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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8/27/2023 미가서 6:1-18 본문

제목: 변론하시는 하나님
일반적으로 재판을 하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힘이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괴롭히기에 약한 자들이 바른 공정하고 공평한 판단을 받으려고 가는 곳이 법원입니다. 때문에 재판은 약한 자를 위한 곳이요 공정과 정의 때문에 허락된 기관입니다. 그런데 온 우주의 주인 되시고, 통치자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속을 썩이는, 방자하기가 끝이 없는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일방적인 조치로 이스라엘을 단번에 해 치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지 않으시고, 대책 없는 문제아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하고 변론하자, 쟁변하자!’ 하십니다. 부패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미6장에 잘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얼마나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그 위치에 있었다면, 하나님처럼 그렇게 절차를 밟으면서라도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 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보시면,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의 소유물입니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던가요? ~
그럼,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가요? 누가 우리에게 맡기셨나요? 자식들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부모 마음대로 하고 있지 않던가요? 자녀들까지도 단지 맡겨 놓으셨을 뿐인데 자식들까지도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의 방법과 원리로 함부로 양육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것이었지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변론과 쟁변을 통하여 너희들이 저지른 죄를 묻고 그리고 자백하고 돌아서려고 하면 탓하지 않으십니다.
마18:21-22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의 범위가 7번까지가 아니라 7의 77번까지라도 용서 해 주시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녀들에게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심어, 점과 흠이 없는 자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신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그렇게 귀한 믿음의 자녀들을 만들어 주시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래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세워 주셨고 이스라엘을 구약 내내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못하자, 새 언약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십니다. 바로 나 때문에 그리고 교회를 세워 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된 우리들은 어떠해야 될까요? ~ 한 영혼, 한 영혼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하여 주시면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에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믿는 우리들도 서로가 주님 안에서 한 지체로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인격적으로 상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장을 보시면, 아직도 자신의 죄를 버리지 못하는 방자하기 이를 때 없는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심판을 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식으로 고발하시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쟁론)하여 작은 산들 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왜 이런 식으로 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변론을 하자는 것일까요? 아직도 자신들의 지은 죄에 대하여 전혀 부끄러운 줄로 모르고 완고한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에 그래서 정식으로 고발하는 고소문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죄를 묻는 본문에서 산과 땅을 등장 시키시는 이유는 산과 땅은 불변과 진실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의 변론으로 산과 땅까지 증거자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원고가 되신다면, 이스라엘은 피고, 그리고 산과 땅은 증인이 된 셈입니다. 아주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이처럼 산과 땅을 증인으로 내세우신 것은 오히려 산과 땅이 그 오랜 세월 속에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다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인내와 긍휼로 돌보고 계셨는지를 다 목격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어찌 비 인격체인 산과 땅이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듣고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증인으로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비 인격체가 아닌 인격체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향한 답답한 하나님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땅과 산의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얼마나 신실하셨고 인내하셨는지, 그 점에 대한 결백을 분명히 하시면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쟁론, 변론을 통해서라도 바로잡아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넘치도록 담긴 본문입니다. 그것은 1-2절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변론하시겠다는 뜻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변론하시겠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에서는 ‘바로 잡다, 책망하다’의 뜻을 가진 쟁론을 ‘변론하여, 변론을 들으라’라고 번역을 했지만 우리들이 보았던 개역 성경에서는 ‘쟁론하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뜻은 히브리 원어로 ‘리브’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의 뜻은 아직 최종적인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판결을 위하여 죄의 여부를 묻고 죄를 밝혀내는 행위를 나타내는 법정 용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쟁변, 변론하자고 하시는 그 뜻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밝혀내시려는 의도와 부패한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고 감사하도록 하시려는 뜻에서 ‘쟁론하자, 변론하자’라고 하셨지, 포기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주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산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서 쟁변, 변론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3-5절을 보시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먼저 3절을 봅니다.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 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3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계약을 성실하게 준수하셨다는 점과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을 철저하게 위반했다는 점을 고발하시면서, 하나님의 극한의 양보와 함께, 역설적으로 꼬집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이렇게까지 인격적으로 참아 주시는데, 왜, 너희들은 너희들이 저지른 죄로 인한 고통을 왜, 나에게 불평을 하느냐! 하시면서 속상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산이 알고 땅이 다 아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이스라엘처럼 자신이 지은 죄, 허물 등으로 인하여 삶이 불안하고 힘들 때에 쉽게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자신이 지은 죄와 허물로 당연히 받아야 되는 그 대가를 놓고, 왜 다수의 교인들이 하나님께 원망을 할까요? 하나님께 원망하는 그들을 보시면, 그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잘나갈 때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철저하기 외면하면서 잘난 척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던가요?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미련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전혀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고 복이 되는 것일지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기준인데, 자기를 믿는 것은 참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편없는 그런 자녀들일지라도 회복시켜 주시려고, ‘나하고 변론하자!’ 하셨고, 이 점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쟁변하자고 하기 전에, 미리 항복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 물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때와 동일하신 은혜로 변론하자! 쟁변하자! 하십니다. 그러나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로 철저하게 인격적인 항복을, all in을 얼마나 학수고대하시고 계실까요? 깨닫고 회개하여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힘 것, 마음을 다하여 드리기를 늘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신앙이란 회개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선한 싸움을 쉬지 않아야 됩니다. 왜 선한 싸움을 매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면, 인간의 본성이, 우리들의 실체가 참 악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이 본질상 죄 덩어리들이기에, 단 몇 초, 몇 분이라도 기회를 주면 어디로 뛰는지 아시지 않나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긴장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난 며칠간에도 코로나-19에 감염이 되어 쩔쩔맬 때에도 어떠했는지 잠시 말씀을 드리면, 몸이 아파서 쩔쩔매는데도 아파하면서 기도하는 자신을 보고 있으면서, 무슨 팔자가 이런 가? 라는 생각이 잠시 들더라고요! 물론 머리가 너무 아픈 목요일은 성경은 예전대로 읽지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현실이 쉽지 않음과 그럴지라도 기도드리는 자신을 보면서 이것이 은혜의 결과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심히 아파도 주님에게 나아갈 때, 그 자녀들을 보시는 주님의 그 마음이 어떨까요?
얼마나 대견 해 하실까요? ‘아파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나와서 도움을 청하면서, 깊은 신앙을 간구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라는 느낌을 더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6장을 보면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는 애간장을 하도 태우기에 그래서 쟁론하자, 변론하자고 하시는데, 너는 그렇지 않으려고 하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셨는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까? ~ 하여튼 코로나-19가 또 귀한 경험을 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격려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수고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닙니까? ~ 우리는 만세 전부터 약속된 구원을 이루시려고 수고를 하시는 하나님의 그 손길을 생각하면, 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은혜가 우리들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할까요? 그 엄청난 복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 우리가 받은 구원은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조화와 섭리 가운데 받은 선물이기에, 너무나 절묘한 가운데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과정 속에서 얻은 구원이라, 남은 삶을 경건을 위하여 all in 해야 할 것입니다. 만세 전에 기록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은 사랑이요 기적이요 지혜 그 이상이십니다. 그 택함으로 우리들은 그대로 절묘하게, 흐르는 세월을 지나면서 한 영혼도 놓치지 아니하시면서 태어난 자녀들을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하시려고 여기에 계신 우리 모두를 죄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는데, 어떻게 가볍게 살 수 있을까요? ~ 그것은 마치 온 세상 바다 모래 속에서 아주 작은 바늘을 찾는 식과 같은, 찾음보다 더 주도면밀한 선택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샤야 선지자를 통하여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사49:13-16입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그런데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큰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변론과 쟁변하심을 지금 우리들이 필요한 자가 된다면 참으로 곤란한 것이 아닐까요? ~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변론하심과 쟁변하심을 들어야 했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4-5절의 말씀을 통하여 증명하십니다.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4절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 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그리고 신6:21-25, 8:14, 사63:11, 렘2:6, 호2:15, 암2:10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6:21-25부터 봅니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공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신8:14-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렘2:6-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호2:15-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암2:10-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출애굽의 이 사건을 반복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를 다시금 재확인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확인을 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능력을 모두가 함께 기억하여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벧후1:10-1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때, 성도 된, 우리들이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어떤 유익이 되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억한다면, 그래서 주님만 경외하면, 복이기에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들을 보면, 신4:32, 6:4-9, 8:2, 9:7, 11:2-7에서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신약에서도 하시는 말씀을 봅니다.
벧후3:2입니다.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면서 순종할 때, 그러면 어떤 복을 약속하셨는가?
신28:1-3, 6, 12의 말씀을 보세요! “1-3,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고 불순종을 한다면, 어떤 약속을 하시던가요? 신28:19입니다.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주시면서 동일하게 출애굽과 같은 구원을 늘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고 있나요? 결국 구약 내내 실패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그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구원까지 책임을 맡게 된 신약의 우리들이 된 것을 히11:40에서 알 수 있게 하십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서 점점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약속을, 신실하심을 늘 기억하라고 하셨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면서 결국은 인도하여 주시면서 어떤 기적을 이루어내시던가요? 많은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건들을 밤낮으로 기억하려고,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고,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켜보려고 그래서 쩔쩔매고 있는 가운데서도 나중에 보면 믿음이 자라가는 자신을 보게 되지 않던가요? 참 안 되는데, 안 되어서 심히 고민하면서 교회에 나오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까지 자란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 기억이 암기식의 기억은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기억은 나의 고집과 이기심과 욕심과 악한 마음까지도 다 집어삼키려는 기억이 되셔야 합니다. 나의 고집과 이기심과 욕심과 악한 마음과 싸우려고 하지 않는 차원에서의 기억은 무가치한 기억일 뿐일 것입니다. 무가치한 기억은 매 안식일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암기했지만, 결국 율법을 완성키 위하여 오신 주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행13:27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는 말씀은 신앙의 능력이 안 됩니다. 말씀이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옛 세상의 원리들, 습관들, 가치관들, 심지어 좋아하던 것들까지도 신앙에 방해가 된다면, 인정사정없이 가능한 다, 뿌리까지도 뽑으려고 그 빈 공간 안에 생명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보려고, 쩔쩔매면서 따라가려고 하셔야지만 됩니다. 때문에 말씀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똑바로 배워야 되고,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로 도움을 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좁은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가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의 말씀일지라도 빛으로 능력으로 생명의 법으로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경건을 위한 피 흘리는 선한 싸움을 하실 때, 피와 땀을 흘리신 만큼, 세상에서의 그 달콤한 음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래야지 점차적으로 자기의 행보를 말씀 위에 굳게 세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과 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의지하여 자기영혼이 주님과 동행하도록 수고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너희들을 40년 내내 인도하셨음을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변론과 쟁변까지 하자고 하셨는데, 그 목표는 그들의 회개와 회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 구약의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통하여 너희들을 어떻게 인도하여 주셨는지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아! 제발, 정신을 차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럽히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신약의 우리들이 제대로 신앙의 삶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셔야 했을까요?
마11:20-23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신약의 너희들에 보인 그 권능을 행하였더라면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신약의 자녀들이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마11:24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더욱 강력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사사로이 풀지 않고, 억지로 풀지 않고 있다면, 제 생각인데, 2000년이 지난 지금은 이미 복음이 땅 끝까지 전달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
믿는 가정들과 교회들이 바르지 못하므로 인하여 받는 그 조소와 조롱이 아닌,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삶의 본이 되어 세상의 조롱과 조소를 받으면서 내일을 함께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구약의 이스라엘하고는 차원이 다른, 완전한 조건에서 전혀 부족함 없는 신앙을 받았기에, 그래서 잘 지켜나갈 수 있는 복된 자들인데, 어떤가요? ~ 놀랍게도 구약의 실패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신약의 우리들은 믿음의 조상들로부터 가장 부러움을 받아야 되는 교회이어야 하는데, 갈수록 부패하는 꼴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쟁변과 변론으로 하자고 한다면, 가장 부끄러운 자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조건에서 가장 귀한 부름을 받았기에 성경의 어느 누구보다도 심령이 더 가난하고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어야 합니다. 당연히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의를 행하기에 늘 바쁜 삶이 되셔야 합니다.
5절입니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먼저 (1)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의 이 말씀은 민22장, 23장, 그리고 24장의 걸친 긴 내용입니다. 발락 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강대함에 겁먹고 선지자 발람의 복술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함으로 쳐부수려고 했던 계략입니다. 그런데 이 발람의 악한 계교를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압 왕 발락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군사력으로나 인간의 지략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스라엘에게 어떤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던 이방 모압의 왕 발락에게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복의 근원이 되심을 알게 하셨을 정도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복을 누리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죄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변론과 쟁변을 하시자고 하셨던 것입니다.
(2)‘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의 말씀은 발람이 비록 거짓 선지자이었지만, 그러나 발람에 대한 이 말씀 역시 이스라엘이 받은 바 큰 은혜를 실감케 해 주는 사례가 됩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 발락이 큰 뇌물과 극진한 대접으로 그의 마음을 미혹시키려고 했었지만, 결국 어떤 축복을 하던가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발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도리어 거듭된 축복을 하게 됩니다. 그 사실이 민23:8, 20-26에서 잘 나타납니다.
“8-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20-26: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와 같은 인용에서 보듯이 우리는 잠시 그 뇌물에 대한 욕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람의 마음까지도 돌이키시고 또 그의 입을 빌려서 축복을 하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죄에서 떠나라는 간절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려고 이스라엘과 변론과 쟁변을 하자고 하셨던 것입니다.
(3)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이 말씀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예전의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의를 깨닫게 하셔서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통하여,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로써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싯딤은 사해 북쪽 모압 땅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싯딤과 마주한 땅으로 가나안 입성 후의 첫 주둔지었습니다. 바로 그 두 곳 싯딤과 길갈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싯딤에서 떠나 요단강에 도착하여 강을 넘는 수3장 수4장과 수5장에서는 길갈에서의 할례로 고통 중에 있을 때에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게 보호하셨던 두 곳을 추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 추억을 기억하고 더 이상 우상숭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정리합니다. 만왕의 왕이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전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도와주신 사건들까지 언급하시면서, ‘나하고 쟁변하자 변론하자’ 하시려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까지 하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가? 입니다. 마치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돋아 나무가 되게 하시려고 엄청난 기적과 능력으로 인도하시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억하기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고 회개하지 못하므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역시 우리도 무서운 책망과 징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셔야 하는데 그것은 결코 생각한 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위하여서는 가장 먼저 하셔야 되는 일은 쉬지 마시고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읽고 순종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는 열심을 하셔야지만 됩니다.
그러하실 때, 소망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겠지만 그러나 믿음이 자라는 것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해를 위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마치 큰 바위에 수백 년 동안에 뿌리를 내렸지만, 그래서 큰 소나무로 자라지 못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소나무보다 강하다고나 할까요? 그 가치는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자람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경건의 수고를 끝까지 밥을 먹듯이 잠을 자야 되듯이, 하신다면, 어느 시점에 와서는 자신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밥 먹듯이 잠을 자듯이 성경읽기와 배우기와 기도의 수고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 같지만, 그러나 가장 어려운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로 거룩한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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