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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2023 요나4:1-11 본문

주일 설교 말씀

6/25/2023 요나4:1-11

PastorYK 2023. 6. 26. 13:09

말씀: 욘4:1-11                                          

제목: 박넝쿨로 인한 요나의 희비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들을 보면, 어떤가요? 다들, 고집들이 얼마나 세던가요? 고집불통이라는 별명까지도 시원치 않다고 다들 공감하지 않습니까? 죄로 인한 모든 사람들은 다들 한 고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들 선하고, 성실하게 보이다가도 살다가 보면, 자기의 나름대로의 숨겨진 악하고 미련한 본성들이 튀어나오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놀라게 되는지 모릅니다. 180도로 달라질 수 있는 자신 때문에 그래서 자기도 다른 모습의 자기를 보고 놀랍니다. 그런 경험이 없었나요? 특히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꼬마들도 보면, 어떤가요? 거침없이 그대로 거친 표현, 과감한 노출이 드러나곤 합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면, 물론 인격이 준비 되지 않아서 여전히 아이들처럼 자기 통제가 되지 않아서 분노하는 성인들도 적지 않지만, 그런 부끄러운 성인이 아니라, 최소한 자기 비위에, 누가 또는 무엇이 거슬리게 되면, 스스로 어느 정도는 절제를 하여 꼬마들처럼 즉각적인 분노나 거친 표현이 노출이 되지 않도록 하겠지만, 그러나 자기 속마음은 어떤가요? 큰 폭풍이 일고 있지 않던가요? ~ ‘그래 너 두고 보자!’ 식으로 말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름 자기 식의 이기심과 고집과 욕심을 가지고 있기에, 그래서 하는 말이 있지요!  역시나 사람은 같이 살아봐야 돼!~,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몰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간에 민망스러운 점들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욘4장에 등장하는 요나 선지자도 보세요! 자기 성깔대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매우 싫어하면서 성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성깔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요나가 노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에 노인이 이 정도라면 정말 곤란하겠지만, 제가 볼 땐, 한 20대 후반에서-30대 중후반의 요나가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제가 왜 이 시간에 나이를 들먹입니까?~ 특히 힘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은 믿음이 충만하기 전까지는 거의 외모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수가 많은 시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객기를 부리는 층이기에 많은 이해와 간섭이 필요합니다. 그 뜻은 외모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힘의 사람들의 약점이 실은 남의 충고와 경고와 권면을 거의 듣지 못하고 자기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겪고 백발이 된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가요? 

 

힘이 아니라 경험, 지혜가 힘이 되어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고 이해의 폭이 넓어, 힘의 젊은이들보다는 실수가 적다는 점입니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철이 나지 않은 분들도 적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게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젊은 분들에게 부탁드리려는 점이, 경험이 부족하여 힘과 외모로 판단하게 되는데, 가능한 그러지 말고 나이가 가장 많은, 경험이 확실한, 영원 전의 하나님, 세월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자기 삶의 판단과 힘의 기준이 되게 하자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젊은이는 확실할진데, 영원토록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듣지 못하고 힘과 자기 기준으로 살게 되면, 지금의 그 아픔과 슬픔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나이를 먹게 되면, 주변으로부터 어떤 대상이 되는가 하면,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욘4장에서의 요나의 모습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평생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싫어하여 멋대로 하는데, 그래서 이것을 하라고 하면, 성질을 사는 내내 부리다가, 나중에 늙어, 예수를 믿는다는 너는 어찌 나이를 먹어도 그 모양, 그 꼴이냐! 이런 책망을 받을까, 걱정이 심하게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좋아하고 스스로 미워하고 스스로 즐기려고 하지 마세요! 박넝쿨 하나로 일희일비하는 요나 꼴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저 사람은 괜찮다’고 착각하여 혼인을 했다가 그것이 올무가 되어 결국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결혼생활을 갖게 되는지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알 것입니다. ‘스스로인 자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객관적인 정확한 판단을 못하게 되고, ‘스스로가 강하면’ 가족, 스승 또는 친구의 충고나 권면까지도 듣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나와 같이 박넝쿨로 희비하는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늘 결혼 후에도 순진한 나를 감쪽같이 속였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비난하게 되는데, 그건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자기 착각인 스스로가 준 현실입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지, 상대방이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함께 교독하신 말씀도 보세요! 요나의 고집과 이기심과 미련함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나의 그런 약점이 자신의 약점인지를 모르기에 창조주 지혜의 하나님에게, 감히 어떤 방자하고 불경스런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성숙하시고 지혜로운 자신이 되시고 싶으시면 욘4:1의 말씀을 수없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1절을 봅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성내며” 시51:3-4의 “내 죄가 하나님 앞에 항상 있고 주께만 범죄하여” 이 점을 모르기에 그러는데,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하여튼 요나 스스로 악한 니느웨의 회개를 보면서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옳았었는지를, 2절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나님께 당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악한 니느웨에게까지도 그들이 회개를 한다면, 분명 재앙을 내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요나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뚱한 다시스로 도망을 했는데, 왜, 나를 다시 붙잡아 와서, 악한 니느웨가 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내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습니까? ~ 그래서 심히 분노하고 있는 요나입니다. 요나 자신과 똑같은 60만 명이 회개하여 복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싫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넝쿨의 그늘로 크게 기뻐하다가, 예비된 벌레를 통하여 갉아 먹게 하여 박넝쿨이 시들어져서 잎이 떨어지자,  그늘이 사라지면서 뜨거움을 참지 못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불평하는 이 요나를 보면 어떤가요? ~ 아니 어떻게 박넝쿨을 자신과 똑같은 니느웨 사람 60만 명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나요? 전혀 말이 안 되는데, 이 말이 안 되는 말씀을 왜 남겨 두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누구든지 요나의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물론 요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입고 그래서 제사장 나라가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도 모르는 앗수르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있었나요?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진대, 지금까지의 불순종으로도 멸망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는 이스라엘인데, 그렇게 부끄럽기가 짝이 없는 제사장 나라의 선지자가 감히 하나님에게 할 수 있는 불평인가요? ~ 3절을 보세요! 무엇이라고까지 하면서 하나님께 함부로 대들고 있던가요?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말이 됩니까?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요나입니까

 

지금 우린 어디에 와 있나요? 여전히 요나처럼 악인의 회개로 죽여 달라고 불평하고 있는 자신은 아닌가요? 아니면, 우리들이 그 요나에서, 이젠 은혜로 벗어나 요나와 똑같은 조건, 아니 더 악한 조건인데도, 깊은 감사의 찬양을 드리면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위하여 수고를 하고 있나요? 아니면 큰 폭풍 속에서도, 큰 물고기 속에서도 전혀 상관이 없이 여전히 가서는 안 되는 세상 다시스로 향하고 있나요? ~ 우리가 2750년 전의 옛 말씀인 이 요나서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어떤 결심을 해야 할까요? 이 요나를 통하여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끼셨나요? 아니면 아무런 느낌 없는 요나서였나요? ~ 다시스로 도망치던 요나같은 내가 은혜로 니느웨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는 새로운 자신이 되었기에 그래서 깊은 감사를 느끼셨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 말씀을 보시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면, 지금 요나의 상태보다 더 불안하고 위험한 조건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희일비하는 그 박넝쿨이, 한 영혼보다 더 소중할 수 없고 특히 박넝쿨이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도 해 줄 수 없습니다. 아닌가요? 그런데 이 사실을 몰라, 요나는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장의 사라질 박넝쿨과 같은 재물이 일희일비가 되면, 우리들도 요나처럼 하나님에게 이런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다시스로 가고 있나요 니느웨로 가고 있나요?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원수가 회개했다고 하여 요나처럼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나요? 감사드리고 있나요? 만약에 전자라면, 회개의 기도를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은 더 큰 폭풍이 와서 요나 때와 비교할 수 없게 더 무섭게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의 변화로 시베리아의 온도가 섭씨 40도로 여름을 방불케 하고, 남극, 북극의 빙하도 무섭게 녹고 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몽골 지역의 사막화, 캐나다의 산불, 미국의 토네이도와 주먹 크기의 우박, 엄청난 물고기들의 떼죽음, 귀뚜라미 재앙 등 기후의 변화로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흉흉한 지 이젠, 어린 10대 아이들까지도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매일 총기 사고로 생명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세의 그 끝이 왔음을 신랄하게 notice를 하고 계시는데, 때늦은 후회로 통곡을 하려고 합니까? ~ 

 

말씀과 기도의 삶이 없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미련하고 답답하고 무의미한지를 우리는 이런 요나서를 통하여 다시 점검하셔야 합니다. 점검을 하시면서 자신의 옛 생각을 은혜의 능력으로 철저하게 뽑아버리든지, 씻어버리든지 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요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더러운 성질, 끝까지 지지 않으려는 고집을 완전하게 뽑아내기 위하여 거룩한 싸움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어떻게 싸우라고 하시는지를 히12:4를 보세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달콤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전하면, 우리들이 잘 알아먹어 자기의 죄와 피 터지도록 싸워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요나를 보세요! 요나가 불순종으로 그 큰 폭풍과 큰 물고기 뱃속까지 들어가서 바다 밑바닥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왔었지만, 욘4장에서 요나가 하나님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 악질 요나와 같은 악질이 우리들입니다. 결코 점잖은 소리와 방법으로는 자기의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죽 하셨으면, 하나님께서도 죽기까지 왜 하셨나요?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가 피 흘리는 기도와 통곡하심과 안타까움으로 계시다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셨나요? 난리법석이 없이는, 큰 폭풍과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서는 안 되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큰 은혜를 입었어도 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를 위하여 간곡한 기도가 날마다 항상 유지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신앙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우린 지독한 악질들입니다. 육신의 자신과 악의 세력에게 기회를 잠시라도 용납하게 되면, 여지없이 신속하게 치고 들어옵니다. 치고 들어와서는 믿음에 대하여 의심하게 하고 현실에 대하여 불평하게 되면서 육적으로,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 다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 때문에 쉼 없는 말씀의 묵상, 그리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정도로 힘든 골방에서의 쉬지 않는 기도 생활을 유지하지 않으면, 언제나 요나의 그런 불경스러운 태도가 튀어나오게 되면서 불평하게 되고 이웃에 민폐를 주고 맙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이 세상에 광범위하게 피해를 끼치게 되는지 아신다면, 말씀과 기도의 삶을 죽는 순간까지도 결코 skip하는 날이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특히 세상적인 어떤 소망을 위한 그런 기도들은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그런 세상의 형통과 자랑을 위한 기도 제목은 아예 근처도 못 오게 막아야 됩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하여 철저한 통제와 조정이 되어야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요나가 다시 내가 되어 이런 못나고 악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한심스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쉬지 말고 간절하게 수십 년간을 고민할 때, ‘그 고민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셔야 하는데’ 그 고민을 늘 하는 자들만이, ‘이제, 내가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가 확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놀라운 고백인지 아십니까? ~ 해야지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요나의 이 미련하고 악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저보다 나은 분들입니다. 저가 은혜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여러분들도 그 거룩한 고민을 하시면서 자신의 죄와 싸운다면 그 결과가 더 만족할 것입니다. 3절의 요나도 보세요!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미련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취해 달라는 무서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4-5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너의 고집과 이기심과 성냄이 합당치 않다고 하시면서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요나에게 vine을 가지고 설득하시는 귀한 말씀이 6절부터 나타납니다. 6절을 보십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여 그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말미암아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박넝쿨이 요나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기에 심히 기뻐하는 모습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도 요나 성격이 단순하고 성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다혈질의 소유자임을 잘 알게 합니다. 조금만 맞지 않으면 심히 분을 내고, 조금만 맞으면 심히 기뻐하는 요나입니다. 통제가 안 되는 혈기가 넘치는 거친 요나입니다. 하여튼 참으로 힘든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생각 없이 변덕이 죽 끓듯 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다시 7,8절을 보시면 더욱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또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늘을 주던 박넝쿨이 시들게 되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지 못하자, 요나는 스스로 죽기를 구하면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불평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요나를 보시면서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어느 누구누구가 생각이 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나, 사라질 박넝쿨과 같은 재물, 즐거움 때문에 불평하는 요나가 바로 자기가 아닌가요?~ 

 

무엇보다도 더욱 어리석은 모습을 본문 8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박넝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박넝쿨은 자기의 이기심과 고집과 욕심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살면서 나에게 잠시의 기쁨과 아픔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는 박넝쿨과 같은 것이 아닌가 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즐거워하는 어떤 경우 또는 어떤 사람은 사라질 박넝쿨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박넝쿨에 대한 기쁨과 불평은 본질이 아닙니다. 사라질 박넝쿨을 보고 일희일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지, 얼마나 준비가 안 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신인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도 박넝쿨로 인하여 불평하는 요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합당한 성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지금 너 자신의 고집, 이기심, 욕심, 미련함 때문에 나타나는 성냄이지, 떨어진 박넝쿨이 너를 성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다시 하나님께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합니까? 9절 후반부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동문서답하는 요나입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요나의 답변입니까? 자기의 아집, 이기심, 욕심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꾸하는 소리가, 시든 박넝쿨로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므로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 자기는 아주 합당하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미련한 억지를 지금 누가 부리고 있던가요? ~ 하라고 하면, 다시스로 도망쳐서 큰 폭풍을 만들어 버리고, 곧 사라질 하찮은 그런 박넝쿨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요나의 그 모습을 보면, 영원할 수 없는 재물, 즐거움, 승리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지금 우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 사라질 박넝쿨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요나서를 주신 것이 아닙니까? 요나처럼 미련한 자기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에,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 미련하다 못해 오히려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요나를 통하여 아주 잘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중국의 태공(太公)은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캄캄한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명심보감 근학편의 주문공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집이 가난할지라도 가난함으로 인하여 배움을 폐해서는 안 되고, 집이 만일 부유할지라도 부유함을 믿고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 부지런히 배우면 가히 몸을 세울 수 있고, 부유한 사람이 부지런히 배우면 이름이 이에 빛날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출세하는 것은 보았으되, 배우는 사람이 이루지 못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배우는 것은 곧 몸의 보배요, 배운 사람은 곧 세상의 보배다. 그러므로 배우면 이에 군자(君子)가 되고, 배우지 아니하면 소인(小人)이 되나니,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은 마땅히 각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식하면 어떻습니까? 준비없이 용감하지요 준비없는 용감이기에,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므로 공동체의 누가 되게 합니다. 준비 안 된 자의 무모함이 함께 하는 이웃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경험하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특히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에게 말씀을 배우자, 골방기도를 드리자! 주일예배에 참여하자! 대부분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바빠서, 아파서, 지금은 아직 아니라서, 나는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답변을 아주 태연하게 할 때가 바로 요나 식의 어처구니 없는 무식한 답변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대답을 합니다. 이 동문서답은 모두를 큰 폭풍 속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10-11절에서 주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루 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아꼈다면, 하물며 박넝쿨과는 전혀 비교도 아니 되는 수많은 니느웨 생명들을, 만군의 하나님이 사랑하고 아낀 것이 어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것도 600,000명이나 되는 생명이 회개를 했는데 어찌 네가 합당치 않는 분노를 내고 있느냐! ~

 

그렇게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요나는 박넝쿨 하나로 결국 모든 고집과 이기심과 욕심을 포기했을까요?~ 결국 요나의 생각이 겨우 한 개의 박넝쿨 가치도 못 되었다는 것임을 박넝쿨을 통하여 깨닫고 회개를 했을까요?~ 한 개의 박넝쿨도 못되는 가치를 가지고 요나는 죽기까지 하겠다고, 오히려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까지 큰소리를 치던 못난 자신을 생각하면서, 훌륭한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했을까요? ~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자신의 판단과 생각은 박넝쿨 한 개만치도 안 될 수 있습니다. 

 

왜요? 박넝쿨은 최소한 동풍을 막아 그 유익이 될 수 있지만, 믿음 없는 사람들은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엄청난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신의 그 모든 선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 결과는 측량할 수 없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요나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얼마나 손해인지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얼마나 독이 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재앙이 임하는지를 알라고 하십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이런 주전 750년경의 구닥다리 요나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자를 얻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중의 지혜가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도구가 요나와 같다 할지라도 아니 요나보다 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 즉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거리 불문, 시간 불문하시고 한 치의 실수와 오차도 없이 만세 전에 택하신 그 자녀를 죄에서 끄집어내시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우리 역시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중력 때문에 떨어지듯이, 우리들의 구원도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의 손길을 통한 성취입니다. 지독스럽게 고집불통의 요나와 같은 수많은 그런 종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시고 그래서 죽기까지 순종을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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