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Philistines
- 사사기
- 자기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산돌한인교회
- Living Stone Korean Church
- 홉니와 비느하스
- Hophni and Phinehas
- Ruth
- Ruth 1
- saul
- Ruth 2
- 1 Samuel 2
- David
- 다윗
- 룻기 1
- 사무엘
- 보아스
- 룻
- 사무엘상 2
- 엘리
- Naomi
- 나오미
- They Did Which Was Right In Their Eyes
- Samuel
- 1 Samuel
- 사울
- Judges
- Eli
- Samson
- 삼손
- Today
- Total
산돌교회
10/20/2024 이사야 22:1-25 본문
말씀: 사22:1-25
제목: 남 유다에 대한 경고
오늘도 설교 말씀을 전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믿고 살아 왔던가요? 솔직한 대답이 무엇일까요? 결코 말씀만은 아니었던 것을 저는 나름 확신할 수 있기에 그래서 실은 속상합니다. 왜 우린 이 정도에서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왜 아직까지도 말씀이 자기 삶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인가요? 물론 신앙의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하여 포기 하거나, 순종하면 당장 망할 것 같기에 그래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다가 결국 누구처럼 드러나 영원히 버려질 수는 없기에, 그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특히 지금은 구약의 율법 중심이 아니라 은혜가 넘치는 신약의 종말이기에 더더욱 우리들의 신앙은 진지해야 합니다. 진정성과 무게를 가져야 합니다. 은혜라 하여 결코 가볍게 쉽게 여기면 안 됩니다. 이는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대충, 대충 따라간다고 해서 되는 문제도 역시나 아닙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해야 합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 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요? 은혜의 구원은 그렇게 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보혈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절대 순종이어야 되지, 이런 저런 변명과 핑계가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yes 아니면 no이지 두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구약을 보면 볼수록 그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면서 이 세상에는 없는, 세상 사람들은 만들 수 없는 한 영혼, 한 영혼들을 살리는 그 복된 길을 전하는, 귀하고 아름다운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주님의 제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건 성도의 특권이요 자랑이요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어떤가요? 나는 그래서 어디로 향하고 있던가요? ~ 제발 부탁합니다. 힘으로 자기 기준으로 선택하지 마세요! 말씀이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나요? 진정한 신앙은 그 만남이 없이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사22장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그리고 또 배워서 성장하셔야 되고 신앙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아니 자기의 옛 본성인 힘의 삶을 고집하므로 망했던 수많은 나라들처럼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나아지고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힘으로 선택하고 자기 생각으로 평가하면서 스스로 자폭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신앙의 나이가 먹어 가면 갈수록 그 믿음으로 인하여 분명히 성숙해 져 가야 합니다. 나아져야 하고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나아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심판, 멸망이라는 말씀을 내내 듣고 있는 성도들이 듣지를 못하고 자기 고집과 어리석음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된다고요? 예외 없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렇게 큰 은혜를 이스라엘이 구약 내내 입었지만 어떤가요? 결국 망했잖아요!
지금까지도 그 이스라엘을 보세요!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으니깐, 그 주변이 전쟁터가 되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나요? 이건 남의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되는 재앙이요 받아야 되는 저주입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지라도, 주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기 기준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던가요? 기쁨과 승리와 화목과 화평을 이루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더니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침공으로 망하고 그리고 남 유다까지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3차 공격을 받고 성전부터 모든 것을 다 잃고 바벨론의 포로로 70년간을 살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부끄러운 구약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결국 사22장의 말씀만으로도 확인이 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말씀을 듣지 못한 결과입니다. 구약 내내 수없이 돌아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온갖 보살핌과 승리를 주시면서 경고를 하고 계셨지만, 그렇게 수많은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까지 세상을 따라가던 북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하여 사라졌고 남 유다도 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그 약속 때문에 여전히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을 통하여 알 수 있지만, 약속을 받았던 남 유다일지라도 남 유다 모두 다가 아니라 그 중에서도 남은 자들만이 중생과 회복이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어떤가요? 듣지 못하므로 참담했습니다. 나라의 땅도 주권도 그리고 백성까지도 다 잃어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것이라는 그 역사적 사실을 이미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100년 후에 터질 그 아픔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망하여 모든 것을 다 잃고 포로가 되는 참담한 그 환상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그런 환상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던가요? 놀랍습니다.
사22:1-3입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이해를 위하여 설명을 드리면, 환상을 받을 그 당시, 앗수르가 남 유다를 공격했다가 앗수르 군사가 다 죽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였고 그래서 다들 지붕에 올라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들의 지붕들이 다 평평했기에, 그곳에 올라가서 잔치도 하고 기도도 하고 휴식하는 그런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기에, 승리의 잔치를 지붕에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남 유다의 내일을 환상을 통하여 보게 되었는데, 그 환상의 내용을 보니깐, 남 유다가 바벨론의 공격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22장이 주전701년경인데 그때 남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났기에 모두가 기뻐 승리의 party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보여주신 환상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이사야로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 당시 남 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서 나라의 큰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 재앙을 벗어날 수 있었기에, 그래서 소, 양을 잡아서 포도주와 함께 온 백성들이 자축하고 있었는데, 그날 망한다는 환상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요? 하필이면 왜 이날,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던 것일까요? 무슨 뜻일까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남 유다 너희들이 지금은 앗수르로부터 나라의 위기를 면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즐거워하고 있는데, 그러나 결코 착각하지 말라는 뜻에서의 망한다는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잠깐의 승리 때문에 다들 좋아 들떠서, 지붕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 너희들,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에서의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 사실, 앗수르로부터 벗어나 승리를 했기에, 그래서 잔치할 수 있었는데, ~ 그러나 영적인 문제가 감추어져 있었기에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심술을 부리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설명을 드리면, 너희들이 승리의 잔치를 하고 있는데, 그러나 100년 후에는 너희들의 타락으로, 세상의 힘을 따라가므로 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앗수르가 패배했다고 하여 너희들이 기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당장의 기쁨으로 잔치를 하던 남 유다에게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남 유다는 전혀 이 환상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환상을 듣고도 당연히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 후이면 남 유다 너희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관원들은 전쟁이 터지니깐, 도망을 치고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다가 다 붙잡혀서 포로가 되어 결박을 당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상태가 얼마나 처참했던지, 사22:4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이 얼마나 참담했던지, 그래서 가져다주는 그 비통함에 대하여 크게 격앙된 이사야의 표현인데, 이사야의 이런 반응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100년 후에 있을 이 무서운 저주의 환상은 너희들이 그때까지 잘했는데 별안간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하나님 없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했기에 그래서 주신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지금의 승리의 잔치도 어떤 잔치였다는 것입니까? 진정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믿음의 잔치가 아니라 단지 힘의 잔치를 지붕에서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망할 100년 동안도 하나님 없이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기에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주신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날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주셨지만 남 유다는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를 이사야에게 보여주시자, 이사야는 할 말을 잃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되는데 끝까지 세상만을 따라가는 남 유다였음을 다 아셨기에 그래서 다시 100년 전에 이렇게 경고를 해 주셨던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마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 믿음의 잔치를 하라! 단지 즐거워하는 의미 없는 그런 썩어질 잔치를 하지 말라! 그래서 주신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할 마음이 100년 내내 전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완악함으로 인한 파탄이 얼마나 심했을 것인지, 그래서 위로받기도 거절했던 이사야의 마음 상태를 남긴 것입니다. 우린 그 절망정도를 예레미야 애가에서 알 수 있는데, 100년 후에 결국 예언대로 이루어지는데, 자기자식까지도 잡아먹었던 것입니다. 사22장에서의 그 환상이 결국 100년 후에 현실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알아야 합니다.
왜 사1-5장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충분히 말씀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여기서 언급하시는가? 그 이유는 1. 이전부터 계속해서 심판 경고를 주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방탕해지고 있는 유다 백성에 대해 계속적인 경고를 통해 하나님만을 경외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2. 그간 수차례에 걸쳐서 열방에 대한 거듭된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유다 백성들이 자칫 오해하여 이방인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자기들만 선민임을 착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22장에서 환상의 골짜기 즉 남 유다에 관한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또 강조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구원이 혈통에 따라 차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라는 것입니다. 오직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반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역시나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과 환상을 보면서, 남의 역사로, 남의 말로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들을 보면, 어떤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수십 년간을 보고 들고 있으면서 어떤가요? 이사야처럼 순종하고 있나요? 곧 임할 그 심판을 준비하고 있나요? 그래서 늘 깨어 있나요? ~ 아니요! 놀랍게도 남 유다처럼 거의가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남 유다처럼 믿음의 잔치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잔치로 즐거워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없이 살면 내일 망하니깐, 내일을 준비하라고 하시는데, 다들, 어떤가요? 지금의 문제가, 문제이지, 내일의 문제는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지금 즐거우면 됐지, 내일의 재앙까지 왜 고민하는가?’하며, 경고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당장으로 결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라질 당장의 즐거움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장의 고민 때문에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만을 믿고 자기의 역할을 끝까지 감당하면서 심판의 날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남 유다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군사 185,000명을 하루 밤 사이에 다 죽이고 승리를 주셨는데도 그들은 단지 믿음 없는 잔치를 한 것입니다. 곧 망할 남 유다가 하루 밤 사이에 잔치할 수 있는 반전을 주셨는데,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해요? 하나님만을 경외하자가 아니라 즐거운 잔치로 만족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중요합니다. 다들 이기적이고 미련함으로 악하고 못난 선택을 하니, 다시 100년의 시간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라면 아니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승리를 주신 하나님에게 온 종일, 아니 7일 내내, 아니 7개월 내내 아니 7년 내내 아니 70년 내내, 죽는 날까지 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 찬송을 드려도 부족한데, 그래서 주신 대 역전의 승리인데, 모두가 하나님 없는 잔치를 벌이면서 즐거워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어떤 환상을 보여주셨다고요? 곧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100년 후에 환상 그대로 남 유다는 영원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현실의 만족만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사라질 그 현실 때문에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것이 남의 일이요 남의 이야기일까요? 부탁합니다. 더 이상 힘의 고집과 아집은 절대 금물입니다.
다음 말씀은 사22:5-7절입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엘람 사람은 화살 통을 메었고 병거 탄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다시 또 보여주시는데, 이번엔 이방인들인 엘람과 기르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무너지면서 여기저기에서 참담한 신음이 예루살렘 곳곳에서 들려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엘람과 기르의 공격을 받아야 했나요? 사22:8의 전반부입니다.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하나님께서 남 유다의 허물들을 드러내 주시려고 이방인들의 공격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 공격을 받고 남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약점, 허물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였던 것입니다. 이를 위한 이방인들의 공격이었는데, 남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방법만을 모색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22:8-10입니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하나님만을 경외하면서 나라가 믿음으로 지켜져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면서 경건한 길을 가야 되는 남 유다가 (1)8절에 보시면 무기고를 준비했습니다. (2)9절입니다. 저수지를 통하여 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3)10절입니다. 성벽을 보수했다고 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당연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힘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22:11의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런 준비를 한 것에 대하여 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보수요 수리요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의 이런 약점과 허물을 깨닫게 하시려고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점을 고발하시면서 이에 대한 심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시려고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알게 하시려고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게 하실 것이라는 환상을 다시 또 보여주신 것입니다. 앗수르로부터 벗어난 그날의 기쁨이 차고 넘쳐서 모두가 어쩔 줄을 모르고 즐기고 있었던 그 때에, 이런 참담한 환상을 또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성도는 ‘새옹지마’라는 옛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옹지마의 뜻은 인생의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사자성어입니다. 경망 즉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장 좋다고 좋아하고 당장 힘들다고 힘들어 하는 가벼운 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물며 성도가 내일 없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오직 오늘만의 성공과 즐거움을 위하여 남 유다처럼 살아가려고 한다면, 이건 경거망동한 것이요 성도로써 참 부끄러운 태도입니다.
성도라면, 눅21:34-36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사라질 영원하지 않는 ‘당장의 즐거움과 당장의 고뇌 때문에’ 준비해야 될 그날의 심판을 준비하지 못하여 버려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믿음이 없는 힘의 사람들은 지금 당장의 성공과 실패, 당장의 즐거움과 슬픔으로 말미암아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은 당장의 자신의 성공과 실패, 당장의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이 삶의 우선이요 다가 아닙니다. 내일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들이요 자기의 것으로 이웃을 살리는 자들입니다. 이웃의 종 된 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남 유다처럼 하나님이 없는 힘의 즐거움은 내일의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힘의 사람들은 항상 당장의 성공과 즐거움이 우선이기 때문에 오늘만 즐거우면 내일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오늘 져 주고 양보하면서, 내일의 영원한 승리를 택합니다. 사라질 오늘을 다 주고 영원한 내일을 얻어내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남 유다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여전히 힘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사22:12을 보세요!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그날 앗수르의 군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다 죽어 어쩔 수 없이 퇴각한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던 것입니다. 왜요? 다른 나라 모든 나라들이 앗수르의 공격을 받으면 모두가 다 떨었지만, 남 유다만큼은 놀랍게도 완전한 대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던 것입니다. 왜요? 자기의 힘으로 이긴 전쟁이 아닌데, 왜 자기네들이 마치 자기가 싸워 앗수르를 쳐부순 것처럼, 자력으로 이긴 것처럼 즐거워 할 수 있는가? 오히려 남 유다는 하나님께 대적을 했던 자신들인 것을 알아야 되는데 무슨 승전의 잔치를 할 수 있는가? 회개를 해야 되지 않는가?
왕하18:13-16입니다.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힘으로 해결했던 남 유다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대대적인 앗수르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서 다시 공격한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하루 밤 사이에 다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22:13처럼 잔치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까? 회개를 하고 믿음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까? 누가 주신 승리입니까?
결국 사22:14를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평생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철저한 순종과 함께 하나님만을 경외해도 부족할진데, ‘이들은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악한 모습이 누구입니까? 남 유다이지 자기는 결코 아닙니까? ~ 자기의 생각과 선택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이 악한 남 유다가 보여야 되는데, 만약에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남 유다와 같은 자기의 그 악함을 은혜로 제압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사22:15-16의 말씀을 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의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골짜기 환상을 보여주신 다음에 주신 말씀입니다. 현실에서는 앗수르로부터 얻은 승리로 다들 기쁨에 도취하여 지붕 위에서 잔치를 하고 있던 남 유다를 향하여 또 다른 말씀을 주십니다. 그 내용은 타락한 남 유다의 관리자 셉나와 엘리아김에 대하여 심판하시겠는 말씀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던 남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남 유다에서 최고의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 하면, 사22:16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국고를 맡은, 왕궁 맡은 남 유다의 최고의 고관대작이었던 셉나가 자기가 나라의 높은 권력자이었기에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자기를 위하여 아주 호화스러운 묘실을 파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높은 곳에 자기 묘실을 고급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말이 됩니까?
특히 그 당시 남 유다는 강대국에 조공을 바쳐서 힘들게 버텨야 되는 형편이었는데, 나라의 국고를 맡고 있던 최고 고관대작이 자기가 죽은 후 묻힐 묘실을 너무나 호화스럽게 준비해 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있을까요?~
그 진노가 사22:17-19에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나라의 최고 고관대작으로써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하지 못한 셉나는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맙니다. 이 사건이 남의 이야기 같나요? 나는 그 정도는 아니기에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 셉나가 화려한 묘실뿐 만이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온갖 폼을 재고 힘을 자랑하던 그 힘의 셉나가 누구와 같은가요? ~
지금 우리들도 보세요! 남들이야 어떻든 자기만 안전하고 배부르면 되고, 세상에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과시하려는 그 꼴이 그 셉나와 무엇이 다를까요? 제2의 셉나가 아닙니까?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입김에 불과한 인생일진데, 나라의 최고 관리자가 자기 힘으로 자기만의 내일을 준비했다가 그는 참담한 심판을 받고 영원히 망해 버리고 맙니다. 인간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에게 다 맡겨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는데, 힘으로 준비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보고 있으면서도 어찌 셉나처럼 자기 멋대로 뜻대로 살아갈 수 있나요? ~ 어찌 영원히 살길은 피하고 저주와 진노의 내일을 선택하려고 합니까? ~ 셉나의 이 악한 이기적이고 미련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된다는 이 말씀에서 우리 역시 알아야 합니다. 나 역시도 다 드러나지, 하나도 일도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더 놀라운 일은 셉나도 셉나였지만, 엘리아김이 또 문제가 되고 맙니다.
사22:20-24입니다.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의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리라”
셉나 대신에 그 높은 자리에 엘리아김을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필요함을 다 채워주십니다.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그에 대한 견고함도 하나님을 그 back으로 두고 있었기에 완벽 그 자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집안의 가장 작은 자까지도 그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사22:25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의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한 사람의 그 막강한 권력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쓰여 지기보다는 개인 가문의 영화를 위해서 남용되면서 그 막강했던 엘리아김도 결국 다 잃고 만다는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망하여 버려진 그 셉나를 보았고, 그 대신 받은 최고로 높은 자리였는데, 결국 엘리아김도 부패하여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경고를 하십니다. 경고를 하시면서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로써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최고 관리자로서 그 힘을 이용하여 썩을 정실정치를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신랄한 고발과 함께 받게 될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어떤가요? 아니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들도 그 자리에 가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들 공약은 멋지게 해 놓고 나서 당신이 되면, 무슨 짓을 하던가요? 처음 선거 때하는 달라집니다. 그러니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시146:1-5입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하나님만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영원히 요동하지 않고 견고할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자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의 성공과 즐거움을 위한 삶은 셉나요 엘리아김이 될 뿐입니다. 왜 세상에서도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습니까? 권력도 재물과 마찬가지로 역시 영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03/2024 이사야 24:1-23 (16) | 2024.11.04 |
---|---|
10/27/2024 이사야 23:1-18 (15) | 2024.10.28 |
10/13/2024 이사야 21:1-17 (16) | 2024.10.14 |
10/06/2024 이사야 20:1-6 (15) | 2024.10.07 |
9/29/2024 이사야 19:1-25 (15) | 2024.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