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10/1/2023 나훔서 3:1-19 (2) 본문

주일 설교 말씀

10/1/2023 나훔서 3:1-19 (2)

PastorYK 2023. 10. 2. 11:28

말씀: 나3:1-19                                                

제목: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2) 

 

 

만약에 누군가가 자기에게 다가와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을 할 때, 그 예언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해 줄 때, 그 예언이 아주 최악이면, 그 예언을 믿을까요? 믿지 않을까요? 특히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누가 와서, ‘당신이 지금처럼 세상의 힘과 부를 따라가면 피의 삶이 되고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을 때, 어떨까요? 그 예언을 믿을까요? ~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믿으려고 하지는 않으려고 애를 쓰겠지만, 자기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그 예언 때문에 두고두고 거슬릴 것입니다. 

 

특히 형통할 때에는 괜찮다가도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생길 때마다 그 예언 때문인가? 라고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 그래서 그 예언을 잊으려고 노력을 해도 잘 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다가보면 문제들이 계속해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생길 때마다 그 예언이 생각나면서 괴롭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 하는 저주는 어떤가요? 얼마나 많은 저주가 나옵니까? 그런데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거의가 믿지 않습니다. 왜 믿지 않는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자기의 저주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또는 문제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거슬림도 커지면서 심각한 고민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들이 이를 이용하여 부적(talisman)을 만들어 그런 미련한 자들에게 팔아서 돈을 벌고 있는데, 이렇게 부적을 사서 다가오는 재앙이나 저주를 막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부와 힘으로 가면 어떻게 저주를 받게 되는지, 그렇게 수도 없이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시지만, 그리고 해결방안도 정확하게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시지만, 누가 믿고 그리고 자기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고민하고 있던가요? 놀랍게도 거의가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능력인지, 베짱인지, 아니면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혹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어떤 사람의 저주 예언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민하게 되면서도,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재앙에 대한 말씀은 믿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재앙, 저주의 말씀을 믿지 않는 그 이상한 반응은 지금 우리들뿐 만이 아닙니다. 나훔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하던, 그 당시에도 보면,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망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은 가볍게 여기는 것일까요? 

 

성경 때문에, 성경이 하고 있는 무서운 예언들 때문에 자기들의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사람들을 보면, 진짜 예언은 불신하고 가짜 예언은 믿는데, 이해 못할 부분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굳이 설명을 드린다면, 다들 내일의 승리를 위하여 오늘 양보할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이지 내일의 승리를 위하여 오늘 고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그럴까요? 거룩한 길을 가면서 생고생하느니 당장 즐기다가 말겠다는 현실주의에 빠져서 그럴까요? 

 

그러다가보니깐, 결국 현실의 형통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매주 교회에 다니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 부하면 부할수록, 잘 살면 잘 살수록 그런 현실주의 증세가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부와 힘이 진리의 말씀을 밀어내기에, 특히 부와 힘이 사람들에게 당장의 즐거움을 주기에 거기에 속아 앗시리아도 멸망을 당했고 지금, 우리들도 앗시리아처럼 부와 힘에 노출된 현실에서 살다가 보니,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이 들어다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최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가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나훔의 이 예언의 묵시를 믿었다면, 믿었던 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어떤 선택을 해야 했나요? 물론 그 당시는 아무도 믿지 않아서 망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린 어떤가요? 예수님을 믿고 있기에 어떤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분명할진대, 믿고 있다는 성도들이라면, 자신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앗시리아처럼 부와 과시 때문에 망하면 안 되는데, 왜 똑같이 멸망의 길을 따르고 있나요? 거룩함을 위하여 말씀을 죽기 살기로 따라가야지만 되는데, 왜, 그렇지 않습니까? ~ 참 답답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되는 기준은 거룩함을 위한 순종은 좁은 길이지, 세상의 힘과 부가 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부와 능력을 위하여, 예수를 믿고 있다면, 산으로 도망가야 하셨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요? 명할진대, ‘너도 니고데모처럼 중생해야 되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부와 힘을 구하는 종교는 기독교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엡1:3-5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기독교의 목적은 세상 형통이 아니라 거룩함이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어떤 성도가 만약에 세상의 부와 승리를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면, 깊은 탄식을 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이 세상의 부와 힘을 구하는데도 예수님의 탄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혹은 말리지도 않으신다면, 그 교인이 믿는 예수는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에 보세요! 

 

사30:18-26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밭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고산마다 준령마다 그 뒤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성령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의지하는 참 신앙인들은 자녀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고, 완전하게 다 자녀들을 지키고 계시다는 그 말씀들을 의심 없이 믿고 있기에, 세상의 부와 힘을 위하여 결코 all in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로써, 믿음의 좁은 길을 따라가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알고 믿고 경외한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다 내려놓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힘과 부의 삶을 평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앗시리아처럼 세상 승리와 즐거움을 구하고 있다면좁은 길로 가려고 할 때, 거절한다면, 그건 속고 있던지, 가짜가 아닙니까? ~ 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사업까지도 형통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시면, 시73:1-12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그런데 악인의 종말을 보세요! 시73:17-20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는 일마다 손해 보고, 하는 일마다 망하고, 심지어 건강도 좋지 않고, 게다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가족관계까지도 좋지 않아서 힘들어 하고 있다면, 그 아픔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그 고통이 재앙과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큰 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와 힘이 좁은 길을 따라가는데 큰 방해가 된다면, 부와 힘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늘 가난한 심령으로 좁은 길을 따르는데 부와 힘이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부와 힘은 복과 능력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요? 

 

결국 최강국 앗시리아가 망했고 그래서 그 다음 정복자였던 바벨론도 망했고 그 뒤를 이은 메대 바사국도 망했고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도 망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다 부와 힘만을 원했기에 망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왜 이 모양입니까? 지금 도둑떼가 곳곳에서 들끓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IT 도시였던 San Francisco가 이젠, 마약과 homeless가 가득하고 건물의 30% 이상이 비어 있는 최악의 도시가 되어가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을 보면, 제 2의 앗시리아의 성이 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요, 약탈과 탈취로 살 수 없고 미국의 어느 도시는 미성년자 아이들이 인신매매로 천여 명이 사라졌다는 보도를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무법천지입니다. 

 

바로 최강국인 미국에서도 앗시리아가 멸망을 당할 그 당시의 상태가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앗시리아처럼 미국도 곳곳에 이제 곧 거짓과 포악과 약탈이 법으로 수습과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사람들이 무수한 시체들 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세상의 힘과 부가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힘에 눌릴 수 있고 세상의 부에 끌려 다닐 수 있을까요?

 

게다가 마술에 능란한 미모의 음녀의 음행과 마술로 여러 나라를 미혹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 결과 나3:5-19를 보세요! 특히 5절, 10절, 19절을 보세요! 5-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10-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9-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결국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힘에 속아 비참하게 참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리, 경제적으로 가난해서가 아니라, 세계 최강 앗시리아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으로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그리고 결국 멸망을 당했습니다. 망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는 그 이유가 아직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와 형통에 있을 수 있습니까? 

 

얼마 전에 기막힌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던 어떤 집사님이 늘 만나면 은혜의 하나님을 그렇게 자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분이었는데, 배우자와 사별한 후로도 혼자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별안간 재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불신자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60이 넘은 나이에 쉽지 않은 선택을 하신 것 같은데, ~ 성도에게 여전히 보이는 세상의 삶이 우선이 되면, 당장은 즐거울 수 있겠지만, 결국 큰 아픔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없는 부와 힘, 은혜 없는 부와 능력보다는 가난하지만, 서로 간의 화목과 연합을 이루는 삶이 더 낫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잠15:16-17입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6:8입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잠17:1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우린 가난한 정직과 정결함보다 여전히 더럽고 부정해도 부와 즐거움을 원하고 있기에, 자기의 부가 자기를 죽일지라도, 당장 일어나지 않기에 그래서 속된 떡, 세상의 즐거움을 우선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이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어떤 수작을 부리던가요? 

 

마4:1-3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심히 배고픈 주님에게 돌을 가지고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현실적인 주문입니까?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맞는 요구요 시험입니다. 배고프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현실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사단의 요구가 전혀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서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아무리 재미있는 최고의 여행일지라도 배가 부르고 난 뒤에 여행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 인들의 기본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선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게 현실은 떡의 만족과 기쁨에서 말씀의 만족과 기쁨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물론 말은 쉽지만, 떡에서 말씀으로 삶의 틀이 완전하게 바뀌려면, 목숨을 건 자신과 싸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 싸움이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늘 고민하게 되고, 쩔쩔매지 않을 수가 없어야 하는데, 지금 그런가요? 아니면 떡 때문에 고민하고 있나요? 만약에 떡과 세상 즐거움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그 고민은 자기를 피의 내일이 되게 합니다. 화를 부르는 떡과 즐거움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닐 거라고 하지 마세요! 말씀으로 바뀌지 않으면, 재앙, 저주가 나를 맞게 됩니다.   

 

마4:5-6을 보세요!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너의 그 능력을 밝혀서 인정을 받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성육신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다 잃어주신 후에 다 얻게 하시려고 그래서 오신 분입니다. 현실적으로는 Mighty God이신 주님께서 계획적으로 미련하고 바보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세력하고는 완전 반대가 아닙니까? 세상은 다 거머쥐려고 다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절망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8-9절도 보세요!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굶주리신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경배하면 즉 세상에 항복하고 세상을 위하여 살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완전 거짓말입니다. 이 마귀의 거짓말을 믿고 따라가던 사람들 중에 약속한 이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물론 잠시는 누렸고 가졌는지는 몰라도 일전도 갖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힘과 부를 복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귀를 믿고 세상을 따랐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완전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잃었나요? 

 

빌2:6-11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다 내려놓으셨고, 종의 삶을 선택하셨지만, 모든 영광과 권세를 다시 다 얻으셨고 지금도 온 우주와 역사를 주장하시며,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어떤가요? 사단의 이 3 가지 유혹에 다 넘어가지 않았나요? 말씀,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떡이 더 중요하고, 가난한 심령 보다는 능력이 더 중요하고 그리고 세상의 승리, 영광을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고 어떤가요? 자족하지 못하고 돈과 능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세력에 빠지면 앗시리아처럼 남김없이 다 버려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세요! 마4:4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10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세상에 속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좁은 길이었기에 악이 떠나고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하셨다고 마4:11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말씀을 아무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와 힘 때문에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의 힘과 부 때문에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주요 재앙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와 힘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좁은 길로 가자고 하면 화를 내거나 도망을 치고 맙니다. 심지어 자기가 몸만 나온 주일예배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들, 어디까지 자연스럽게 왔습니까? ~ 그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마귀를 제압하고 세상에서 참 승리자의 삶을 원하신다면, 성경, 기도의 삶을 아까워하시면 안 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양보하거나 excuse를 하면 안 됩니다. 이 시작을 위한 결단으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원하는 승리와 기쁨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시작과 유지 없이는 원하는 아름다운 가정은 불가능합니다. 이 시작과 유지 없이는 믿음의 자식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시작과 유지 없이는 더 큰 재물, 권력, 대단한 큰 명예를 얻게 될지라도 결국은 다 잃게 될 뿐입니다. 잃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더욱 곤욕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좁은 길로 끝까지 따라간다면, 이 선택은 가난가운데서도 부족함이 없는 이웃의 유익을 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 길은 병든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믿음의 삶은 절망 가운데서도 승리를 이루게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믿음의 부모가 되면, 같이 사는 자녀들에게, 어떤 기적이 생길까요? 은혜와 생명을 나누는 일에 쓰임 받게 할 것입니다. 은혜로 인한 이 거룩한 시작을 끝까지 지켜보세요!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단하고 아름다운 내일이 현실로 펼쳐 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입니다. 나3:8-19에서는 니느웨 멸망의 필연성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느웨가 아무리 부유하고 강성하다할지라도 그들의 그 힘이 독이 되어 멸망할 수밖에 없었음을 나3:8-11의 막강했던 노아몬의 멸망에 비유하여 선언하십니다. 과거의 니느웨 못지않은 철의 요새지로 알려졌던 최강의 애굽의 제18왕조인 힉소스 왕조 이후 수도로 사용된 애굽의 도시 테베인 노아몬은 당시 전 세계를 140년간 다스리다가 주전663년에 앗수르 제국의 앗술바니팔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이것을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노아몬이 멸망을 당했는데 그보다 입지조건, 방어시설이 부족한 니느웨가 멸망을 당하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타락으로 인하여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도 니느웨는 범죄한 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임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교만하여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멸망은 귀정 사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3:8-19의 내용입니다. 잊지 마세요. 

 

죄의 값은 멸망이요 저주입니다. 초강대국이 교만으로 철저하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더라면, 그래서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면, 나 한사람의 교만함을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까요? 아니면 나 한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벼운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안 됩니다. 나 한 사람에 대한 각별하고 각별하신 관심을 갖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지키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한사람, 한사람들을 지켜 주십니다. 

 

지금까지 모든 나라들이 죄 때문에 망했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불꽃같은 눈동자로 각 사람들을 지키시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해결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입니다. 이것이 나훔서의 중심 내용이요 구약의 핵심 내용입니다. 

 

결론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을 살려주시려고 주신 것이 성경이지 죽이려고 주신 저주의 책이 아닙니다힘의 앗수르는 교만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앗수르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다 부와 힘 때문에 멸망을 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모든 나라들이 멸망을 당하였다면 우리 각자도 말할 이유도 없습니다. 결코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거룩한 수고를 하고 계신다면,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내시기를 바랍니다. 

 

지켜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복을 주시지 못하셔서 안달하시는 분이시기에 지켜내고 있는 자녀들을 위하여 어떤 놀라운 기쁨과 감사의 삶을 주실지, 저는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산돌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신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부러워하는 그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그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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