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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9/17/2023 나훔 2:1-13 본문
말씀: 나2:1-13
제목: 재앙이 된 부와 힘
1장에서는 목숨을 포기한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에서 죄악이 창궐한 앗시리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당당하게 선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적군의 나라, 아니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도 심히 어려운 사명인데, 이젠 회개가 아니라 죄악이 극에 달한 그것도 약소국이 아닌 세계를 지배하는 최강국 앗시리아를 향하여, ‘멸망을 선포하는 일’이란, 더 더욱 어려운 사명이었습니다. 순한 집 강아지 한 마리가 정글을 지배하고 있는 최강의 호랑이에게 가서, ‘너 곧 죽을 거야!’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누가 직접 가서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못하고 있지 않던가요?
그런데 나훔이 하나님의 묵시를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그대로 생생하게 가감 없이 당당하게 전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최강의 앗시리아로서는 한낱 객인에 불과한 어떤 한 사람이 들어와, 별안간 하나님의 묵시라고 하면서 심판을 힘차게 실감나게 전했을 때, 믿었을까요? ~ 아마도 다들, 가소롭게 여겼던 것입니다. 왜 가볍게 여겼을까요? 그 당시 앗시리아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와 힘이 얼마나 사람의 영안인 믿음의 눈을 가리게 하는지, 알게 합니다. 너무나 막강하고 막강하다가보니깐, 이런 묵시일지라도 전혀 듣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떡인 부와 힘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도 보세요! 특히 한국을 보면, 점점 나라의 힘과 부가 쌓여가고 있지만, 그 반대로 교회는 무섭게 타락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가 타락하니깐, 나라의 힘과 부도 역시 복이 아니라 독이 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앗수리아는 BC 612년에 연합국 바벨론과 메대 바사국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고 맙니다. 이것이 인류의 정확한 역사인데, 이런 역사를 두 눈을 뜨고 보았고, 두 귀를 갖고 들었지만 아니 보고 있고 듣고 있지만, 어떤가요? 하나님에게로 가던가요? 세상의 길로 가던가요?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들이 요나서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해를 위하여 다시 언급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앗시리아는 북방의 신흥국가 아라랏과의 긴 전쟁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큰 damage를 받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그 당시 BC 765-759년에는 나라의 큰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BC 763년 6월 15일에는 완전한 개기일식으로 땅이 칠흙같은 어두움에 휩싸이는 징조로 민심이 심히 요동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런 재난들로 인한 앗시리아의 국력은 심히 약해져,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BC 760년경에 요나를 통하여 받은 ‘회개하라’는 그 묵시가 딱 들어맞으면서, 왕을 비롯하여, 전 백성의 회개와 짐승까지도 음식과 물까지도 마시지 못하게 하면서 그 심판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심판에서 벗어나면서, 국력이 막강해 지다가보니깐, 세계를 제패하게 되면서, 아니 세계 제패정도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지니깐, 그때부터는 전혀 경고의 말씀까지도 무시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나아지니깐, 생명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고 다들 망하는 길로 전심을 다하여 따라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앗시리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히 부한 사람들에게 무슨 명을 강력하게 요구하시던가요?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 성경은 진리입니다. 외면하면 앗시리아처럼 절망만이 영원토록 남게 하십니다. 그 후회의 통곡, 신음소리가 지금도 여기까지 들리고 있는데, 들려야 하는데, 어떤가요? ~
이제 나2장의 말씀을 봅니다. 2장에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 인한 니느웨 멸망의 비극의 참상을 예언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2장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1-7절에서는 니느웨 멸망 당시의 참상을 예언하시고 8-13절에서는 니느웨 멸망한 이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 차이점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가 당할, 당한 그 상태를 마치 다 보고 쓴 글과 같은데, 이 점에 대해서도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1절입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앗수르 너희들이 연합군 메대와 바벨론의 공격에 대하여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아야 절대로 안 된다는 역설과 조소가 가득한 내용입니다. 온 천하를 다스리던 그들이 왜 이런 조소와 멸시를 받아야 했을까요?
그 내용이 2절에 잘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두 가지입니다. (1) 야곱의 영광을,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회복시키시려고 앗수르가 공격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영광은 언약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하여 앗수르가 멸망을 당해야 했는가?
지난 시간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어떤 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순종하여 무너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도구들을 사용하셔서 타락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혼비백산케 하여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그 쓰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원리를 통하여 앗수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면 그보다 복된 역할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심판 날에 버려질 때, 나훔의 그 묵시를 들었던 그들은 얼마나 억울해 했을까요? ~
그러나 앗수르는 나무꾼의 도끼가 나무꾼 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망해야 했다는 것을 사10:12-19에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믿음의 이스라엘은 어떤가요? 망하더라도 나중에는 영광과 복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1:15의 말씀과 같이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하여 결국 성취가 됩니다. 나2:2에서의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은 아주 멀리 보고 내리신 앗수르, 즉 세상의 멸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멸망의 두 번째 이유는 나2:2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선민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공격을 하게 되면서, 망하게 된 이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북이스라엘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앗수르의 침공을 허락하셨을 때에 앗수르가 어떤 악랄한 짓을 했습니까? 이때는 주전724-722년경입니다.
왕하17:5-6, 29-33입니다. “5-6: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29-33: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그리고 왕하18:27입니다. 이때는 앗수르가 남 유다를 2차로 침공했을 때입니다. 주전700년경입니다. “랍사게가 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얼마나 비인간적인 태도입니까? 강자의 잔인무도한 횡포입니다.
특히 사10:13-14의 말씀을 봅니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앗수르는 재물을 약탈하였고 약자의 재물을 용이하게 탈취한 행위를 자랑했던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막강했으며 그 힘 앞에 약자들이 두려워 떨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했던 앗수르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고 교만했는지 알게 합니다. 무섭고 두려워서 떠는 약자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 특히 사마리아를 우상지역으로 뒤덮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앗수르가 멸망을 당했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교만하고 부패했던 이스라엘을 징계하는데 쓰임 받기는 했으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줄을 모르고 심히 교만한 짓을 행함으로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앗수르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에 대하여 나훔 선지자가 진지하게 심각하게 선포했을 때에 앗수르가 눈이나 깜짝 했을까요?
나훔 선지자가 앗수르가 망하기 50년 전, BC 660년경에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무섭게 선포할 당시 앗수르의 반응은 최강국으로써 나훔의 그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소의 귀에 경을 읽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앗수르가 누구인데 감히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서 눈꼽만치라도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나훔 선지자를 미친놈 취급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2:3-7의 내용을 보세요.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 도다,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그(앗수르 왕)가 그의 존귀한 자들(앗수르의 최고의 군지휘관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한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 도다”
앗수르의 멸망이 마치 실제처럼 당장의 터진 사태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미 본 것처럼 무섭게 섬뜩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50년 후에 터진 재앙을 마치 당장 그렇게 당하고 있는 것처럼, 선지자 나훔 자신이 그 사건을 직접 본 것처럼 경고했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 경고를, 요나 때하고는 달리, 아무도 믿지 아니하므로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타락하면 할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강하면 강하게 될수록 그 죄 값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사실처럼 생생하게 아니 그 심판에 대하여 몽땅 다 보여준다 할지라도, 힘과 부에 깊이 빠져 떡만을 원하던 그들은 결코 앗수르처럼 믿지 못하고 철저하게 멸망을 당하고야 만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천국, 지옥을 보여 주면, 믿고 교회에 나갈께요! 라고, 그랬던 그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준다고 해서 나갈까요? no way!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복음을 거부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보여준다고, 생생하게 들려준다고 하여 자신의 삶에서 결코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지 못하는 그런 자들에게 선지자 나훔을 통하여 생생한 설명까지도 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1) 생생하게 말씀하여 주시지 않았기에 믿지 못했다는 핑계를 주시지 않으시려는 것과 (2) 생생하게 설명을 해 줘도 믿지 못하고 결국 앗수르가 멸망을 당했다! 는 점을 남겨두시려는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3)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앗수르처럼 듣고서도 보고서도 회개하지 못하여 심판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에 대하여 듣고 볼 때,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뜻에서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이 악한 속성을 다 아시지만 그럴지라도 끝까지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생생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이심을 알게 합니다. 끝까지 한 영혼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특히 나훔 선지자의 순종은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도전을 줍니다.
주신 말씀 그대로 의심치 않고 전했기에 그 내용이 마치 심판으로 버림을 받고 있는 앗수르를 직접 가서 본 것처럼 선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훔의 이 예언이, 하나님 심판으로 앗수르가 당하는 그들의 참상을 너무나 실제적으로, 본 것처럼 예언할 때에, 너무나 뻔뻔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훔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참상을 본 사람처럼 망하기 50년 전에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훔 선지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제가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곁에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너는 참 뻔뻔하구나!’ 참 교만하게 보인다! 너는 죄 짓지 않니?’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기에 너처럼 그렇게 뻔뻔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어, 자기 자신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남에게는 죄 짓지 않는 의인처럼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로서는 못할 짓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그 친구에게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비록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 없다 인정해 주셨기에 나는 그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고, 의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만약 자네처럼 짓고 있는 죄가 너무나 미안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다면, 누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와 순종에 대해서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중요한 점은, 자네, 스스로 그런 태도 즉 죄가 있기에 미안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그런 태도가 신자로써 마땅하고 양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가 본데, 절대로 그렇지 않지, 죄인이 은혜를 입고 그 믿음으로 당당하게 아니 뻔뻔하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때, 그 복음이 어떤 능력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는데, 누가 아는가? ~ 그렇지 않니? ~ 은혜를 모르면 너처럼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전도를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녀들은 뻔뻔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이 있는데, 만약에 너와 같은 그런 태도가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기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입술을 다물고 있으면, 결국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지!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심으로 전하게 되면, 비록 뻔뻔해 보일 수 있지, 그래서 당연히 나 자신도 심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러나 전도하고 나면, 자신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고, 예전보다 죄 짓는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성도들은 그런 인간적인 가치와 원리에서 벗어나야 되고, 비록 우리들이 심하게 부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당당하게 전하게 되면, 그럴수록 신앙의 깊이를 더하게 되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지, 그러나 여기엔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은 밥 먹듯이 잠자듯이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같습니다. 우리도 나훔 선지자처럼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이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꾸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보면, 결국 자신의 생각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꽉 붙잡고 사는 주님의 제자라면 정말 미친 사람처럼, 천국과 지옥을 생생하게 가서 본 것처럼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본 것처럼 주님과 함께 사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합니다. 생생하게 전한다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체험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 하지만 말씀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결코 당당하게 전하지 못합니다. 당당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확신을 가진 성도들은 마치 본 것처럼, 직접 들은 것처럼 전하게 될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도 보세요! 당시 나훔이 앗수르의 참상을 본 것처럼 생생하게 전하는 역할을 했던 것도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바울도 그랬지만 고후13:5에서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나훔처럼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나훔처럼 확실하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고후13:5 :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잠2:1-5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예수님을 닮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죽도록 말씀과 씨름을 해 보세요! 놀라운 신령한 복을 넉넉하게 충만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나2:8-13절은 이제 심판 후에 앗수르가 당하는 참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8절부터 봅니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8절은 그 의미가 니느웨는 사막 한 가운데 있는 호수와 같아서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만큼 번창했었다는 것입니다. 입지조건이 최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 후반절을 보시면 그들이 50년 후에는 메대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앞다투어 모두가 도망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9절을 봅니다.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이 내용은 50년 후 멸망을 받을 앗수르가 그동안에 약한 나라들을 약탈과 조공과 전리품을 나름대로 풍성하게 저축해 놓았던 모든 것들이 그때에 늑탈을 당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마치 목격자의 증인처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12절의 내용을 보시면,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에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사자와 같이 막강했던 앗수르의 모든 옛 영광은 찾아보고 싶어도 전혀 찾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13절을 보세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 병거들이 살라 연기가 되고, 초토화 됩니다. (2) 젊은 사자들이 칼로 멸할 것이며 즉 앗수르의 용사들이 다 전멸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3) 내가 너희 노략하던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즉 앗수르 군대가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약탈을 일삼았지만, 이젠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4)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전쟁 시에 선전포고를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파견자들이 이제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완전한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을 나훔 선지자가 마치 본 듯이, 마치 직접 그날을 체험한 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예언한 것입니다. 얼마나 뻔뻔한 예언인지, 두 손, 두발을 다 들게 하는 하나님의 묵시입니다. 이 하나님의 묵시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하기에, 의심하지 않기를 원하시기에 그래서 주신 나훔서입니다.
물론 당시는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러나 당시에 나훔의 예언을 들은 자들이 늙어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그 멸망을 보면서, 너무나 정확하게 예언했던 예언들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직접 보게 될 때, 얼마나 기가 막혀 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경험을 한, 앗수르인들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중요한 점은 지금 우리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똑바로 깊게 가져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욱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면서 철저한 순종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1) 앗수르 멸망 50년 전에, 앗수르의 죄 때문에 받을 참담한 심판에 대한 예언과 심판 후의 그 참상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을 오직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기를 세상의 화려하고 멋진 대궐보다 1,000배, 10,000배 아니 그 이상 사모할 수 있는 자들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2) 앗수르 멸망 50년 전에 앗수르의 죄 때문에 받을 심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지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들의 모든 재산, 생명, 시간, 마음, 힘, 정성, 그 외에도 다 아낌없이 드려보자는 말씀입니다.
(3) 앗수르 멸망 50년 전에 앗수르의 죄 때문에 받을 예언된 심판이 50년 후에 그대로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미운 자들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손해도 보고 아픔까지도 대신 당해주면서, 호흡하는 날까지 죽도록 충성하고 또 충성하다가 삶을 마쳐보자는 말씀입니다.
(4) 앗수르 멸망 50년 전에 앗수르의 죄 때문에 받을 심판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만을 오직 믿고 살다가 죽어, 돌아가는 날에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들을 마음껏 맞아주시는 그 기쁨을 받아 보자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앗수르처럼 하나님께 대적이 되어 앗수르가 당했던 고난을 받고 또 그것도 부족하여 영원히 저주의 불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막힌 신세로 전락하고 싶으십니까?
그런 비참한 종말이 되지 않으시려면 길은 한길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을 통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지근한 길, 어중간한 길은 없습니다. 양다리의 식의 신앙도 용납 받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든지 살든지 아니면 세상을 위하여 죽든지 살든지, 그 둘 중 한 길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뻔뻔한 나훔 선지자의 길을 택하여 복을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듣고도 믿지 못해서 저주를 받아 버려지는 앗수르의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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