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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024 이사야 6:1-13 본문
말씀: 사6:1-13
제목: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Bonus-우리가 어떤가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면 가서 도와주지 않던가요? 그리고 사실을 찍은 어떤 documentary를 you tube에서나 영화에서 보더라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로 사람이 죽게 되거나 또는 크게 다치는 실제 그런 상항이 나오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전혀 몰라도, 저절로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서로가 내지 않던가요? 그래서 ‘아이고 이를 어쩌지! 도와줘야 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셨나요?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보아도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되어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 어미 곰이 자기 새끼가 잡혀 먹는 것을 볼 때, 또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어떤 소리를 내던가요? 마찬가지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참담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실 때마다, 천둥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시면서 안타까워하시지 않으실까요? 저는 그 하나님의 모습을 사6장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요11:35에서 죽은 나사로를 보며 다들 우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도 같이 눈물을 흘리신 그 이유를 그 마음을 어제 사6장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주변의 사람들이 우니깐 덩달아서 우셨을까요? 아니 슬프셔서 우셨을까요? 이제 죽은 나사로를 볼 수 없어서 우셨다고 생각하시나요? ~ 아니요! 진리이신 주님이 계시는데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했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너무나 컸기에 그래서 흘리셨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 끝도 없는, 크고 큰 그 답답함을 보게 되면, 눈물로 대신하게 되지 않던가요? 그래서 사6장에서도 답답해하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예수님의 눈물’로 정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만 알고 시작합시다!
보통 어떤가요? 서로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이웃이라도, 상대방이 저질로 나가면서 정말 큰 실망을 주게 되면, 우린 보통 어떤 반응을 합니까? 외면하지 않나요? 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한테도 나쁜 물이 든다고 같이 놀지 못하게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로 상대방이 아무리 형편이 없을지라도 심한 상처를 주는 저질이라도 전혀 상관 하지 않고 끝까지 잘해 줍니까?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아마도 99.9% 아니 100%가 가족이 아닌 이상, 손해를 입히는 저질스러운 그런 이웃하고는 멀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수준이고 현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하고는 완전 반대의 입장을 늘 취하십니다. 그건 우리들을 모르는 남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요, 너는 나의 아들들이요 딸들이 아닌가? 즉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6장에서도 보면 그 깊은 사랑과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드리겠지만, 진리의 말씀을 보아도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포기하시지 않고 전혀 상관없이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내주십니다. 기회를 주시면서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특히 사1장부터 5장까지에서도 알 수 있었던 점은 그 당시 남 유다 주변 환경은 정치나 경제적으로나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상태는 최악이었음을 말씀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그간의 말씀의 사이사이에서 야곱의 자손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여호와 싹이 결국 남은 자들을 영화롭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그리고 청결하게 할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태는 갈수록 점점 더 타락하고 부패하다가보니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사6장에서 보면, 신앙의 상태가 최악인데, 그런 곳으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주시려고 세워주시려는 그 과정의 말씀을 사6:1-4인 하늘 보좌의 환상을 통하여 보여 주십니다. 그 보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사6:1-4에서 알 수 있게 하십니다. 이사야의 선지자 직과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신적 기원을 뜻하고 있기에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불러 선지자로 세워주시고 이사야를 남 유다로 보내주시는 것을 보면 역시나 죄인인 자연인들과 그들이 믿는 신들하고는 달라도 그 차원이 완전 다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부르심을 언제 받았나요? 사6:1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던 그 해입니다. 그때에 하늘의 환상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주를 찬양하는 스랍(경호를 하는 천사)과 그들의 찬양 소리를 환상 가운데 보고 듣게 됩니다.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위하여 보여주신 하늘의 환상인데, 정말 이런 큰 은혜를 입고 파송된 자가 바로 선지자 이사야였습니다.
그런데 그 환상과 함께 선지자로 보냄을 받을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그 해였는데 왜냐하면 그때부터 남 유다의 국세가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라가 쇠퇴할지라도, ‘나 만군의 하나님이 너희들을 지키고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위기에서 요동하지 말고 견디어 내라는 것을 뜻하는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힘들어 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이렇게 도와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낼꼬, 하시는데,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나를 보내달라고 구하게 되면서’ 가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누구에게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사6:9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보내집니다. 말이 됩니까? ~ 아니 그런 이들에게 무슨 사역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최악의 상황입니다. 가장 지혜로울 때, 영적 상태가 좋을 때가 아니라 가장 미련하고 완악한 남 유다 사람들에게 가서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데 성경을 보시면 어떤가요? 같은 한 예로 출1:8-14과 출2:23-25를 보세요!
“1-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2-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강해지면서 애굽으로부터 심판 핍박을 받게 됩니다.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누구를 보내주시던가요? 바로 모세를 보내주신 것과 같은 이치인데, 그건 구약이나 신약에서도 늘 확인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힘들어할 때마다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적절하게 보내주셔서 당면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할 때에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회복의 뜻으로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종말 때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하여 주후 70년경에 멸망을 당할 즈음이니까, 영적으로 정말 캄캄한 상태였기에 암흑기라고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주시면서 새로운 길을 완전하게 열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꼭 필요한 곳에는 주의 종들을, 사도를 보내주시고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면서 기름부음을 받은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요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구원을 주시듯이,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 때문에 그때, 그때 마다 지금까지도 늘 영적상태가 저질이고 최악이지만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 일꾼들을 보내서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큰 은혜입니다. 사6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사야를 그래서 보내주시는 것인데, 그런데 말씀의 내용을 보면 절망입니다. 절망인 것 같은데, 그러나 나중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먼저 사6:9-12를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남 유다에게, 이는 포기 선언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6:13을 보세요!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회복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아닌 늘 최악이었지만, 역시나 나 만군의 약속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승리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6:11-13의 말씀처럼 최악까지 가더라도 나는 너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사6:13의 그루터기입니다. 즉 끝까지 남은 자들에 대한 보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가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신실한 자들에게는 가장 어두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재물과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신실한 종들을 통하여 남은 자들을 끝까지 지켜주셔서 점과 흠 없는 자들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하신 의지가 바로 그루터기임을 말씀하시면서 그 환란을 이겨내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그 그루터기인 남은 신실한 자녀들을 예수님을 통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 주셨나요? 결국 승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6장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도, 비록 웃시야 왕이 죽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국세가 쇠약해질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여전히 내가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당장의 환란 때문에 의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6:1-4에서도 알 수 있어야 하지만, 그 보내심에 대한 주체자가 인간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사6:1-4를 통하여 확인시켜 주시면서 만군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듣고 순종해야지 포기하지 말라는 뜻에서의 환상입니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지자이기에 그의 메시지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 유다가 이제 곧 얼마 아니면, 멸망을 당할 것인데,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왜, 이사야 선지자를 이때, 멸망을 앞 둔 그런 상태인데 그를 보내주시는 것일까요? 보내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6:9만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장님에게 빛을 보내는 식입니다. 죽은 자에게 음식을 차려 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절름발이에게 뛰라고 running machine를 보내주시는 식입니다.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오디오를 보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왜요? 무슨 뜻일까요? 비록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이런 절망의 선언은 나중에 진리의 빛이 들어와서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될 때, 자기의 구원이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얻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6:10을 다시 보세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마치 선지자를 통하여 더 어둡게 하시겠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런 절망적인 선언은 선지자의 사명을 무색하게 하는 말씀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어떤가요? 신실한 선지자들이 그 완고한 백성들의 마음을 더 격분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죄를 더욱 저지르게 했던 것을 보면 어떤가요? 정말 둔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갈수록 더욱 완악해 지니깐,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가서 듣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고, 보지도 못하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사6:10에서 다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하시는데 이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남 유다의 회개를 원하지 않으시기에 그래서 고의적으로 막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역설적인 말씀으로 이사야의 메시지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은 영원히 유기조치하시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사6:11-12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는 완악한 남 유다를 언제까지 영적인 귀와 눈과 마음이 고침 받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영적인 무감각과 무지한 채로 두어서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린 선지자 이사야의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남 유다 백성들이 심판을 받게 될지라도, 한번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에 동족에 대한 회복의 때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린 어떤가요? 우리 주변 그리고 가족을 볼 때, 심판을 향한 행보로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 가슴이 찢어지던가요? 마음이 아파서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고통이 있던가요? 그래서 얼마나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희생과 수고와 인내를 하고 있나요? 아니면 포기하고 있기에 자기만 편하고 자기만 아무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식인가요? 이건 재앙입니다.
추가로 제가 여기서 드릴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1. 성도라면 성경을 왜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되는지 아시나요? 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마음 판에 깊이 새기면서 묵상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린 왜?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늘 불안하고 요동하는 것일까요? 우린 사6장에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6장만 이해를 하고 있어도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면, 알게 된 성도는 점점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는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사6장에서 확실하게 보여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지키시려고 하고, 끝까지 도와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 이 점만이라도 파악이 된 성도들이라면, 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도 늘 이겨낼 수 있게 되고, 아멘? 당연히 아멘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편을 들고 계시니,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면서 당장 보이는 그 불행과 환란이 오히려 깊은 신앙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감사함이 가능하고 늘 능력의 복된 믿음의 행보를 확보하게 되면서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는 그 이유가 되기 때문에 말씀, 말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시9:10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보세요! 어떤 약속을 하시던가요?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자기의 삶을 맡기기만 하면,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기만 하면, 다 내려놓기만 하면, 갈수록 행복한 자로서, 갈수록 지혜로운 자로써 기적의 삶을 영원히 이루어가게 되는 자가 되기에 말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사6장의 말씀을 가만히 다시 깊게 조용히 생각 해 보세요! 어떤 생각이 들까요? 요11:35에서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그 답답함이 너무나 크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 즉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 자녀들을 늘 다 보고 계시는데, 완전히 다 알고 계시는데, 일거수일투족을 다 읽고 계시는데,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 답답함이 어느 정도이셨을까요? 요11:35에서 우신 이유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 마찬가지로 그 답답함이란 말로 형언이 되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사6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그런데 우린 놀랍게도 전혀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3-4살짜리 아이들처럼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한두 살짜리 아주 어린 아이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할까요? 가서 만지려고 합니다. 왜요? 몰라요?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전혀 모르기에 겁 없이 호랑이 곁으로 다가가는 어떤 아이를 본다면, 그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의 그 답답함이 어떨까요? ~ 사6장이 바로 그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자녀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러나 그 자녀들은 아무런 답답함이 없이, 세상의 악함과 더러움과 잔인함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그 세상을 벗 삼으면서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세상의 그 정체를 다 알고 있고 그래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시 답답함 없이 살아가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어느 쪽에 서 있는 자신입니까? ~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삶이란 말씀의 가치를 모르고 있기에 아주 형편없는 삶이요, 그래서 그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렇게 답답하게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거의 99%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6장에서도 말씀을 하고 계시듯이, 자기는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니 두려울 것도 무서워서 내일의 죽음과 심판을 준비할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니, 그것만큼 무지하고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어디 있을까요? 이제 곧 누구든지 예외없이 죽음을 맞아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이를 준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자들이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
특히 너희들의 그런 꼴, 그런 기막힌 상태를 어느 누가 사6장의 말씀처럼 이렇게 알려 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없고 그 어떤 신도 없어요! 오직 그 사실을 알려 주시는 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신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을 주셔서 지금 그 구원을 약속하신 대로 받게 된 믿음의 자녀들이 이젠 이런 말씀을 듣고 보고 깨닫게 되어서, 즉 그 그루터기들이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달라져 사6장을 보면서 구원하여 주신 그 하나님을 얼마나 찬양하고 있고 기뻐하고 있고 감사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 안에 자기가 들어가 있나요? ~ 그루터기처럼 남은 자들은 그 은혜에 너무나, 너무나 행복하고 좋아서 찬송의 삶을 늘 유지하게 되는데, 그 뜻도 찬송만이 아니라 순종하기를 조금도 거부할 수 없음을 알고 철저히 말씀을 따르려는 그래서 제 2의 사도 바울이 되고자 날마다 거룩한 몸부림을 치느라고 바쁘게 살아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일초일전의 삶입니다. 왜요? 보아도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던 자기를 보게 하시고 듣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답답함에서 벗어나 영원히 붙잡혀서 앉은뱅이 삶, 장님의 삶, 벙어리의 삶, 문둥병자로써 철저히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완전한 자유인으로 완전한 회복의 사람으로, 마치 영원히 묶여 있던 송아지가 풀려나와서 그 크고 큰, 넓고 넓은 푸른 초장을 자기의 거룩한 뜻대로 원 없이 활보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그 자유와 그 승리자로 현실에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바로 자기가 지금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을 보아도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자기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서도 답답하지 않다면 그건 지금 사6장의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다시 제2의 이사야로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하여서 진정으로 회복이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그 하나님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생명의 빛을 받은 성도에게 말씀은 양식보다 더 소중하고 그 어떤 부와 힘보다도 비교가 전혀 될 수 없는 복중의 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에 사나 죽으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깊이, 아닌 더 깊이, 아니, 아니 아주 더 깊이, 더, 더 깊게 깨닫고 최고로 하나님을 닮으려는 것 외에는 다 배설물로 여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가 바로 그 찾고 찾아야 했던 제 2의 사도 바울이 아닐까요? ~
말씀에 미치지 아니하고서는 내일의 승리는 없습니다. 말씀에 미치지 아니하시고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은 없습니다. 말씀만이 그 하나님,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던 죽은 자녀들의 그 답답함을 풀어 주신, 전혀 느끼지 못하여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최악으로 불쌍한 그 자녀들을 살려 주신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시려고 all in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맙니다. 제2의 북이스라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사6장의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지 느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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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2024 이사야 7:1-25 (13) | 2024.07.15 |
6/30/2024 이사야 5:1-30 (13) | 2024.07.01 |
6/23/2024 이사야 4:1-6 (18) | 2024.06.24 |
6/16/2024 이사야 3:1-26 (14) | 2024.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