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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2023 나훔서 1:1-15 본문

주일 설교 말씀

9/10/2023 나훔서 1:1-15

PastorYK 2023. 9. 11. 10:16

말씀: 나1:1-15                                           

제목: 나훔의 묵시의 글

 

 

주전760 년경에 앗수르 수도 니느웨의 회개를 위하여 기록된 요나서하고는 완전 대조를 이루고 있는 내용이 나훔서입니다. 본서는 요나서 당시 100년 후인 주전660년경에 기록된 예언서로서 구원 차원에서 기록된 요나서하고는 전혀 다른 니느웨 멸망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기록된 묵시입니다. 앗수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결국 받게 된 이유가 요나 당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니느웨는 그 후 100 년간에 걸쳐서, 행한 그들의 태도는 간교했고 교만했으며 포악하기가 이를 때 없었다고 합니다.

 

앗수르의 부흥기였던 디글랏 빌레셋 3세(주전745-727)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주전727-722)때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면서 점령국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큰 자긍심을 가졌고, 반란자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앗수르는 약소국하고의 약속을 해 놓고 지킨 적이 없다고 합니다. 배반은 물론 속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안하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흘린 엄청난 피 위에 세워진 국가로 혹평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1) 하나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다시 패역한 행위로 세상의 화평을 무너뜨리는 니느웨에 대한 공의의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철저하게 이루어 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과 (2) 동시에 당시 앗수르에 의해 잔인한 억압과 핍박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며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해 나훔서를 기록케 하신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는 주전612년에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살(주전625-605)과 메대의 시악사레스 2세(주전625-585)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면서 예언이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나훔서의 내용 전개를 보면, (1) 1:1은 머릿말 (2) 1:2-15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포 (3) 2:1-13에는 니느웨 멸망의 참상을 예언 (4) 3:1-19에는 니느웨의 멸망의 원인과 필연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도, 나훔서의 주제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나훔서의 핵심 단어는 하나님의 권능, 주권입니다. 핵심 절은 1:15입니다. 핵심 장은 제 1장입니다.

 

1절부터 봅니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남유다 서남쪽에 위치했던 엘고스 사람 나훔에 의하여 받은 경고인데, 이제 곧 니느웨에 심판이 임할 것을 묵시의 글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묵시입니다. 묵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존’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곧 이상, 환상이란 뜻으로 본서가 신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본서의 내용인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중차대한 묵시의 글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힘으로써 거짓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유언비어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결국 나훔의 묵시의 글, 그대로 앗수르는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합니다. 그것으로 나훔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때문에 2-8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요나서와는 달리,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니느웨를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식의 질투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질투, 그리고 보복, 진노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시려는 차원에서의 단어들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였던 앗수르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자세를 취하였기에 심판을 받게 되었을까요? 사10:5-19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앗시리아는 내 분노의 막대기이며 그 군사력은 이 백성을 벌할 나의 무기이다. 내가 그를 보내 나를 노하게 한 나라를 치고 그 백성을 약탈하며 거리의 먼지처럼 짓밟아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앗시리아 황제는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사령관들은 모두 왕이 아니냐? 나는 이미 갈로와 갈그미스,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사마리아와 다마스커스를 정복하였다. 내 손길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이미 뻗쳤으며 그 우상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우상들보다도 월등하게 낫다. 내가 사마리아와 그 우상들을 파괴했는데 예루살렘과 그 우상들은 파괴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하나님)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하고 있는 일을 다 마치면 앗시리아 황제의 교만과 자랑에 하여 그를 벌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랑하고 있다. ‘나는 내 힘과 지혜로 이 모든 일을 수행하였다. 나는 총명한 자이므로 여러 나라의 국경을 없애 버렸으며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왕들을 쳐서 복종시켰다. 내가 세상 나라들을 얻은 것이 새의 보금자리를 얻은 것 같아서 버려진 새알을 줍듯이 그들의 재물을 주워 모았으나 손짓을 하거나 입을 벌려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도끼가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보다 낫다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잘난 척할 수 있느냐? 이것은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치려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교만한 앗시리아군에게 전염병을 보내 벌하실 것이니 그들의 모든 영화가 불에 소멸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빛이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불꽃과 같아서 단 하루 만에 가시와 엉겅퀴 같은 앗시리아를 소멸하실 것이다. 아무리 앗시리아 군이 막강하고 그 수가 많을지라도 그들은 병든 사람이 죽어 가듯이 전부 소멸될 것이며, 혹시 살아남는 자가 있다고 해도 그 수가 너무 적어서 아이라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도구였을지라도 교만한 앗수르는 주전612년에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문지화를 당하게 됩니다. 공의의 하나님, 위엄하신 하나님의 투기와 보복와 진노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간에, 권능의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지,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나1:2-8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1:2-8의 내용처럼 이스라엘일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못하면 매우 크신 권능의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늘 우리는 당장 죄에 대한 심판이 나타나지 않기에 얼마나 방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히 은혜의 시기이기에 심판이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왜 심판의 주로 오실까요? 오셔서 누구는 구원을, 누구는 버림을 받게 된다고 하시는데, 율법 없이 자유롭게 살던 자들이 버림을 받을까요? 구원을 받을까요? 마24:32-51, 마25:1-13을 참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마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마 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 24: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 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마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 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마 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마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 25: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분명한 점은 니느웨의 타락과 부패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기에, 멸망을 받아야 했듯이 마찬가지로 반드시 마지막 날의 심판도 임합니다. 돌연히 갑자기 한 순간에 그 날이 임하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날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인생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의 날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 주의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 날을 준비하는 삶이 되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공의의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하고 단지 힘으로 살던 그래서 망했던 앗수르와 같은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있기에 나훔서를 기록케 하신 것입니다. 심판 날이 없었다면, 심판에 대한 말씀이 다 유언비어요, 뜬소문이었다면 노아의 심판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아니 십자가의 저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 때에 죽였던 짐승의 피까지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있습니다. 성도라면 이 날을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운명이요 특권이요 그것이 지혜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눅21:32-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교회를 다니면서 세상의 욕심과 게으름과 이기심에 붙들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방심은 절대 금물인데, 은혜지상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율법 없는 은혜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기회를 주면 악의 세력은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고 공격을 즉시 할 것입니다. 

 

이제 9-15절의 내용이 바로 앗시리아가 멸망을 당하고 그리고 그 대신 유다는 회복된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9-15절에서 앗시리아는 멸문지화를 당하고 유다는 회복이 된다는 내용을 함께 기록하고 계시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10:5를 다시 봅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말씀하셨듯이 앗시리아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구가 하나님의 힘으로 얻은 세상의 권력과 힘을 자신의 지혜와 실력으로 얻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얻은 세상 권세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해 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회개케 하시려고 사용된 도구였는데, 그 도구인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능멸을 시켜 버립니다. 더 타락시켜 버립니다.

 

왕하17:6입니다.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그렇게 된 이유가 왕하17:7-18입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그런데 문제는 왕하17:24-33입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사마리아를 잡신의 나라로 완전 타락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주신 이스라엘 땅이던가요? 

 

겔20:6입니다. “그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그런 거룩한 곳에 앗수르 그들은 한수 더 떠서 더 더럽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남 유다마저 유린하면서 결국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그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왕하19:35-37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때가 주전680년경입니다.

 

결국 나1:9-14대로 됩니다.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가시덤불 같이 엉클어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나 여호와가 네게(앗수르)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  이 예언의 말씀처럼 그대로 멸망의 심판을 받고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유다는 회복이 됩니다.

 

나1:12-13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그리고 15절의 내용입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멸망을 당하는 앗시리아와 회복의 기쁨을 누리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상징하는 말씀일까요?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도 결국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천국에서의 삶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저주의 영벌을 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아무리 사랑이 크다할지라도 죄인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정죄하시기 전까지는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 주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분이지만, 계속해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 회개를 끝까지 하지 않는 자들은 북이스라엘, 앗시리아는 그 죄 값을 물어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녀들에게는 어떤 죄라도 완전하게 깨끗하게 사유해 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다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유다는 모든 지은 죄를 완전하게 씻음 받고 돌아오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때 유다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을까요?

 

그 내용이 15절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의 말씀입니까?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1)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 이 의미는 ‘유다 백성을 괴롭혔던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장차 성도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완전 제압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악과 싸워 오던 자녀들에게, 앗시리아와 죽기 살기로 싸워오던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이런 소식만큼 아름다운 소식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 소식이 우리들의 귀에도 생생하게 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에는 앗시리아의 멸망에 대한 심판의 소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소식에 우리는 끝없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앗시리아로부터 심각한 고통을 내내 받고 있던 이스라엘은 그들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소식에 힘이 나고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이 패망했다는 그 소식으로 기뻐하던 한국의 입장하고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도 완전 승리를 주셨기에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 기쁨이 충만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된다고 한다면 ~ 평생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좁은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 그런데 그런 교인들을 구원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까요? 좁은 길이 힘들어 쉽게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을까요? ~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무엇 때문에 기뻐해야 하고 무엇 때문에 슬퍼해야 할까요? 삶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까요? 

 

(2)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 대적 니느웨의 멸망 소식은 자연히 유다 백성들에게 화평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여기서 화평을 전하는 발이 산 위에 있다는 뜻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더 널리 그리고 더 빨리 전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악질 앗시리아의 멸망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속도 이상으로 유대인들에게 급전파되면서 위로와 화평을 얻었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죄에서의 해방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고, 강력한 최고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기에 지금까지 모두에게 전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런데 죄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고요? 말이 됩니까? ~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발언을 할 수 있을까요? ~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완전 그 반대일 것입니다. 때문에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시고, 그 복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칭찬은 얼마나 클까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52:7에서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복음의 증인의 그 발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역할을 나훔 선지자가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에서 감당했습니까

 

이제 심판을 받아 곧 멸망을 당할 앗시리아 수도 니느웨에서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상황하고는 전혀 다른, 저주의 내용을 가지고 나훔은 목숨을 걸고 순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사역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기회가 없는 오직 심판만이 남은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감히 전했던 나훔입니다. 나훔은 (1) 세상 절대 권세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2) 교만하고 사악하기 한없었던 앗시리아에게 굴하지 않았습니다.  (3) 자기 편이 아무도 없는 니느웨에서 오직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외로운 거룩한 싸움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분명히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나훔은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무서운 말씀만을 선포하는 역할이었지만 나훔은 순종했습니다. 앗시리아가 이제 어떻게 망할 것인지, 그 처참함을 선포할 때에 듣는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런 말씀도 복음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앗시리아인에게는 암담했었겠지만, 그러나 그런 나훔의 순종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날에 승리를 위하여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간절한 간구를 날마다 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 본서의 능력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함을 한층 더 일깨워 주는 말씀이기에 나훔서도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의심을 할 수 없게 합니다. 

 

신앙인들이 게을러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해 주실 때, 어떤 반응을 했던가요? 렘2:29-30, 5:3입니다.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렘5:3 -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심지어 백성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아십니까?

 

렘5:31입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렘6:13-15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심판에 대하여 믿지 말라,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평강하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심판 때문에 내일을 준비하는 성도들은 더욱 갈수록 죄와 싸우면서 경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아들 므두셀라가 죽을 때 임하므로 그래서 에녹은 늘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위로도 필요하겠지만, 그 위로는 열심히 믿음을 붙잡고 거룩한 땀을 흘리면서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복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죄에 깊이 빠져서 허덕이는 자들에게는 상급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를 몰라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칭찬과 격려보다는 치료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치료를 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더럽혀 있는지 우선 보여 줘야 합니다. 보여 줄 때에 비로소, 치료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는 그 수술 후에 필요합니다. 때문에 지금처럼 깊이 타락한 처지에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목회자들이 위로의 말씀보다는 나훔이 보여준 죄를 지적하고 심판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험란한 사역의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악은 반드시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 목이 터져라! 주님의 마음으로 곳곳에서 쉬지 말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목이 터져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데 복음을 외칠 이유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것이 어찌 아름다운 발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사실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아끼지 말고 외치고 또 외치는 삶이 됩시다! 이것보다 아름다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택함을 받은 자녀들의 삶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날에 임할 형벌의 심판을 면하는 복된 자가 되었기에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15절의 말씀처럼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고, 은혜를 입은 제가 볼 땐, 자기 뜻이 아닌 거룩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말씀 중심의 삶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가치와 기쁨을 모르기에, 죄의 종에서 벗어난 그 놀라운 감사를 모르기에 말씀 중심의 삶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자녀들의 삶은 절기를 지키려는 거룩한 수고를 위하여 몸부림치는 싸움을 쉬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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