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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8/4/2024 이사야 10:1-34 본문
말씀: 사10:1-34
제목: 나의 영혼이 아파하는가? - 말씀 때문에 아프고 말씀 때문에 치료받고
사10장만을 보시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할 여지가 많습니다. 무서운 하나님, 자비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하나님이라는 선입견을 주고도 남는 본문이기에 ‘나의 영혼이 아파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특히 같은 구약이지만 겔18:23의 말씀을 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우린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여기 겔18장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보시면, 특히 마5:38-48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 차원이 구약의 심판의 하나님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마18:21-22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한없이 용서를 하시지 못해 안달하시는 자비와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갈6:1도 보세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 주라고 하십니다.
한 곳만 더 봅니다. 살후3:14-15입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누가 순종하지 않으면 사귀지도 말라고 하시면서 그 다음에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린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 인정사정이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의 마음은, 원수요 순종하지 않는 자라할지라도 그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본 마음을 알게 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바로 이 마음으로 사10장의 말씀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10장의 이 무서운 말씀, 무서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
지난 월요일 새벽부터 아내 내시경 때문에 병원에 갔다 와서는 자동차 타이어 문제로 A&J auto shop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뒷 tire 2개가 너무 닳아서 수리할 수가 없다고 하여 타이어를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장로님의 눈을 보니깐, 좀 달라져서, 사모님에게 물었더니 장로님 눈에 눈썹이 찌르는 통에 할 수 없이 쌍가풀 수술을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이렇게 아프고 불편하게 되면 수술을 해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최소한 없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날도 사모님하고 신앙 이야기를 하다가 사모님의 이빨이 이상해서 이빨에 문제가 생기셨나요? 하고 물으니깐, 자기도 이빨 때문에 지금 임플란트를 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틀니를 할 걸 괜히 임플란트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시니깐, 그 말을 듣던 장로님도 식사를 하다가, 자기도 이빨에 문제가 생겨서 할 수 없이 임플란트를 했는데, 그 비용이 자그만치 3만불이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다. 분명할진데, 이 선택, 이 모습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살아 있기에 이렇게 꼭 반응하게 됩니다. 살아있기에, 자기 몸이 아프면 이렇게 치료를 받으면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목숨을 건 큰 수술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어떤가요? 사10장의 심판의 말씀에서 아픔을 느낍니까? 만약에 자기 영혼이 심히 아플 땐,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자기의 영혼이 아플 때, 어떻게 하고 있나요? ~ 그런데 문제는 자기 영혼이 심히 아픈데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해결할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다면? ~ 실상 대다수의 교인들을 보면, 어떤가요? 자기의 영혼이 아파하는지, 아파하지 않은 지, 그 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에, 마치 자기의 몸이 단지 아프지 않다하여 괜찮다고 여기고 있듯이, 그런 것은 아닙니까?
물론 아프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러나 아픈데 단지 느끼지 못해서 아파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정말 재앙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영혼에 대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자기의 영혼이 아픈지, 또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여 나는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왜요? 건강진단을 받고 이상 무 진단을 받았는데, 그래서 자기는 건강한 줄로 알았는데, 한 달 뒤에 숨어 있던 암이 발견이 되어, 갑자기 죽는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고 보았나요? ~ 신앙이 정말 그렇습니다. 자기가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에, 아프지 않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 그렇기 때문에 당장 아프지 않다고 나는 건강하다고 장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판단과 기준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특히 영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기 영혼은 심히 아파하는데 단지 자기가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나는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보다 위험한 경우는 없습니다. 특히 여러분 스스로, 심판을 말씀하시는 사10장을 통하여 지금 자기 영혼 상태를 진단 해 보세요!
사10장 말씀 때문에 지금 자기 영혼이 아파하고 있나요? 아니면 아픔이 전혀 없나요? 어느 쪽인가요? 그렇다면 심판에 대한 사10장에서 우리들이 왜 아파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멸망에 대하여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악에서 떠나기를 너무나 바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10장에서 남 유다와 앗수르의 멸망을 기뻐하실까요? 아니지요! 심히 괴로워하시면서 명하신 심판이셨던 것입니다. 자식이 타락하여 감옥에 들어갈 때, 기뻐하는 부모가 없듯이, 슬퍼하고 속상해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사10장을 묵상하시면서 괴로워해야 되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 순종하여 그들이 하나님 때문에 다 행복해야 되는데 불순종으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을 때, 그 선언 앞에서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고, 아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들이 주님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느낌을 같이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사10장에서 그 아픔을 느낄 수 있을 때, 그 아픔은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기에서도 은혜를 입은 우린, 깊은 영적인 아픔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10장에서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여기에서도 영적인 아픔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 현실을 보면서도 그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상관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들이 곳곳에서 처참하게 불에 타고 지진과 전쟁으로 무너지고 있는 이 참담한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이웃들이 온갖 재앙으로 곳곳에 homeless들이 넘쳐나고 있고, 다들 뒤엉켜서 힘들어 쩔쩔매고 있는데, 나만 당장 괜찮다고 하여, 전혀 아파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누가 그를 성도라고 인정할까요?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해야 되는 것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특히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의 삶이 하도 세상적이기에 그래서 영적인 아픔도 전혀 느끼지 못하여,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있으면 손을 한 번 들어 보세요! ~ 놀랍게도 자기의 영혼이 아파서 걱정하는 성도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애당초 그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실제로 자기의 영혼이 심히 아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같이 힘을 모을 수 있고 심히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작은 마음이라도 함께 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의 아픔 없이는 사랑할 수도 없고, 그 아픔 없이는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 주변은 더욱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너지고 있는 참담한 이웃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므로, 오히려 무가치한 세상의 일로 웃고 있고, 즐기다 보면, homeless는 더욱 불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곳의 상황이 악 순환의 연속이 되면서 점점 불안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다가보니깐, 영혼의 아픔을 육체적인 아픔처럼 느껴 말씀으로 해결을 받아야 될텐데, 느끼지 못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영혼이 아픈데도 느끼지 못하여 그래서 나는 아프지 않다고 아주 쉽게 단정하게 되면서 망하는 길로 향하게 되니, 우리의 주변은 더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자기의 영혼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만큼,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모두는 아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경우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은혜가 충만하면 할수록 실은 자기 영혼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왜요? 성경을 보아도 다 어떤 내용이던가요? 구약도 다 망할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이고 신약에서는 나하고 전혀 다른 좁은 길을 끝까지 가라고 하시잖아요! 아무리 은혜가 충만해도 우린 본질 상, 죄 덩어리들이기에 가라고 하신 그 좁은 길을 편하게 쉽게 넉넉하게 갈 수 없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늘 해 주시는 말씀이 뭔가요? 구원을 두려움으로 끝까지 이루어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마10:22에서 하시는 말씀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4:13에서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심지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도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기도를 드리던가요? 마26:36-42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예수님도 이런 고통을 받을진데, 성도들이 이 험한 세상 곳곳에서 넉넉할 수 있을까요? 힘들어 다들 쩔쩔매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자신의 영혼이 아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아파하시고 슬퍼하셨다면,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아픔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것일까요? 아파하라고, 아픔을 느껴서 점점 나아지라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아픈데, 그 아픔으로 도움을 받아서 나아져야 되는데, 문제는 세상에 깊이 빠져서 전혀 아파하지 않으니, 이것이 재앙입니다. 아픈데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그런 저주와 재앙이 없기에 그래서 아픔을 느끼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던 문둥병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영적인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젠 진리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기에 믿음의 눈으로 자기의 꼴과 주변을 보세요! 아니 사10장의 심판하시겠다는 말씀만이라도 보세요! 말씀을 믿지 못해서, 결국 다 죽을 판인데 아니 다 노예로 끌려갔고 망했는데, 어떻게 이 심판의 말씀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온 천지가 다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위험의 수위가 너무나 높아 곧 터질 것 같은데, 아니 곧 예수께서 오실텐데 어떻게 걱정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요? 특히 자기 영혼의 상태도 말씀으로 점검해 보세요! 정말 한심하지 않던가요? 선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고 여차하면 무슨 생각과 무슨 짓을 합니까? 하나님의 뜻하고는 반대인, 그런 자신이 그대로 보이는데, 아프지 않을 수가 있다고요?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다고요? 말씀 때문에 늘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파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린 오늘 심판에 대한 사10장의 말씀만 보더라도 타락한 남 유다와 앗수르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이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다들 문둥병자이었기에 구약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어서 아파하지 못했지만, 이젠 예수님 때문에 진리를 듣고 보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이젠 아픔도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우린 사10장의 이 심판, 이 저주를 보면서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인정사정없이 심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이신지를 그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전2:16을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을 가진 우리가 사10장의 심판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무섭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 값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시면서 얼마나 아파하셨을까?’가 되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목적이 죄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픔 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들이 죄 값으로 감옥에 갈 때, 슬퍼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 아픔이 너무나 크셨기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마음으로 사10장의 말씀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하게 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외면하게 되고 무서워서 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만을 믿게 되고 그 믿음으로 자신도 회복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기 때문에 서서히 가족과 관계도 회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회복된 가정과 교회들로 인하여 즉 아파하는 성도들과 아파하는 교회로 인하여 우리의 내일은 오실 주님을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준비하는 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성경공부시간에 드린 질문이 나는 캄캄한 세상에서 밝은 등불을 켜고 있는가 아닌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불빛을 비추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애통해 하시며 심히 아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성도는 무너지고 있는 이런 현실을 보게 되면, 아파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요? 왜 아파해야 합니까? 믿기 전에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던 문둥병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고침을 받고 이젠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죽음까지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을 형제로 여기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지금 교회를 보시면서, 무너지는 이 세상을 보시면서 웃고 계실까요? 비웃고 계실까요? 여행 다니시느라고 정신이 없으실까요?
아닙니다. 아파하시고 계십니다. 심히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나 몰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고민 없이 살 수 있을까요? 곳곳에 널브러져 좀비처럼 살고 있는 homeless를 보면서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 슬픔과 아픔이 없이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아픔만이 해결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기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푯대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아픔이 바로 그리스도 외의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있는 거룩한 성도로써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아픔은 재앙이요 저주가 아니라, 결국 서로간의 연합과 화목을 이루게 되면서 가장 행복한 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합니다. 가장 큰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면서 영원한 승리자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의 즐거움과 승리는 그 반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라면, 입김보다 가벼운 인생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기독교는 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어 나를 살려주셨듯이, 내가 죽어 이웃을 살리는 종교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 말씀을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고후4:7-12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웃의 생명을 위하여 내가 호흡하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의 생명을 늘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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