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7/28/2024 이사야 9:1-21 본문

주일 설교 말씀

7/28/2024 이사야 9:1-21

PastorYK 2024. 7. 29. 11:50

말씀: 사9:1-21                                                

제목: 믿기 전과 그 후의 나

 

 

우리들은 어떤 기억, 추억 속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추억과 기억을 수없이 만들어 가면서 살지, 기억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좋은 추억이냐 정말 영원히 잊고 싶은 아픈 추억이냐의 차이점이 있을 뿐이지, 누구든지 기억 속에서 그 기억을 추억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데 지난 추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이라면 어떤가요? 지난 기억과 함께 내일을 당연히 준비하면서 죽는 날까지도 추억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건 정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살아온 것만큼 자신의 추억은 쌓이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흑 역사건 좋은 역사건 다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떨 땐, 저 같은 경우에, 지난날의 아픈 추억이 문득 생각이 날 때, 특히 부끄러운 흑 역사의 경우에,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을 했지? 하면서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적이 없었나요? ~ 누구든지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물론 또 어떨 땐, 그 옛날에 행복했던 적을 회상하면서 그 때를 잠시 그리워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다가보면, 다들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도 귀하고 아름다운 추억만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같이 먼 여행도 하게 되고, 가능하면 자주 만나게 되고 좋은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떤가요? ~ 물론 그런 생각과 함께 결심을 하곤 했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가보니깐, 결국 생각만 할 뿐, 실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너무나 바쁘다보면, 또는 살기가 팍팍하다가 보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까지도 다 추억으로 고스란히 다 남게 되는데, 넉넉하지 못했기에 그 끝은 ‘나도 그랬었지~’ 하며 쓴 웃음으로 대신한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계획, 결심한 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랬던 적을 생각해 보면, 그런 경우까지 다 기억하는 것을 보면, 지난 일들이 생각이 나지 않을 뿐이지, 우리의 모든 과거는 사실, 영원히 다 남는다고 해야 합니다. 다 남기에 자기가 평가를 받게 될 때, 자기 과거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계20:11-15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리라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날을 위해서라도 선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복이 되는 추억을, 승리의 내일을 위하여 선하고 귀한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것 또한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모든 행보와 생각까지도 다 기록이 되어 자기가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하여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가요? 역시나, 그 준비를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알아도 안 됩니다.

 

그런데 계20장의 말씀을 전혀 모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어떨까요? 살다가 죽으면, 그래서 심판을 받게 되는 그날에는, 어떨까요? 분명할진데, 다수가 선한 기억보다는 거의가 너무나 부끄러운 과거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텐데, 남김없이 그대로 다 드러나는 그 날,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러워서 자기 스스로 머뭇거림 없이, 불속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지금 우린 어떤 추억을 만들고 있나요? ~ 정말 오늘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간의 자기의 행실을 돌아보는 오늘 이 시간이, 지난 자기의 흑 역사가 생각이 나므로 하여, 이제부터는 오직 말씀만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다가 점과 흠이 없는 자로 삶을 마감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여, 그래서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지금 제가 추억에 대한 말씀을 왜 했을까요? ~ 

 

사9장 말씀을 묵상하다가 주신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사9:1-3이 그 이유입니다. 말씀을 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어지고, 옛적에 멸시받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 그날 그 지경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흑암에 살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게 되는데, 그 빛으로 창성하게 하시고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고 추수의 즐거움과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어 탈취물을 서로 나누면서 즐거워하듯이, 그 즐거움을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5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 큰 빛으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에 대하여 밝히고 계십니다. 사9:6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야곱의 자손들에게 정사와 평강이 무궁하게 되고, 나라를 굳게 세워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복과 반전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주전 700년경에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이 700년 후에 그 갈릴리 지역에서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믿을까요?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실을 자기가 확실하게 경험한 바로 그 사람들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이건 단지 남을 통하여 들었거나, 그렇다는 그런 기록된 말씀을 단지 보았기에 그래서 확신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바로 그 경험, 그 빛으로 흑암에서 벗어나 영화롭게 된 자, 그 큰 빛으로 영원한 실패자에서 영원한 승리자가 된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자기가 했는데 지기의 마음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어떻게 부인할 수 있고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자기가 그 큰 빛 때문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 진리를 부인할 수 있고 세상의 힘으로 세상의 부자가 되려고 all in 할 수 있을까요? 

 

믿기 전과 그 후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 큰 빛을 받아서 승리의 경험, 영화로운 거룩한 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참담했던 그 흑암의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 흑암을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 경험을, 그 승리를 모르기에 그런 승리의 경험을 한 적이 없기에 예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추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 옛 추억을 어떻게 없앨 수 있고, 추억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요?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의 그 모든 과거가 지금 자기의 현실이 아닙니까? 추억 없이, 과거 없이 지금의 자기가 있을 수 있다고요?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과거 없는 현실이 있을 수 있나요? 

 

좀 더 실감을 위하여 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들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미게 되면, 다들 쉽지 않게 살게 마련이지만, 힘들 때, 부모하고 같이 살면서, 받았던 그 사랑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그때를 더 그리워하지 않을까요? 힘이 들면 들수록 저 같은 경우, 어렸을 때, 즐거워했던 그 추억이 찐한 그리움으로 자아내게 하던데, 그렇지 않던가요? 남자인 저도 그러는데 말입니다. 특히 저의 부모님께서도 그 당시 참 어려운 형편이셨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려고 피땀을 흘려주셨고, 당연히 힘이 되어 주셨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그때가, 삶이 고달파서 힘들어 지면 질수록 찐하게 생각이 나게 합니다. 특히 만들어 주시던 맛있는 음식도 생각이 나게 하고, 늘 함께 살면서 받았던 자기 나름의 귀한 사랑들이 생각이 나면서 어려움을 잠시 잊게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힘들고 고달픈 우리 자신들하고 늘 함께 하시면서 이렇게 저렇게 돕고 계심이 사실이라면, 그 성도에게는 어떤 위로와 기쁨과 자랑이 될까요? ~ 나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어떤 큰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 때문에 해결을 받게 되어서 크게 감사하고 기쁨이 넘쳤던 적이 적지 않았을텐데, 그 귀한 영적 경험을 삶 중에, 또는 말씀 묵상하는 중에 또는 기도 중에 기억이 나게 될 때, 그 귀한 기억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던가요? 그 기억이 어떤 준비를 하게 하던가요? ~ 

 

저 같은 경우는 그 때의 기억은 속 좁았던 나를 조급했던 나를 좀 더 넒은 마음과 조급함도 조금씩, 해결해 주시면서, 아내하고의 관계가 천천히 라도 개선되는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가족일지라도 실은 이웃하고 다르지 않은 관계인데, 단지 가족이라는 boundary로 인하여 큰 오해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이웃보다 더 먼 사이로 전락 될 뻔했는데, 아니 실은 저의 형제간은 남보다 못한 관계로 살고 있으니 참 부끄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들이 서로 위해주고 서로 돕는 귀한 모습을 보게 되면, 너무나 부끄러워서 늘 쥐구멍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 아주 멀어 있었던 우리 부부, 그리고 자식하고의 관계도 역시나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수고를 그 영적인 경험 속에서 하다가보니깐조금씩, 그 멀고, 아주 멀리 있었던 우리들의 그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제가 은혜를 입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말만 가족이요 자녀이지, 이웃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그 큰 빛으로 어떤 놀라운 변화를 주시는지, 그 경험은 중요합니다. 그 신앙의 추억은 죽을 때까지 임종을 그리고 심판을 준비하는데 큰 지혜와 힘과 능력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

 

저희들의 못난 점들을 이런 저런 하나님의 도움과 간섭으로 우리들을 늘 지켜주셨기에 제가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어서, 그래서 늘 감사기도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가정만이 아닙니다. 24년간 산돌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큰 회복과 함께 여기까지 저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일도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하십니다. 

 

주전700년경에 흑암의 삶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그 말씀을 대할 때마다 또는 기억할 때마다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나에게 임한 그 큰 빛을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그 가치는 그릴 수도, 기록하기에도 그 내용이 하도 깊고 깊기에 표현할 수가 없는 너무나 크고 큰 감동이라 ~ 단지 항복하게 됩니다. all in이 목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큰 빛을 생각하면 어떤가요? 어떤 신앙의 경험과 놀라운 반전을 경험하셨나요? 어떤 경험으로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있나요? 

 

지금 제가 이런 말씀을 왜 드리는 것일까요? 사9장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에 받던 고통, 멸시에서 벗어나 영화로운 자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 됨으로, 그 확신이 저의 내일을, 거룩함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저의 변화는 결국 은혜인 갈릴리에 그 큰 빛을 비추어주셨기에 제가 믿기 전과 그 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데, 조금도 선할 수 없었기에, 늘 미련했고 어리석었고 이기적이면서 자기의 유익만 구했기에 부부관계도, 가족관계도, 형제관계도 그리고 자식으로써, 이젠, 부모로서도 제 몫을 전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악당이었고 그렇기에 온 가족에게 상처만을 주던 흑 역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빛으로 인하여 믿음을 갖게 된 후엔, 경건의 훈련을 쉬지 않게 되면서 이젠, 달라져 가는 자신을 느끼면서, 지치지 않고 내일을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믿게 된 그 이후에는 행복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감사와 기쁨의 삶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기 전, 그 옛 자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더 성장해야 되기에 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야 하기에, 더 큰 믿음의 아빠로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기에, 그리고 산돌교회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엄청난 수고를 하고 계신 여러분들이 주님을 일등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룩한 욕심과 그 진리의 복음을 최고로 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발을 가진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그래서 산돌교회 담임목사로써 날마다 죽기 살기로 순종하려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고백과 선택은 나의 기적입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의 그 열심으로 은혜를 입은 산돌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진리의 빛이 되어서,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9:8-21의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사9:8-21이 어떤 내용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악하고 더러운 추억만을 고스란히 남기게 되면서 그들의 종말은 어떤가 하면, 18-21절만 봅니다.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주전700년경의 이사야에게 예언 하셨던 그 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고 흑암에 살던 자녀들에게 그 큰 빛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어 믿기 전과 그 후가 점점 달라졌다면, 종말의 이 심판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니 지금 그렇게 되고 만 것을 보고 있지 않나요? 18-19절처럼 지금 세상 곳곳에 불로 인하여 어떤 상황인가요? 

 

특히 어저께 북 california에서 화재로 샌프란시스코의 16배인가 60배인가가 어떤 arson으로 인하여 전소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20절의 말씀처럼 이렇게 넉넉한 미국에서도 아무리 먹어도 먹을 것이 차고 넘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부르지 못하여 곳곳에서 약탈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왜요? 암8:11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리고 21절에서도 알 수 있지만, 형제간에 어떤가요? 특히 부자들의 형제들은 어떤가요? 전 재산을 거머쥐려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입니다. 게다가 세상으로부터의 어떤 공격이 교회 안에서 터지고 있나요? 그래도 따뜻했던 예전의 그런 어떤 사랑의 모습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나만 살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큰 빛으로 오신 우리들의 한 아이,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멘,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주신 교회들이 세상의 힘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 전과 그 후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게 되면서 야곱의 자손들에게 주의와 경고와 함께 환란을 이겨내라는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큰 빛을 받은 우리 한 사람들의 그 책임은 그 가치가 무한하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제 곧 심판의 날이 옵니다. 재림의 주가 심판하시려고 곧 천사들과 함께 임하실 것입니다. 

 

부탁합니다. 믿기 전과 그 후의 차이가 분명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달라졌나요? 달라지려고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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