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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6/11/2023 요나2:1-10 본문
말씀: 욘2:1-10
제목: 너무나 귀한 나 한 사람이기에-큰 물고기에 갇힌 요나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복을 주시고 싶으셔서, 거룩한 차원에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큰 폭풍과 큰 물고기 뱃속을 방불 하는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자랑하면서 큰 위로와 회복의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못난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큰 폭풍과 큰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요나를 회개케 하시고, 원수의 나라 니느웨의 60만 명과 온갖 짐승까지도 살려서 모두에게 기쁨과 승리를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우리가 큰 폭풍을 만나거나 큰 물고기 뱃속으로 빠지게 되면, 어떤가요? 그 고난과 환란을 저주와 심판으로 여깁니까? 아니면 회복과 성장의 기회로 여깁니까? 보통 전자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데,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모두에게 복을 주시려는 고난과 환란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환란과 고난을 회복과 성장의 기회로 여기려면 과학이나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은혜가 알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주신 은혜인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롬1:16을 보세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은혜인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죽은 나도 살리고, 죽은 이웃도 살립니다. 과학의 과학도 할 수 없는 능력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환란과 고난을 거룩함으로 만들어 만유의 하나님만을 닮게 하고 영원히 승리케 하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성도인 우리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나요? 넉넉하면서도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더 가지려는 능력인가요? 아니면 큰 폭풍과 큰 물고기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능력인가요? ~ 은혜는 자신의 모든 세상의 성공과 즐거움 그리고 모든 아픔과 고통까지도 다 품어, 무엇을 낳게 하십니까? 자신과 이웃의 안전과 평안과 승리를 이루어지게 하지, 미워하고 불평하고 좌절하고 근심 걱정을 하게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부는 이렇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종교행위, 열심, 어떤 능력으로 가려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다들 종교행위와 열심과 능력으로 평가하다가 보니깐, 지금 교회현실이 어떤가요? 하나님께서 아니 계십니다. 그 자리에 돈과 힘이 앉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온통 온 세상이 큰 폭풍 속이요, 큰 물고기 뱃속을 방불케 합니다. 그래서 욘1, 2장의 큰 폭풍과 큰 물고기를 특별한 사건으로 보지 마시고, 죄가 주장하므로 이 세상이 큰 폭풍 속과 같고 큰 물고기 속과 같다고 저는 봅니다. 지금 우리 주변과 인간의 모든 현실이 큰 폭풍 속과 무엇이 다른가요? 큰 물고기 뱃속처럼 인간의 현실도 보면, 실은 어둡고, 냄새나고, 시끄럽고, 불안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요?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믿어야 되는 곳이 아니라 훈련하는 훈련소일 뿐입니다. 그런데 큰 폭풍 속에서 성공, 큰 물고기 속에서의 형통을 이루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합니까? ~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이는 능력만을 구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이 무엇밖에 없다고 하십니까? 마12:39-40과 마16:4를 봅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마16:4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마태복음에서만 두 번씩이나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왜요? 유대인들이 큰 폭풍 속에서 큰 물고기 뱃속과 같은 현실에서 능력과 힘의 삶만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책망이 그 다음에 말씀되고 있습니까?
마12:41입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은혜를 입은 너희들이 요나를 통하여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면, 어쩔려고 그러는가? 라고 책망하십니다. ~ 그런데 지금 어떤가요? 큰 폭풍과 큰 물고기 뱃속과 다르지 않은 세상 안에서 힘과 형통만을 구하던 유대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우리들을 보면서, 요나까지 정신 차리라고 고함을 치는 그 목소리가 들려야 되는데, 들리시나요? ~ 오늘의 말씀이 만화와 같기에 사실이 아닌 신화로 풍유(allegory-우화: 교훈적, 풍자적인 내용을 동식물로 빗대어 엮은 이야기))로 언급하면서 의심을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그 기적과 기사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로,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물론 무슨 뜻인지를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자유와 생명을 주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전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과 논증을 근거한 과학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거룩한 말씀인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 소설(fiction), 만화, 신화(myth)로 치부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이 진리이기에, 지금까지 은혜인, 복음이 큰 폭풍 속에서도, 큰 물고기 뱃속과 같은 현실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요4장에서 사마리아의 여인을 만나 구원을 이루어 주셨듯이, 지금까지도 전혀 조금도 방해 받지 않고 은혜의 복음은 시냇물이 흐르듯이 그 한 생명,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흐름 속에 현대판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회개하고 주님의 제자로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큰 폭풍과 물고기 뱃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과 섭리 속에서 더 부자가 되려고 하십니까? 욘1:4처럼 자신이 탄, 인생의 배가 다 깨져 도탄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드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일어나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욘1:2에서 명하셨지만 요나 선지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합니다. 그 요나가 지금 우리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거룩함인가요? 세상의 성공과 형통인가요? ~ 후자이기에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향하여 요나가 탄 배에 대풍을 명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은 요나처럼 불순종으로 인한 대폭풍인가요? 아니면 순종으로 인한 대폭풍인가요? 전자이건 후자이건, 그러나 우린 요나처럼 큰 폭풍과 물고기 뱃속과 같은 그런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폭풍 속에서 요나는 두렴없이 다 잊고 배 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잠은 어떤가요? 순종 후의 단잠입니까? 아니면 요나처럼 하나님의 뜻은 뒤로 하고 보이는 세상의 일로 깊이 취한 잠입니까? ~ 그런데 그때, 뱃사공들이 잠들어 있는 요나를 보고서는 깨워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고백합니다. 자기 때문이라고 인정을 하면서 자기를 폭풍의 바다 속으로 던져버리면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스스로 목숨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래서 던져 버렸는데 어떻게 됐나요? 자신의 몸을 바다에 내던지자 예상한 대로 흉흉하던 바다는 잠잠해 지면서 배와 사공들이 모두 안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대신 요나는 아주 깊은 바다 속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가운데, 죽는가 보다 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만화 같은 신비한 일을 준비해 주십니다.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삼켜 3일3야를 머물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십니다. 그 방법이 도무지 상상을 할 수 없기에 그래서 요나서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던가요? 신화(myth)나 풍유(allegory) 등 비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12:38-41, 마16:4에서 요나의 표적을 두 번이나 언급하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 요나의 이 사건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의심할지라도 은혜를 입어, 빛을 받아, 보고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은 100% 다 믿습니다. 그보다 더한 기적도,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표적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
그런데 정말 믿고 있나요? ~ 바다의 큰 폭풍과 큰 물고기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데 큰 폭풍과 같은 현실이 두렵고, 큰 물고기 뱃속과 같은 자기 현실을 두려워하셔야 할까요? 아니면 회복의 기회로 여기셔야 할까요? ~ 물론 처음에는 두려울 수 있지만, 그러나 곧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기에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인내하게 되면서 거룩함을 위한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 환란이 더 순종하게 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게 할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은혜는 환란이 더 큰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롬5:3-4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없는 성장과 부흥은 환상입니다. 환난 속에서 진정한 성장과 부흥과 경건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이 은혜로만 해결이 되기에 롬5:5를 보세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 즉 하나님의 사랑인 은혜로 약속된 그 소망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의 열매가 은혜의 목적인데, 누가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고 하던가요? 누가 형통을 위한 은혜라고 합니까? 은혜는 자기의 뜻을 더욱 부인하게 하고 갈수록 더욱 정결하게 하고 감사가 깊어지게 하고, 주님 만날 날을 준비하게 하지, 세상에서의 형통이 아닙니다. 신앙을 형통에다가 두게 되면, 문제가 생길 때, 이겨내지 못하고,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나중에는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지옥을 방불하는 세상 안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내일을, 죽음을 준비하는 자들로 살아갈 것입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한 개라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인격의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큰 폭풍과 함께 큰 물고기의 뱃속을 준비해 두셨다가 결국 정결하게 하시고 경건한 자가 되게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성도에게 인내는 칭찬이지만 포기는 죄악입니다.
셋째로, 드릴 말씀은 믿음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용기요 지론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지론이 얼마나 큰 무지에서 온 말인지 아는 자들은 다 압니다. 특히 과학자들이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연구하면 할수록 그 앎의 깊이도 깊어지겠지만, 그러나 알아가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보이는 법입니다. 알면 알수록 인간의 힘과 능력의 한계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늘의 끝을 누가 압니까? 누가 땅의 그 중심과 바다의 밑바닥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깊이는 무한대입니다. 그래서 옛 학자들이 단지 하늘을 보면서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명심보감의 천명편을 보시면, “순천자존, 역천자망-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에 거역하는 사람은 망한다” “획죄어천 무소도야-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몰랐던 먼 옛날 중국의 최고의 학자였던 춘추전국시대의 공자도, 그 하늘 앞에서도 이러했을진대, 하늘을 창조하신 인격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입니까?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무한대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셨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회복과 거룩함을 위하여서는 큰 폭풍, 큰 물고기까지도 다 동원하여 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을 보더라도 요나의 물고기 사건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진리 앞에서 얼마나 무지하고 무식한 자신인지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큰 물고기 뱃속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것도 3일 3야를 말입니다. 요나에게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아니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아주 작은 소망까지도 바랄 수 없는 절체절명의 그런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고래가 호흡할 때마다 들어오는 짠 바닷물로 인한 고욕, 먹어대는 먹이로 인한 고통, 호흡 곤란, 게다가 꼼짝 할 수 없는 공간에서의 3일 3야는 3년처럼 느껴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전의 삶이 얼마나 나았을까요? 예전에 호흡하고 마음대로 뛰고, 먹고, 마시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만나서 교제하던 예전의 삶이, 그 지옥 같은 환으로, 다르게 평가 됩니다. 그간 감사하지 못했던 요나 자신이 폭풍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므로 있는 동안에, 그간 모든 것, 부부싸움까지도, 사업의 실패까지도 다 복된 시간이었음을 제대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그동안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했고 방자했는지, 어떤 이기주의자였는지, 철저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이 어떤 복인가요? 고난이 자기에게 큰 유익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어떤 말씀이 생생하게 들려졌을까요?
시119:67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절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 냄새, 그 모든 장기가 움직이는 소리, 좁은 공간에서의 갑갑함, 불안감, 그리고 목마름과 배고픔까지도 삼일 삼야는 지옥이었지만 그러나 그전의 자기의 삶은 천국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회개의 기회와 함께, 욘2: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물고기도 순종하여 요나를 토해 냅니다. 비록 지옥을 방불케 하였지만, 그는 불평도 원망도 그리고 힘들어할 수도 좌절할 수도 없는 요나의 3일3야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회복과 감사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고난의 시간을 참으로 가장 복되고 하나님과 가장 깊이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시간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드려질 수 있는 기회가 되라고 하십니다.
비슷한 사건이 성경에 있습니다. 행16:19-25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런데 어떤 기적이 일어나던가요?
행16:26-36입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고통의 시간과 경험을 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이런 고통의 시간들이 잠자던, 방심하던 우리들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아픔의 시간들이 성숙하게 합니다. 이런 힘든 시간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연합을 하게 됩니다. 이 막막하고 답답한 고통의 시간들이 현실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 사라질 현실에서 벗어나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지옥의 시간을 바로 주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의 최악의 시간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기적과 능력의 시간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또한 그 죽음의 긴 시간을 지났기에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고후11:23-27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1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다윗도 사울 왕으로부터 10년 넘는 집요한 무서운 추적을 받으면서 더욱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을 최고의 나라로 통치하는 믿음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25년간 자식 없는 나그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랑스런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임한 고통의 시간이 길고 아프면 아플수록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견디는 성도들은 은혜 없이, 고통 없기를 원하는 일반인들의 모든 면에서도 생각과 처신도 다르고, 어떤 결정하는 판단 능력에서도 훨씬 뛰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심보감의 성심편을 보시면, “부관고애 하이지전추지환, 부림심연 하이지몰닉지환, 부관거해 하이지풍파지환” 무슨 뜻입니까? “높은 벼랑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어찌 굴러 떨어지는 환난을 알며, 깊은 연못에 임하지 않으면 어찌 물에 빠지는 환난을 알며, 큰 바다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어찌 풍파의 환난을 알랴?” 사람은 자신이 직접 어려움을 겪어 보아야 남의 어려움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시 고통은 누구에게나 성숙하게 합니다.
요나도 물론 불순종으로 받은 환난이었지만, 그러나 폭풍과 물고기 사건은 더없이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실은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은혜 안에서도 다 지나고 나야 비로소, 알게 되고 보이게 됩니다. 그 과정은 인간의 눈과 지식과 능력으로는 분별과 분간이 되지 않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실제로 요4장에서도 그 상황을 이미 보셔서 다 알고 있으시겠지만, 처음에는 왜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지역을 굳이 지나갈 이유가 있었는가? 유대인이라면 다들 피해 지나가는 곳인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제자들 모두도 이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던가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미 다 계획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철저한 준비와 큰 집념과 열심과 영적인 싸움을 통하여 해결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은 우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연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고 아니 기대도 전혀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대로 되고 그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내시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만남도, 남녀가 만나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것도, 심지어 우리들이 낳은 아이들까지도 다 계획된 그 과정 속에서의 지금의 현실들이지,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법은 구원 안에서는 하나도 없더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남녀로 태어나는 것도, 부한 가정과 나라에 태어나고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 지금 태어나거나 과거 조선 시대에 태어나는 것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성공하는 일도, 실패하는 일도, 어떤 심각한 사건까지도 그리고 자연재해까지도 우연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 있었던 과거요 현실입니다. 미래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그런 차원에서 요나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는데, 그 말씀에 불순종을 했다고 하여 이런 폭풍으로 배가 거의 깨지는 지경까지 가야 했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위기에 놓여야 했고 결국 요나가 그 큰 폭풍을 해결하자고 던져지면 죽을 수 밖에 없는 바다 속으로 던져져야 했습니다. ~ 그런데 놀랍게도 던져진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까지 동원하여 집어 삼키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나요? 이해를 전혀 할 수 없는 선택이요 상황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떤 결단과 선택을 했을까요? 하나도 같은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린 이런 상황으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대하여 누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린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사건들에 대하여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크고 작고에 상관없이 이로 인한 불평과 원망과 슬픔과 좌절의 아픔까지도 이겨내야 합니다. ~
그러나 여기서 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큰 폭풍과 큰 물고기가 동원되어야 했을까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 아주 깊고 깊은 그 속에, 아니 아주 멀리 나중에 또 그곳에서 살아야 하던 바로 내가, 우리들이 앞으로 그 세상인 니느웨 성안에서 살아가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너무나 더럽고 추하고 못난 짓들을 저지르고 있었던 자녀들이, 그 구원의 기회를 놓치면 더 늦어지면 영혼이 버림을 받고 말기에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에 누구를 쓰시던가요? 못나고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요나를 택하여서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멋지고 훌륭한 주의 종이 아니라 얼마나 미련한 지, 지난 시간에 살펴보지 않았나요? ~
그런 못난 종까지도 동원하여 살려야 될 사람,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뜻을 우린 요나서를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 괜찮은 주의 종을 찾고 계십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잘나면 잘 날수록 더 큰 폭풍을 가져오게 합니다. 더 큰 슬픔과 아픔을 입게 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일은 실력 있는 인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그 한계와 무지함까지도 다 알고 계시기에 똑똑한 일꾼들을 쓰지 않습니다. 실력 있는 일꾼을 쓰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돕고 살펴줄 자리도 기회도 없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교회가 결국 악덕 기업으로 변질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지, 그 무지의 끝이 없음을 알고 늘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사역자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돈과 힘을 자랑하는 목회자가 세워지면 교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세상 자랑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면서 잠시 용납해 달라고 고후11:16-23에서 말씀을 하지 않던가요?
고후11:16-23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바울 자기도 남처럼 자랑할 것이 없어서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의 말씀입니다.
심지어 헤롯 왕도 보세요! 행12:20-23입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감히 그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다가 어떻게 되었나요? 주의 사자가 쳐 즉 충(벌레)이 먹어 죽게 합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온 역사를 주장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썩어질 육신의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자비가 없습니다.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실력 있는 주의 종들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게 되면, 이 세상은 더 추하고 악해지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실력 실력, 능력 능력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모습이 어떤가요? ~ 좀 더 좀 더 가지려는 욕심과 장수로 세상이 더 정결하고 정직하고 화목하던가요? 그 반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까지도 육신의 것들을 좀 더 가져도 된다고 하셨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 자족하고 더 갖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것만을 우선적으로 준비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셔도 거룩한 준비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은혜, 은혜’하면서 사라질 세상의 것들만을 더 준비하고 있는데, 결국 그 현실은 어떤가요? 혼돈 혼란 그 자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방종이 자유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어도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어도 되고, 남녀부부가 남남, 여여부부로 바뀌는 것까지도 법적으로 인정이 되고 있고, 심지어 목사 직분까지도 동성연애자들을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정직한 과정이 아니라 그 결과만을 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유는 ‘좀 더’라는 물질물량주의자들이 만든 기이한 결과입니다. 변칙, 또라이, 변태가 통하는 묻지마 식의 괴이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비정상적인 괴이한 현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한 사람 씩, 한 사람 씩, 서서히 점점 더 많아지게 되면서, 이젠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한 사람부터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가보니깐, 어떻게 되었나요? 거짓과 악함이 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을 치게 되면서, 정직과 선함이 이젠, 눈치를 보면서 숨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사람 위에 물질입니까? 물질 위에 사람입니까? 생명이 우선이 아니라 물질이 우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2:27입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도 안식일을 위한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안식일이라고 하십니다.
요4장에서도 한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십니다. 바로 창녀인 사마리아의 여인입니다. 창녀 한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그 놀라운 발걸음, 열심, 수고, 죄의 결박을 풀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을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눅15장에서 돌아온 탕자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존귀한 생명체인지를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요6:39에서도 보세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우리 각자가 우리의 한 영혼들이 어떤 기막힌 놀라운 과정 속에서 얻어낸 구원 받은 자신인지를 깊이 알고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곳만 더 봅니다. 마25:45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형편없이 보이는 한 영혼일자라도 그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게 되면, 이에 대한 보응은 무섭습니다. 아주 영원히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치는 요나를 돌이켜 세상의 타락한 니느웨를 회개케 하시려고 큰 폭풍과 큰 물고기까지 동원하셨습니다. 우린 어떤가요? 큰 폭풍과 큰 물고기보다 더 큰, 아니 비교도 아니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은 삶을 어느 쪽으로 향하셔야 할까요? 세상의 부와 형통입니까? 거룩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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