간의 느끼던 그런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고전13:1-7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 바로 고전13장에서의 말씀하시는 사랑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과 화목을 위하여 우린 사랑의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길로 자기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성도의 운명은 은혜로 말미암아 삶의 방향과 목표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 회복이 성도 자신에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복된 운명이기에 사19:19-25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버려질 애굽이, 그날, 회복이 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요? 성령의 영이 임하시는 그날 애굽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앗수르까지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계십니다. 우상의 애굽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환란을 당할 때,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 속에 그날 애굽을 구원하여 주시면서, 애굽만이 아니라 당시 애굽과 앗수르와 그리고 이스라엘, 이 3 나라가 서로 교통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이 3나라를 세계 중에서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고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어떤 뜻이 함축되어 있나요? 세상 나라들의 타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그날이 되면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반전과 회복의 기적을 그래서 약속의 하나님에게 경배하는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곧 침략할 앗수르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남 유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당시 애굽과 앗수르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일까요?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연합과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임을 우린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앗수르도 두려워하지 말고 세계의 화목과 화평을 이루실, 원수까지도 품어 살리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사19장에서 무엇보다도 반전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성경 전체가 그렇게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작부터가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인하여 쫓겨나게 되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창3:15의 말씀을 주시면서 에덴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약속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frame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다시 또 말씀으로 알게 하십니다. 본향으로, 자기의 것으로 완전하게 돌아오게 하는 희년을 통하여 알 수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도 타락하여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다 끌려가게 되지만, 다시 70년 만에 즉 희년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오늘 사19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망할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이 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사명을 받고 보내졌을 때, 그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기에 그래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들인데, 본다고 하고 들을 수 있다고 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에,
사6:8-10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그래서 너 이사야는 가서 그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라는 사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떤가요? 그들이 은혜를 통하여 진리를 결국 보게 되고 듣게 되게 하십니다. 야곱의 자손들이, 남은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좌절에서 기쁨이 되게 하시고 원수에서 친구로 이어지게 하시고 죽음에서 부활로 이루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실망, 절망, 낙심, 아픔과 슬픔, 가난, 병 그 모든 힘든 조건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를 여기서 건져 내일의 승리자가 되게 하시기에 그래서 감사 찬송을 드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린 끝까지 자기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야 되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은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고후10:1-6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의 심판은 보복과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회복과 신앙의 깊이를 깊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열방에 대한 심판에 대한 이 말씀을 가볍게 또는 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성도 된, 우린 무겁게 느껴야 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대할 수 있어야지, 역사와 역사 속에 살고 있는 각 개인의 실존과 가치에 대하여 소중하게 여기면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히 사19장의 예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세계의 평화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북은 앗수르가 남은 애굽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기에 그 사이에 낀 이스라엘이 믿음이 아니라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할 땐, 이 두 나라 사이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늘 심한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요? 당시 원수관계로 있던 두 나라인 애굽과 앗수르가 군사력이 아닌 즉 힘이 아닌 하나님에 의하여 즉 신앙의 힘으로 연합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날이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과 평화가 이루어져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증명은 무엇으로 확인이 가능하던가요? 부부가 믿기 전에는 평생원수이었지만, 평생원수였던 그 부부가 그리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가까운 영원한 친구가 되어 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을 상종도 하지 않았던 원수관계였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이라는 한 목표를 가지고 연합을 서서히 이루어가는 그 회복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진데, 어떻게 교회가 성도가 십자가의 길이 아닌 좁은 길이 아닌 넓고 넓은 세상의 길, 세상 성공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론입니다. ‘불순종이 결코 그 끝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온 인류를 불순종으로 묶어버리시고 나서는 사망을 부활로, 좌절을 소망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엎어 버리시고 마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불순종으로 망했던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열방들이 회복이 되어 돌아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라’에서 결국 ‘듣게 하시고 보게 하셨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과 회복입니다. 참 인간 지혜로써는 이해가 될 수 없는 반전입니다. 고전2:1-8에서 확인이 되듯이,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만이 이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지혜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증명도 결과도 되지 않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우린, 우리들의 현 갈등, 절망 실패 아픔 고통이 거룩한 일을 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현실은 늘 절망이어야 하고 한탄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궁극적인 숭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영원히 찬양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좌절에서 그 아들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주셨듯이 그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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